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딸의 소리를 찾아서… 목포까지

2022년 12월호(15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5. 5. 17:11

본문

딸의 소리를 찾아서…  목포까지

대회에 출전한 딸 아이

 

시나브로 겨울에 들어섰다. 기온은 점점 낮아지고 마리나는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12월부터 2월까지 수도를 잠근다. 배들 위로 눈과 먼지가 엉겨 붙고 날이 더 추워져 1월쯤 한강이 얼어붙으면 언 강을 망치로 깨며 배를 보호하기 위한 선장들의 눈물겨운 겨울살이? 들이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다. 할아버지 칠순 잔치 때 많은 관객들 앞에서 차분히 취미로 배운 흥보가를 부르는 딸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는 진짜 소리, 옛날 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할머니 명창 선생님을 찾아 남도로 유학을 왔다. 똥 삭힌 물을 마시고 온종일 산과 폭포를 찾아다니며 득음을 하시던 시절의 명창 분들은 이제 많이 돌아가셔서, 공력이 있는 옛 소리를 들으며 배울 곳을 찾기 어려웠다. 유튜브와 여러 영상 자료들을 뒤져가며 생존해 계신 많은 명창 분들의 소리를 찾아 들었고 감정과 공력이 좋은 딸아이의 특성을 잘 살려주실 명창 분을 찾아 서울에서 땅 끝 목포까지 유학을 온 것이다. 
문화재 할머니 명창 앞에서 도제식으로 배우는 판소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강한 압박을 견뎌야 하는 열 살 아이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라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도 조마조마하다. 이 모두가 행여 아빠의 욕심은 아니었는지, 목포까지 터전을 옮기는 일은 과연 잘 한 결정이었는지, 일을 위해 서울을 오가는 피로와 질문들이 누적되고 있을 때, 경험 삼아 나가본 전국 규모의 민요 대회에서 딸아이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운지 석 달 만에 큰 상을 받으며 맹모삼천지교의 이 선택에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천 개가 넘는 신안군의 아름다운 섬들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에서 사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1월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남도라 거리엔 야자수가 흔하고 8분 거리의 시장엔 맛 좋은 해산물들이 널려 있다. 특산품인 민어의 황홀한 맛과 압해도에 자라는 생무화과, 여수의 돌산갓으로 만든 김치, 짱뚱어탕, 구미를 당기는 여러 젓갈류들은 왜 목포가 ‘맛의 도시’인지 가르쳐 주었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맛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이사 온 지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직 긴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차로 1시간 이내의 섬들 곳곳엔 보라카이 부럽지 않은 멋진 해변들이 즐비해 있어, 8월 한 여름엔 아이와 즐겁게 수영을 즐겼다. 먹는 것, 보는 것도 좋지만 그 중의 으뜸은 듣는 것. 즉 남도에 아직 남아 있는 소리 문화이다. 광주, 전주, 목포, 해남, 고창, 남원, 진도, 보성 등 전라남북도 전체가 송만갑, 정응민, 김소희, 성우향, 조상현 등의 국창들이 나고 자란 소리의 고장이라 도시 곳곳에 다양한 판소리 대회들이 즐비해 있고 아이들은 판소리로 대통령상을 받은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학교 음악 시간에 국악을 배운다. 집을 찾아주신 공인중개사 분이 취미로 판소리를 배우고, 집 앞 김밥 집 아주머니 사촌이 서편제에 등장했던 아역 소리꾼인 곳. 목포는 또한 유서 깊은 소리의 도시였다.
  
딸아이가 소리 공부를 하니 아빠도 이것이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어 저절로 열심히 소리 공부를 하게 된다. 유튜브 자료들과 국문과 논문들을 찾아 읽으며 옛 전설들의 소리와 각 유파별 소리들의 차이를 익히고 판소리 사설과 역사를 공부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알려주고 들려준다. 19세기까지 경기, 충청, 경상도 등 전국에 번성했던 판소리가 현재 전라도 지역에만 그 명맥을 깊이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귀명창들 때문이었단다. 열성적으로 소리를 듣고 향유하는 이들과 소리꾼들을 지원했던 후견인들이 존재했던 남도 지역의 소리들은 번성했고 그렇지 못한 지역의 소리들은 사라져 버렸다. 노래자랑, 맛 자랑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곳, 아이의 밥값은 따로 받지 않는 식당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곳, 남도엔 그런 풍류와 낭만, 인정들이 살아있었다. 일을 위해 서울을 오가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차 안에서 김소희, 한애란, 박초월 등 전설들의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완창 한바탕씩을 듣는다. 소리를 들으며 운전을 하다가 자주 코끝이 시큰해지며 마흔 넘은 아저씨의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곤 한다. 

이 소리 맛을 누가 알까, 한국인 원형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 정서에 공감하며 울 수 있음을 감사하게 만드는, 10년 정도는 소리를 해야 흉내를 조금 낼 수 있는 이 곰삭은 노래의 진한 맛. 이제는 심심찮게 외국에 초청되어 공연들이 만들어지곤 하는, 당당한 세계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알려줄 수 있을까, 아직 단풍이 남아 있는 따뜻한 유달산 자락에 앉아 먼 바다를 내다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가을이다. 긴 남도 여행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학원 숲으로 둘러싸여 새침하고 소심한 서울 친구들 속에 지내던 딸아이는 순진하고 건강한 아이 같은 남도 아이들 속에서, 햇볕에 그을리고 땀 흘려 뛰어놀고 소리를 배우며, 아이답게 자라고 있다.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8>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