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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파리 상하이! 그 실속은 과연?

2018년 11월호(제10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1. 1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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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탐방]



 동양의 파리 상하이! 

그 실속은 과연?


 



 


 <푸동 구시가지>           <푸동 신시가지>



  중국 남방의 최대도시 상하이의 인민광장 지하철역 20번 출구를 빠져나오니 최대 번화가인 ‘난징루’가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NO.1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 북적거리는 4층짜리 애플 매장을 보고 있노라니 여기가 진짜 중국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복잡한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만나는 곳은 바로 세계의 건축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웅장한 유럽풍 건축물이 늘어서있는 ‘와이탄’입니다. 영국의 빅밴(Big Ben)을 모방하여, 한 때 빅칭(Big 淸)이라 불렸던 대형 시계가 옥탑에 설치된 상하이 세관 건물에서는 매 15분마다 종소리가 ‘데~엥 뎅~’웅장하게 울려 퍼집니다. 그 옆으로는 인상 깊은 르네상스식 유럽풍 건물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경쟁하듯‘황푸강’변 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이탄을 등지고 황푸강 건너편 동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더 화려한 네온사인의 고층건물들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집니다.‘푸둥’의 금융 무역 지구라 불리는 루지아쭈이에 있는, 알라딘 만화에 나올 듯 생긴 상하이의 랜드마크 ‘동방명주’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128층의 ‘상하이 타워’, 그리고 흔히 병따개 빌딩이라고 불리는 101층 ‘상하이 세계 금융센터’등 상하이의 초고층 빌딩의 야경을 보고 있노라니 과연 중국 사람들이 상하이를 자랑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보다 더 잘 산다고 말로만 듣던 중국의 해안가 도시의 하나인 상하이에 실제 와 보니 상하이의 발전 모습은 과연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이탄과 푸둥 금융 무역 지구를 보며 상하이가 어떤 발전 과정을 겪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분명 중국은 1950년대 후반~1970년대의 실패 역사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은 뒤 이렇게까지 발전하기 위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상하이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중국 경제 자체가 20세기 후반에 급속도로 발전하긴 했지만 상하이만 이렇게 특별하게 발전한데에는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무엇이 상하이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는 ‘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을 방문해보고 역사적으로도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상하이는 위대하다’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


 인민광장역 2번 출구에 자리 잡은 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에 딱 들어서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1층 입구에 와이탄과 푸둥 금융 무역지구의 대표적인 빌딩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금색 조형물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위대한 상하이를 보여줄게’하는 듯이 말입니다. 도시계획 전시관에는 상하이 도시건설의 시작을 약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간 당나라 시대‘상하이 화정연’부터 송나라시대 ‘상해진’, 원나라와 명나라시대 ‘상해현’, 그리고 청나라시대의 ‘상하이’를 그 줄기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1843년 상하이 문호개방시기부터 와이탄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상하이를 이루었다고 짧게만 소개하였습니다. 전시관의 대부분에서는 외백도교, 쉬자후이, 신천지, 예원, 석고문, 프랑스 조계지 등 상하이에 오면 꼭 가보아야 할 곳들을 쏙쏙 골라서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전시관 3층에 올라가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3층 전시관 전체에 상하이 시내를 1:500으로 축소한 초대형 모형(약 600m2면적)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닙니까? 모형 한가운데에는 상하이의 어머니 강으로 불리우는 황푸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좌우로 푸서지역과 푸동지역의 모든 도로와 건물뿐 아니라 상하이 전체를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서 상하이를 다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과연 중국의 모든 스케일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구나.’과거 기내스북에도 등재된 경력이 있다는 이 모형에 감탄하며, 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을 돌아보는 내내 상하이‘상하이는 위대하다’를 관람객들에게 주입시키려는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와이탄의 유럽식 건물들의 화려한 외형, 푸둥 금융 무역지구의 초고층 빌딩과 현란한 네온사인, 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에서 심리적으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전시물들 등 시각적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상하이의 내실도 과연 이렇게 감탄할 정도일까요? 첫날 난징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의 인포메이션 센터에 목적지인 ‘태평천국 기념관’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왼쪽으로 가면 지하철을 타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 봐라”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징의 지하철역은 모두 기계로 표를 사도록 자동화 되어 있어서, 막상 지하철역에 가니 기계 앞에서 표를 사려는 사람들만 바글바글하고 직원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간신히 말로만 듣던, 무서운 중국 공안 경찰을 찾아서(다행히 무섭지 않게 친절하게 알려주긴 했지만) 길을 물었습니다. 그 때의 그 공항 직원이 어찌나 무책임하던지요. 우리가 유럽이나 서양에서 느낄 수 있는 남을 향한 배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여행기간 내내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에 대한 기대는 접고 지내야만 했습니다. 겉모습은 웬만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크고 화려하게 꾸며놓았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절제와 배려, 신뢰, 관용, 사랑, 희생 등 우리 삶의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어야하는 자리에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만 신경 쓰는 심리적 허구심이나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였습니다. 



