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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작곡가 이흥렬 & 아들!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작곡가 이영조 (2)

예술/음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8. 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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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어가는 父子음악인의 삶의 이야기]

아버지!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작곡가 이흥렬

  아들!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작곡가 이영조 (2)

 

< 아버지!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작곡가 이흥렬 > 바로가기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아들, 작곡가 이영조(1943~현재)
  어렸을 때 집에서 LP판으로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한번은 형들이 굴렁쇠를 가지고 노는데 손등 다친다고 잘 안 끼워 주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버지 방에 작지만 굴렁쇠처럼 굴리고 놀 수 있는 LP판들이 무수히 많더라고요. 들고 나가 친구들을 모아서 언덕에서 LP판을 굴리며 놀았죠. 형, 누나들이 “아버지가 아시면 너 가만히 안두실거다”고 해서 ‘죽었구나~’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선 이상하게도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그 무언은 나중에 깨달은 어머니의 사랑과 또 다른, 남자의 용서와 부성의 사랑이었습니다.

 

음악 밖에 모른 음악가 가족의 다섯째
  우리 집은 자녀가 일곱인데 다섯 명이 음악을 했어요. 며느리 손자, 손주까지 하면 모두 14명이고 다 현역으로 뛰었었고, 현재도 활동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음악가족인 셈이죠. 이런 가족 분위기이다 보니 어릴 적부터 저는 당연히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야 ‘아, 음악을 하지 않아도 되는거였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동물을 좋아해 음악과 상관없는 이과반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좋아하던 라디오방송을 틀어 놓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니 도무지 공부가 안되더라고요. 지금처럼 FM 방송은 아니지만 기독교 방송국 그리고 VOUNC (Voice Of United Nation Corp) 라는 UN 방송국에서 음악을 자주 내 보내 줬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가서 “아무래도 음악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씨익 웃으셨죠. 피아노 위에 아버지의 가곡집이 있었는데 너무 멋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가곡은 못쓰고 동요를 몇 곡 만들어 봤어요. 아버지께서 보시고 “잘 썼는데, 동요가 너무 슬프다”하시면서 그 때부터 저에게 이론을 가르쳐주셨어요.

  대학을 가기위해 서울대에 응시했는데 떨어졌지 뭡니까? 아버지께 배우고 또 김동진 선생님께도 배웠는데 뭐가 부족해서 떨어졌는지 궁금했죠. 그런데 알아보니 ‘실격’이라는 겁니다. 시험 중에 피아노곡 시험이 있었는데, 24마디를 쓰는 것이었죠. 나름 곡을 멋지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22마디에서 끝나는 곡을 작곡했지요. 그래서 그냥 냈는데, 24마디를 다 채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격이 된 거예요. 나머지 두 마디에다 쉼표라도 넣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지금 시각으로 보면 경직된 제도이지요. 그래서 서라벌예대에 들어갔다가 다시 연세대학으로 갔죠.


  대학에서의 공부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어렵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누나들이 피아노를 치면서 four-hands 피아노를 많이 했지요. 두 명이서 같이 한 피아노를 치는 거죠. 손이 상대방 쪽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편곡을 해서 연주를 해야 했거든요. 그걸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서로 틀리면 지적해 주면서요. 막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는 콘서트홀에서 독주회하는 것보다 집에서 연습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했대요. (하하하) 집에서 자기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마당에서 형이 다른 일하다가 듣고 뭐라 하지, 또 누나가 듣고 뭐라 참견하지 해서 정말 괴로웠다는거죠. 온 집안에 음악의 귀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사실 감사한 일이죠. 연세대 다닐 때 선생님께서 과제로 곡을 선정해 미리 듣고 악보를 분석을 해오라고 하셨는데, 저는 누나랑 이미 수십 번 친 것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남보다 한 발 먼저 갈 수 있었지요.

 

< 작곡가 이영조 >

 

클래식의 본고장, 독일로 유학을 떠나다
  처음에 미국 클리블랜드로 유학을 준비했어요. 당시는 연주할 악보를 구하는 게 어려웠고 좋은 오케스트라의 곡도 듣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작곡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유학이 필수였죠.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무산되었어요. 그러다 ‘카를 오르프’(Carl Orff) 라는 독일 작곡가의 곡이 좋아서 독일로 제 작품을 보냈더니 오라고 하시더군요. 제 늦은 나이 34살에 독일의 뮌헨 국립음대에 유학을 가서 4년 반 동안 작곡을 배웠고, 오르프 선생님이 지병이 생기셔서 Wilhelm Killmayer 교수에게 배우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유학이 좌절 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나 나운영 선생님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셨잖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저에게 클래식 음악의 본 고장인 유럽, 즉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독일에는 학위라는 것이 없었어요. 제가 공부를 마쳤을 때는 작곡가 자격증을 주었어요. 그것이 박사 학위 이상이죠. 스승인 오르프 선생님이 졸업장을 준다고 해서 갔더니, 문방구에 가서 졸업장 양식을 사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돈으로 1200원 정도였죠. 거기다 선생님이 내용을 쓰시고 사인을 하면 졸업장이 되는 거예요. 운전면허증도 마찬가지예요. 감독관이 함께 차를 타고 시험을 보다 패스다 싶으면 준비한 면허증에 사인을 하면 합격하는 거죠. 한국에서는 서울 시장이 준다고 했더니 “시장이 시험을 보냐?”라고 묻더라고요. 하하하. 교육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등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웠습니다.

