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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손가락의 리더, 작곡가, 기타리스트, 책가옥(冊架屋) 대표 이두헌을 만나다

2021년 5월호(13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5. 10.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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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다섯손가락의 리더, 작곡가, 기타리스트, 
책가옥(冊架屋) 대표 이두헌을 만나다

 

‘지나간 버린 어린 시절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 꿈도 꾸었지♬’
젊었을 때 이 노래를 흥얼거린 독자들도 많이 있을 듯합니다. 바로 ‘다섯손가락’이 부른 노래죠. 이뿐 아니라,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새벽기차’, ‘이층에서 본 거리’ 등 우리에게 익숙한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섯손가락의 리더이자 작곡가, 기타리스트, 교수, 현재는 책가옥을 운영하고 있는 이두헌 대표를 만나기 위해 4월의 싱그러움과 함께 용인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성
아버지는 평안도 분으로 어려서부터 악기도 다루고, 스케이트도 탈 정도로 부유한 양조장집 아들이셨죠. 하지만 남한에 내려오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툇마루에 앉으셔서 하모니카를 불면 그냥 부는 수준이 아니라, 반주와 멜로디를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죠. 클래식, 국악 등도 좋아하셔서 집안에 음악이 끊이지 않아, 어려서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큰집 누나가 대학 본고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서 클래식 기타를 하나 가져왔어요. 누나가 기타를 칠 때마다 어깨너머로 듣고 흉내를 내다보니, 두어 달 정도가 지나 웬만한 곡은 다 칠 정도의 실력이 되었죠. 이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본격적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친 건 중2 때였는데, 우연히 밴드 활동을 하고 있던 김성호라는 분을 소개받았죠. 이분이 제 첫 번째 스승입니다. 중학생인 제게 기타 치는 법, 악보 그리는 법, 편곡 뿐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까지 가르쳐주셨죠.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이분은 군대에 갔고, 저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터득해 갔습니다. 
제가 기타를 치며 음악을 좋아하니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 없이 기타를 사주셨어요. 공부를 나름대로 잘했던 저였기에, 음악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북 분으로 성질이 급하셨고, 이북에 두고 온 게 많아서인지 자주 화를 내셔서, 정서적으로도 불안하셨죠. 아버지는 화목한 가정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결혼 후 10년 동안 보지 않았는데, 화해도 하지 못한 가운데 돌아가시고 말았죠. 기본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표현 자체가 유난히 서툴고 거치셨어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글 솜씨
어머니는 충청도 분으로 글재주가 좋고, 항상 집에서 책을 읽으셨어요. 그래서 다른 집에 갔는데 책이 없거나 책을 읽지 않고 있으면 ‘도대체 이 집은 뭐하는 집이지’라고 생각할 정도였죠. 어머니 덕분에 저희 4남매는 항상 책을 가까이했고,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었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읽지 않은 책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글도 잘 쓰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런 영향이 제가 직접 가사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책가옥 내부


‘다섯손가락’의 시작_이두헌, 임형순, 최태완, 이태윤, 장혁
중·고등학교 때부터 ‘피아노’하면 최태완, 베이스는 하광훈, 이런 식으로 지역마다 유명하다는 애들이 있었는데 서로 잘 알고 지냈어요. 저를 가르친 김성호씨가 중앙대학교 블루드래곤 연습실에 저희를 가끔씩 불러, 각각의 파트를 가르쳤는데 그게 다섯손가락 멤버들의 시작이었죠. 우리는 대학에 가면 팀을 만들어 꼭 대학가요제에 나가자고 했어요. 당시 대학가요제는 대학생들의 꿈과 로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대학가요제를 나가기도 전에 얼떨결에 정식 가수가 되었죠. 1983년 KBS‘젊음의 행진’대학생 오디션에 발탁이 되어, 방송에 나가게 된 겁니다. 방송 출연경험이 있으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지 못하거든요. 젊음의 행진에 나갔던 음악가들이 옴니버스 음반을 냈는데, 거기에 저희 두 곡 ‘그 작은 순간들’, ‘사라진 가을’이 실리면서 정식으로 밴드 가수 데뷔를 하게 된 것이죠.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탄생
그 후, 지하연습실을 만들어 녹음한 것들을 당시 유명하다는 레코드사에 보냈습니다. 오아시스, 신세계, 서울음반, 지구레코드 등 다 돌렸는데, 한 곳도 대답이 없었죠. 그러다 신생 음반사인 서울음반에서 연습하는 걸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전영혁, 김진묵, 왕광순 등 당대의 유명한 팝 컬럼니스트들이 저희 지하연습실에 찾아왔죠. 이때는 가요보다 팝이 더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저희 노래를 들어보더니 제작을 해도 되겠다 하더군요. 그러면서 1집을 내야 하는데 히트될 만한 곡이 없으니, 저에게 빨리 한두 곡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막바지에 쓴 두 곡이‘새벽기차’와‘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었고, 이 두 곡이 히트곡이 되었죠.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 음악으로 탄생하다
대부분의 제 노래는 거리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차가 흔하지 않아 걸어 다닐 때가 많았는데, 거리를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음악으로 만들었죠. 곡을 만들려면 먼저 노래의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해요. 어디에 쓰일 노래인지를 우선 정하는 것이죠. 서커스에 사용할 노래를 우아한 클래식 스타일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항상 뼈대가 되는 스타일과 내용을 정하고 다음에 템포, 리듬, 조성 등을 만들어가죠. 작곡이 막힐 때는 우회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거기에서 살짝 떠나 있다가 새로운 돌파구가 나오면 곡이 탄생하는 거고, 계속해서 정리가 안 되면 그 곡은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죠.

