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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상 여성지휘자가 없었던 빈 소년합창단, 동양최초 여성 지휘자였던 김보미를 만나다!

예술/음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7. 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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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김미경이 만난사람]

 

500년 역사상 여성지휘자가 없었던 빈 소년합창단,
동양최초 여성 지휘자였던 김보미를 만나다!

 

 

  김보미 지휘자를 TV를 통해 보면서 또록또록 힘 있게 말하는 것이며, 전혀 꾸미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전해질 때, 그 에너지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저도 현장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죠. 영상 속의 재빠르게 씽씽 걷는 김보미 지휘자의 발걸음이 아른거릴 즈음, 예술의전당에서 ‘어린이 예술단’ 합창수업을 끝낸 김보미 지휘자는 제가 생각한 똑같은 모습으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역하고, 음대 들어가서 공부 한 후, 독일로 유학가셨는데 특별히 교회 음악을 하신 이유가 있나요? 
  세종대 호텔경영학과 1학년 1학기를 다니고 자퇴서를 냈어요. 너무나 도전해 보고 싶은 꿈이 생겼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음악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음악가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대학 때 음대 다니는 언니가 반주를 하는데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음악을 공부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 ‘공부를 한다면 어떤 경지까지 갈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나도 음대에 가면 너무 행복하겠다’는 생각에 부모님께 지원을 부탁드렸죠.

 

  1997년 [객석]이라는 잡지 뒷면에 음대 입시요강에 연세대에 교회음악과 합창지휘전공 입시요강을 우연히 보았는데, 제가 평소에 교회에서 했던 내용들이었어요. 청음과 노래하고 반주하고... ‘아! 이게 내가 할 거다’라고 결정했죠. 그렇게 해서 준비하여 1998년에 꿈에 그리던 연세대 음대에 들어갔어요. 졸업후 유학을 결정한 것은 2000년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바흐 페스티발에 참석해 라이프찌히의 음악 상황을 그대로 경험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단순한 축제를 떠나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즐기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또 미국과 달리 독일은 교회가 음악을 관장하기 때문에 교회음악을 독일에서 전공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한 것이고요. 6개월 동안 독일어에 집중해서 공부하고, 레겐스부르크학교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쓴 후 무작정 독일로 갔습니다.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하는 성격이라 떨어지면 거기서 또 시도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입학하기 위해 실기시험, 즉흥오르간연주, 합창지휘 등을 모두 독일어로 해야 하니 힘들었어요. 입학한 후에도 음향학, 오르간 구조학, 신학 등의 어려운 과목은 무조건 달달 외우며 따라가고자 부단히 노력해서 그런지 성적은 좋았죠.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일단 한국 사람도 별로 없었고, 공부와 연습밖에 할 게 없었기도 했고요.


- 빈 소년합창단에서 세계에서 모인 아이들을 가르칠 때 여러 가지 어려움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 ‘엉덩이를 살살 두드려가면서 한다’라고 했어요. 어떻게 하셨는지?
  합창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과 떨어진 상황에서 진짜 음악만 좋아하는 아이만 살아남는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처럼 동요 한 자락 부르거나 청음 테스트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소통능력까지도 보죠. 못 견디고 뛰쳐나가는 아이들도 있어요. 저는 아이들을 꼭 지휘자 선생이라기보다 음악을 먼저 한 선배라고 생각하며 이들을 이해하려 했어요. 빈 소년들이 초5학년~중2가 대상인데,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 천사들도 물론 잘못을 많이 합니다.^^ 전 아이들의 잘못보다 이왕이면 좋은 점, 잘하는 점을 말해 주려고 하죠. 그러면 아이들이 1시간 후에는 더 앞에 가 있는 것 같아요. 음악적인 것은 엄하게 컨트롤 했지만, 그 외의 것에는 관대하게 하면서 싫은 말을 좋게 해주는 능력도 생겼고, 무엇보다 무한한 인내심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했어요.


  아이들을 빈 소년합창단에 보내려면 부모가 어느 정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베네주엘라의 엘 시스테마 제도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아이들을 위해 노래로 1년에 꼭 3~4명 정도를 뽑는 제도를 빈 소년 합창단도 시도합니다. 이 제도를 통해 합창단에 들어온 아이 중에 아프리카계의 혼혈아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아빠를 모르고 자랐지요. 우리 반으로 배정된 이 아이는 엄마가 일하러 가면 TV만 보고 식습관도 좋지 않았지요. 또 아이들 사이에서 해서는 안 되는 험한 말도 많이 하는 아이였지만, 노래할 때 만큼은 정말 천사의 소리를 내는 거에요. 물론 기숙사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고 말썽도 많이 피워, 수시로 아이와 엄마를 동시에 만나며 상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쯤 지나자 이 아이는 점점 좋아졌고 연주에서 솔로까지 맡을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지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없다면 빈 소년 합창단의 지휘자를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론 엄마처럼 해야 하고, 때론 누나 같기도 해야 한다는 거지요. 빈 소년합창단은 4그룹으로 나뉘며 각 팀마다 1명의 상임지휘자가 있는데, 저 또한 4년 반 동안 하면서 아이들의 품성과 재능까지 모든 것을 관장했습니다. 성인이 되면 음악가가 되는 아이는 많지 않지만, 음악을 즐기고 듣고, 균형있게 평가할 수 있으며, 좋은 청중이 되고 음악 저변을 확대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지요.