 

독일 문화의 높은 수준을 맛보다
  독일에는 한 주에 음악대학이(Musik Hochschule) 하나씩만 있어요. 음악전문가를 키우는 학교죠. 그런데 제가 공부 하던 뮌헨이 수도로 있는 바이에른 주에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공부 할 수 있는 음악학교(Musik Schule)가 120개 정도 있고, 여기에는 수녀들이나 간호사 또는 회사직원들이 다니는데 커리큘럼은 거의 우리 음악대학 수준이죠. 그만큼 음악적 수준이 높아요.
  제가 살던 아파트 관리인에게 더운물이 안 나와 수리를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내일 수리하면 안 되겠냐, 오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들으러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죠. 유럽인들은 이렇게 문화를 삶의 아주 가까이 두고 사는 거예요. 한편으론 우리나라도 빨리 이런 삶이 왔으면 합니다.

 

나만의 색깔이 담긴 음악을 찾아내다
  오르프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언어와 음악과의 결합이었어요. 이 분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말하는 것과 같아요. 뮌헨은 알프스 자락에 있는 도시로 우리로 말하면 강원도 산골 같은 동네에요. 전통보수 문화도시라는 자부심이 강하죠. 그 지역의 민속요소를 가지고 곡을 쓰시는 분이셨어요.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이 있다면 ‘색깔음악’이에요. 두 개 이상의 조성을 쌓아올려서 조성을 없애는 방식인데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거죠.
  제가 유학을 갈 때 직접 만든 22곡을 가지고 갔어요. 그랬더니 오르프 선생님이 “너는 그 먼 아시아에서 어떻게 이렇게 철저한 독일공부를 했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민속음악으로 된 합창곡을 하나 가지고 갔는데, 흥미 있다고 하시며 “이것이 너 같다”라고 하셨죠.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하시고 기회도 많이 주셨는데,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작곡의 영감을 많이 얻었어요. 저는 비행기 엔진소리를 좋아하는데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를 섞어서 곡을 만들기도 했죠.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다
  우리가 잘 아는 훌륭한 우리 가곡들은 대부분 이태리 스타일이지요. 저희 안사람이 성악을 해서 잘 아는 편입니다. 독일 가서 입학시험을 보는데 한국가곡 중에 어려운 곡을 몇 곡 했더니 “너희 나라 것을 해 봐라”고 했다고 해요. 왜냐면 그들이 듣기에는 전부 서양적이었던 거죠. 그래서 나운영 선생님의 ‘시23편’과 하대응 선생님의 ‘산’을 노래했더니 “그래! 이제야 너희 문화적 냄새가 난다”라고 했다더군요.
  제가 한국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 오페라 ‘처용’과 ‘황진이’입니다. 그 동안 작곡에 한국적인 것을 담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저는 그것을 시도한 거죠. 오페라는 무조건 사랑 얘기예요. 그 안에 사랑, 배반, 질투, 음모, 살인 등이 다 포함되어 있죠. 그런데 ‘황진이’는 ‘배신’과 ‘질투’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에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죠. 그래서 ‘희한한 오페라’라는 평을 많이 받았죠.
  특히 사랑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은 서양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그뿐 아니라,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무대와 조명까지도요.

 

 

아버지의 방식을 넘어선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이런 작곡을 하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의 곡을 들으면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그 무엇이 항상 있어요. 굉장히 쉬운데 들으면 들을수록 정겹고 마음에 와서 닿지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연세대학교에서 하는 음악 콩쿠르에 나갔어요. 그런데 1등이 없는 2등을 주더라고요. 나운영 선생님이 평을 하시는데 “음악이 아름답고 좋지만, 작곡가가 한국 사람인데 한국적이지 않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당시는 한국적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나운영 선생님에게 가서 ‘한국적 어법’을 배우라고 하시더라고요. 나 선생님께 음악을 배우고 나서, 저는 한국적인 것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국악원에 가서 피리까지 배웠죠. 그러고는 한번은 아버지께 “아버지 음악은 너무 한국적인 것이 없고 유연한데, 그러면서도 왜 저에게 한국적인 것을 배우라고 하셨어요?”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씨익 웃으시더니 ‘섬집아기’를 불러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엄마가 섬 그늘에~.”
  “아니, 계명으로 해봐”
  “솔도레 미레도레~.”
  “그럼 이번에는 아리랑을 해봐.”
  “솔라솔라 도레도레~”

  어? ‘섬집아기’에 아리랑 음계가 들어있는 거예요. ‘섬집아기’뿐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 ‘진짜 사나이’까지도 그런 거예요. 깜짝 놀랐죠.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서양의 화성을 이용해 한국적인 것을 표현했지만, 너는 한국적인 다른 화성으로 곡을 만들어 보라”고요. 그 다음부터 제 음악의 방향이 바뀌었어요. 산조, 굿거리, 살풀이 같은 민속음악의 성격이 짙은 것들을 배우고 그것들로 곡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음악은 근본적으로 ‘자아의 발로’입니다. 서양음악은 국제화된 고도의 예술음악이며, 각 나라와 민족은 거기서 자아를 빛낼 뿐 아니라 서로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서양음악을 들여오면서 기법과 함께 그들의 영혼까지 우리 것을 삼으려는 하는 우를 범했지요. 우리 것이 없이 그들에게 종속화 되지도 했지요. 한국적 음악이라는 것은 좁은 민족주의, 배타적 지역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등하게 예술을 공유하는 것으로 필수적 과정입니다. 우리보다 오히려 그들이 더 한국적인 것에 대해 호기심과 문화적 가치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다운 우리 것을 정립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있게 즐기고 누리는 예술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영조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국 음악계에 남긴 깊은 역사의 발자취에 놀랐고, 음악가족으로서 전통과 뿌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더 나아가 서양문화 본래의 저력을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전통을 이어가며 어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낼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고요.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4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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