40년 음악 활동, 나에게는 호흡과 같은 것
저에게 음악은 호흡 같다고 할까요? 숨을 안 쉴 수 없잖아요. 음악을 하는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에게 음악적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악보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웬만한 음은 귀로 다 들을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손이 자연히 돌아가니 기타를 칠 수밖에 없어요. 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가 없죠. 어디가 불구가 되지 않는 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여기까지 왔어요. 중간중간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작곡해 준 히트곡이 제법 있어 안정된 저작료 수입으로 생활해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컴퓨터 음악의 선구자
80년대 후반부터는 컴퓨터 음악을 했는데, 1.5세대 컴퓨터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김건모, 조규찬, 최성수, 김종찬, 유익종 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수의 곡에 컴퓨터 음악을 만드는 편곡 작업,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죠. 작곡가이지만, 다른 사람의 음반에 컴퓨터를 사용해 트랙을 만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어요.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같이 음악 하는 사람들이 ‘이제 본인의 음악 생명은 끝나서 이 일을 하나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했습니다. 일반 작곡료보다 3~4배가 되니 수입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1993년 즈음‘이것은 아니다. 이 일은 평생 하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30세,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정리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 중, 기타에 불이 다시 지펴지다
미국 보스톤 버클리음대의 프로듀서를 양성하는 ‘뮤직 프러덕션 앤 엔지니어링’과에 1년 과정으로 연수를 갔는데, 그곳에서 기타과 교수님들의 콘서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기타에 불이 지펴졌죠. 당장 서울에 연락해 기타를 보내 달라 하고 과를 기타과로 바꿨습니다. 3년을 공부하고 졸업을 했지만, 내친김에 LA에 있는 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학교로 가서 기타 전공으로 석사까지 마쳤습니다. 1993년에 가서 2000년에 들어왔으니 7년을 꼬박 기타에 매달렸습니다.

음악의 전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다분히 건방진 음반을 한 장 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음악은 못할 걸’ 하는 분위기의 음반이었죠.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연주자들과 녹음한 것들인데, 재즈, 비밥 재즈, 펑크, 라틴삼바, 얼터너티브 락 등 장르의 종합선물이라 할 정도로 12곡 모두가 난해하고 어려운 곡들이었죠. 한마디로 음악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예전에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밖에 쓰지 못했다면, 이제는 연두에 에머랄드, 그린 등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죠. 이후, 경희대 겸임교수로 발탁되어 실용음악과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커피와의 인연
저희 어머니는 선구자 같은 여성이셨죠. 사업 감각이 뛰어나셔서 80년대 초반 연대, 숙대 앞에서 커피숍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젊으셨을 때부터 세계적인 수준의 커피를 드셨는데, 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일본에 가수 신승훈을 진출시키는 프로듀서로서 일을 진행했는데, 일본에서는 커피가 마실만 하더군요. 순수한 커피 하나만으로도 맛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커피에 프림, 설탕을 넣어야 먹을 만했는데 말이죠. 조금씩 커피에 관심을 가지던 차에, 도쿄 ‘오모테산도’(Omotesando)라는 거리를 걷다, 유독 마음에 드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간판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곰 잡을 정도 수준으로 연기가 자욱하더군요. 

 

 


커피 한 잔을 시키니,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데, 마치 백조 한 마리가 정지되어 서 있는 것처럼 멎은 상태에서, 한 방울 한 방울 아주 정성스럽게 내리더군요. 75cc 정도 되는 커피를 마셨죠. 그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렸어요. 그날 바로 도쿄의 야마모토라는 커피용품 파는 전문점에서 커피와 관련된 도구를 있는 대로 다 사 왔어요. 제가 뭔가 하나에 빠지면 뿌리를 뽑는 게 있거든요. 여러 도구를 사용해 로스팅한 후, 결정적으로 다이보 가쓰지 선생님이 쓰시는‘디 로스터’가 제 손에 들어왔어요. 우리나라에 한 대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제가 처음으로 썼죠. 그 후로 핸드 로스팅만 해 왔는데, 독일 기계보다 일본 기계가 저에게 맞는 것 같아 지금은‘후지 로얄’이라는 기계로 커피를 볶고 있습니다.