- 동양인으로선 최초로 빈 소년합창단 지휘자가 되었는데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한마디로 말하기 정말 어렵네요... 풀타임의 첫 직업으로는 저에게 너무 과분한 자리였는데, 한마디로 저 자신이 인간, 음악가, 교육자로서 모두 업그레이드 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었죠. 하나를 넘으면 또 벽이 있고, 그것을 넘으면 더 큰 벽이 있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아! 이래서 500년 동안에 여자가 없었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저 자신을 보면서 사람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 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단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 것도 한 몫 해서, 이 직업에서 제가 세 가지로 업그레이드된 것이 중요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먼저 인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이 향상되었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의 산골짜기 동네 가서 20~30명 정도 놓고 연주회 할 때도 있고, 아랍 국왕과 일본 천황 앞에서,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1년 동안 무려 100회 연주회를 다닙니다. 또 음악적인 업그레이드는 빈 소년합창단지휘자는 지휘와 반주를 동시에 하고, 그 나라말로 콘서트를 이끌어가는 사회자의 능력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과 그 외 연관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관장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 어디를 가도, 몇 만 명 앞에 서 있어도 전혀 떨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적인 업그레이드는 매일 2시간 연습, 1시간 솔로 연습, 토요일 3시간 합창연습을 아이들과 하면서 제가 준비한 것을 이야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자기만의 음악적 해석이 나올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배양한 것이죠. 그것을 토대로 제 자신을 하루하루 빠짐없이 평가하며 수정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니 1~2년이 지나자 순발력있게 아이들의 심리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 현재 대학 교수로, 예술의전당 ‘어린이 예술단’ 총감독으로 있으면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칠텐데 빈에서 가르칠 때와 차이점은?
  외국 아이들은 좀 더 ‘말랑말랑’하다고 할까요, 당돌하다 해야 할까요? 선생님에게 틀리면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또 자기가 본대로 잘 표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은 경직되어있고 선생이 답을 주기를 원합니다. 9~10살 비엔나 친구들과는 질문을 계속하며 답을 같이 찾고 본질을 찾아가는데, 한국아이들은 ‘예’라고 답하고 그대로 받아 적습니다. 주체적 질문이 없는 거죠. 특히 지휘는 다양한 견해와 남과 다른 점 때문에 주목 받을 수 있는데 획일화 될까 걱정이 됩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먼저 이태리 볼로냐에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를 보고 엄청난 영감을 받은 저는 ‘나도 저런 지휘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총55분 연주되는 슈베르트의 미사곡 E flat 장조를 지휘했는데, 50분까지는 밋밋하다 싶도록 천천히 청중을 끌어들이더니 53분에 클라이막스에 도달해서 2분동안 전체를 마무리하는 모습은 대가의 명성 그대로였죠. 그리고 루체른에서 공연 때문에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두 번째 만났습니다. 공연을 위해 연습을 마치고 저는 평가받을 만반의 준비를 해서 메모할 것을 가지고 부랴부랴 들어갔고, 시간도 없어 딱 필요한 말만 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고, 이름이 무엇인지 물으며 너무 인간적으로 동양에서 온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이런저런 말을 하시고 마지막에 다 좋은데 한 가지만 고쳤으면 한다며 이야기하시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죠. 그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음악보다 사람이 먼저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다기보다 속상하게 여길 뻔한 일은 ‘내가 왜 처음부터 비엔나로 유학을 오지 않았나?’, ‘비엔나에서 유학했으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라고 잠시 생각한 겁니다. 비엔나가 음악적으로 활동하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렇지만 독일 대학에서 철저하게 외로운 가운데 기본실력을 탄탄하게 다지지 않았더라면 음악의 도시인 비엔나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오히려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의 제 자신과 싸우는 5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겁니다. 비엔나에서 ‘오르트너’선생님(일명 저에게는 귀인이시죠.^^ )을 만났고 이 분이 부지휘자로 있는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이분의 추천으로 빈 소년합창단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쭉 지켜 보셨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게 계획이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 기회는 제가 만들기도 하지만요’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유럽인들도 공부하지 않는 레겐스부르크 대학의 그레고리안 찬트로 박사 과정 중에 있는 김보미 교수는 현재의 교회음악도 음악성과 개인성을 위주로 한 것이어서 가사 자체가 주는 직접적인 감동과 사람을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약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특히 합창은 가사에서 출발해서 가사에서 영감과 힘을 얻는 것이니까 말이죠.

 

                      * 연세대학교 교회음악과 졸업
                      * 독일 레겐스 부륵 음악대학 교회음악 디플롬 취득
                      *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교회음악 최고과정 졸업
                      * 오스트리아 빈  Theater an der Wien 합창 감독 역임
                      * 빈 소년 합창단 상임지휘자 역임
                      * 현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회음악과 교수
                              한국 합창 지휘자 협회이사. 한국 교회음악 학회 부총무
                              예술의전당 <SAC THE LITTLE HARMONY> 총 음악감독 겸 합창지휘자
                              앙상블 <무지카 미아> 지휘자
                              새문안 교회 2부 <새로피 찬양대> 지휘자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1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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