 상하이의 아이러니,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현재 상하이의 모습이 이러하다면 과거 상하이의 실제는 어떠했을까요?  

 숙소로 돌아온 후, 상하이의 근현대사를 찾아보니 그제서야 상하이의 숨겨진 아이러니한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는 아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 당시 100만 인구의 쑤저우(소주苏州)보다 훨씬 작은, 인구 10만의 수많은 어촌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난징조약(1842)에 의해 상하이가 개항장에 포함되면서 작은 시골 마을이 세계적인 경제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첫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영국에 의해 개항되고, 영국, 미국, 프랑스의 조계지로 지정된 이후, 상하이는 치외법권으로 중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식민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때 홍콩상하이은행과 유럽의 금융기관들이 들어서고, 전 세계 자본 투자가들이 모여들면서 국제 금융도시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20세기 초 중국이 정치적 혼란기를 겪는 동안 상하이는 중국 대륙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1930년대 뉴욕과 런던에 이어 ‘동양의 파리’로 불리며 세계 3대 금융도시로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중국을 대표하고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세계적인 도시 상하이가 중국 근대사의 굴욕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은 참 역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하이 도시계획 전시관에서는 중국은 이런 치욕적인 과거는 쏙 빼놓은 채 마치 상하이의 발전을 스스로 이룬 것처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이 자신들의 치부는 숨기고, 보이고 싶어 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난징 박물관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중국에 가기 전에 했던 사전 연구로 만주족 청나라의 팔기제도를 다룬 저는 ‘과연 만주족의 청나라 시대 전시가 어떻게 되어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난징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시간적으로 가장 근대의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도자기, 가구, 장신구 등의 유물이 과거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청나라 인물이나 역사에 대한 소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족이 세웠던 명나라는 주원장에 대한 전시가 있었지만 만주족이 통치했던 청나라는 사람과 역사를 쏙 빼놓은 채 소개하고 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바로 중국의 역사해석 태도와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 사회가 개방되고 다원화되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여전히 정치가 모든 사회와 역사해석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역사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새롭게 자의적으로 재해석되어지며, 그 역사는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우리가 잘 아는 동북공정도 바로 중국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인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진실이 아닌 최고지도자 몇 명의 의견과 해석이 진실로 둔갑해버리는 현실이 바로 중국의 실제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해석과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고 사는 중국 사회의 분위기와 그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나는 중국의 청년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투명한 거울에 비춰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로 중국이 더욱 힘을 키워 전 세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 때는 전 세계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1,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의 역사보다 더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 여행 중 상하이의 에어비앤비 숙소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중국의 현재적, 역사적 왜곡이 실제로 드러난 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숙소는 상하이의 도심 한가운데, 교통이 아주 편한 롱양루 역에 바로 붙어있었지만 천장이 높은 술집의 윗 공간에, 그것도 불법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은 커녕 불법이 드러날까 커텐 조차 열 수 없었던(커텐을 열면 창문을 통해 술집 내부가 바로 보임), 환기 자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는 술집 손님들의 소음으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저희는 그 어두침침한 숙소에서 머무는 것이 괴로워 최대한 숙소에서 일찍 나오고 밤늦게 들어가서 잠만 자는 식으로 상하이의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에어비앤비에 숙소 평가를 하려는데 상하이 주인이 별을 5개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게 아닙니까? 바로 그곳이 상하이였습니다. 주거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교통만 편한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 그러한 숙소도 별을 5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2,400만 명이 살고 있어 시가지 구역의 인구밀도가 중국 최악이며, 1인당 평균 거주 면적도 4,3㎡로 가장 열악하고 녹지면적도 가장 작은 상하이. 겉으로는 삐까번쩍하지만 그에 맞는 인구가 모여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삶의 질은 보장되어 있지 않아보였습니다. 중국에서도 가장 서구적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 중에 손에 꼽힐 것 같은 상하이의 문제가 이러하다면 중국의 다른 도시는 과연 어떠할까요?




㈜이지팜 연구원, 이송아
ssongah@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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