커피의 매력
사실 커피를 하기 전에는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서초동의 서래마을에서 ‘피노’라는 와인바를 했어요. 제가 직접 와인 칼럼을 쓸 정도로 와인에 관심이 많았고 무척 좋아했죠. 하지만 와인은 제가 포도 농사를 지을 수 없을뿐더러, 다 되어있는 완성품을 수동적으로 마실 수밖에 없었죠. 물론 커피도 농사를 지을 순 없지만, 생두가 오면 그 이후부터는 커피를 볶고 갈아서 어떤 방법으로든 한 잔의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까지,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제가 다 할 수 있죠. 뭔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라는 자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가(冊架)옥(屋)을 열다
‘책가’는 책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거문고, 도자기, 술병, 기타 등을 놔둘 수 있는 가구를 말합니다. ‘책가옥’은 ‘책가가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름만 보고 생각하는 북 카페는 아닙니다. 와인바 ‘피노’도 처음에는 음향시설을 갖춘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공연장이었는데, 음악이 점점 술 마시는 사람들의 들러리가 되거나, 손님들이 음악을 제대로 듣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것은 아니다 싶었죠. 책가옥은 이전의 피노와는 정반대의 공간입니다. 

책가옥, 누구나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의 공간은 아니다
먼저 책가옥에서 커피는 항상 최고여야 합니다. 각자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나, 정확하고 정성스럽게 내린 좋은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대형 로스팅을 하지 않고, 하루에 커피 3kg 만을 직원들이 손수 골라 로스팅합니다. 로스팅의 양이 10kg, 50kg, 100kg이 되는 순간,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두 번째는 친하지도 않으면서도 대충 인맥 자랑하는, 문화 같지 않은 문화공간은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 최고의 공연 장소로, 언제든지 바로 공연이나 음악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책가옥입니다. 


음향을 고려해 천정의 높이도 7미터가 넘고, 전체가 나무로 되어있죠. 유리쪽 홀딩도어 안에도 흡음과 방음이 되어있어, 전체 방음이 5미터 이상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실을 길게 해놓은 이유도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기 위해서죠. 모든 인테리어를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죠. 네 번째로 이곳은 음악가들의 음악을 존중하며 듣는 공간입니다. 심지어 커피를 파는 곳임에도 공연을 할 때는 어떤 음료도 팔지 않습니다. 재즈, 트로트, 클래식이든 끝까지 공연하는 사람의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아티스트들에게도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가들은 소품공연을 할 수 없습니다. 악장을 끊어서 하거나, 듣기 좋은 곡만을 연주하는 게 아닌, 전 악장 공연을 원칙으로 하죠. 그러다 보니 클래식 음악가들이 이 공간을 너무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자작곡이나 자기가 들려주고 싶은 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합니다. 클럽에서나 하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공연은 받아주지 않죠. 그래서 책가옥이 누구나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의 공간은 아닌 것이죠.

지금까지의 삶에 영향을 준 스승들
먼저는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쓴 ‘한대수’라는 작곡가에게 제일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 앨범 노래 제목에 ‘한대수’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니까요. 대중음악을 처음 듣고 충격을 받은 게 한대수 곡에 김민기의 목소리로 ‘바람과 나’라는 노래였고,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수가 아니라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분은 ‘이정선’씨 입니다. 이분은 70세가 넘으셨는데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 분이세요. 제가 볼 때 가장 저평가 된 작곡가이자, 저평가 된 가수라고 생각해요. 작곡, 연주, 가사도 최고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한 번도 억울해하신 적이 없어요. 

 

지금도 10명이든, 1000명이든 기타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노래하시고, 정말 낙천적이죠. 어렸을 때부터 이분을 너무 좋아해 제가 거의 비슷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장 큰 스승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 USC에서 공부할 때 교수님이셨던 ‘조.디오리오’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예요. USC에서는 졸업할 때 개인 리사이틀을 총 다섯 번 해야 하는데, 부담감에 수전증과 무대 공포증까지 겪어야 했죠. “저는 도저히 이 학교 졸업 못 할 것 같다”고 했을 때, 이분이 딱 기타를 내려놓으라 하더니 집채만 한 몸으로 저를 안아주더라고요. “너는 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다, 네 소리를 내면 된다.” 이분의 격려 때문에 다섯 번 리사이틀을 잘 마칠 수 있었고,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다섯손가락 신곡으로 ‘나는 나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곡이 나오는데, 이 곡의 제목을 떠오르게 해준 교수님이시죠. 이 세 분은 저에게 테크닉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커피든 본인의 생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거죠.

 

 

책가옥 외부


개인적 바람, 책가옥의 방향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클래식분야의 작곡입니다. 비틀즈의 ‘폴매카트니’도 클래식 작곡을 하거든요. 초등학교 1~2학년 때 제일 좋아했던 음악은 국악과 클래식이었는데, 클래식 음악을 굉장히 동경했어요. 특히 슈베르트를 너무 좋아해서, 작곡으로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상대로 가게 되었죠. 


그래서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도 클래식 쪽에 더 비중을 두고 공부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제 음악에는 클래식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언젠가는 클래식 곡을 쓰고 싶은 마음에 지금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가옥은 조금씩 조금씩 더 작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70, 80이 되어 나이가 들어갈 텐데, 그러면 제가 이 공간의 50명을 감당하지 못하겠죠. 제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안에서, ‘나 힘드니까 하지 않을 꺼야’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줄여가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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