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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훌쩍 넘어 혼자 떠난 나의 첫 유럽 여행 1

2019년 8월호(11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0. 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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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기]

서른이 훌쩍 넘어 혼자 떠난

나의 첫 유럽 여행 1 

 

봄에서 여름 사이, 회사에서 한 달 여 간의 재충전을 위한 휴가를 받았습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해 3개 나라, 15개 도시를 걸었습니다. 수년간 쉼 없이 반복되던 출퇴근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32일간 낯선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걷고 또 걸으며 만났던 순간들을 적어봅니다. 

 

한 달 여행의 로망, 그리고 현실  
보통 사회생활을 5년 이상 한 직장인들에게 한 달 여행은 퇴사를 하고서야 겨우 떠날 수 있는 ‘로망’같은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저 또한 그랬어요.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한 달이라니, 얼마나 꿈꾸던 일이에요. 여행지를 유럽으로 정하고 나서, 여행 책자를 비롯해 관련 지역 및 역사에 대한 책을 열권도 넘게 샀던 것 같아요. 이렇게 기대감이 가득했지만, 정작 사 놓은 책의 반도 보지 못한 채 벌써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이미 두어 달 전에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도시를 정하고, 숙소 예약까지 끝냈지만, 여행 준비는 딱 거기까지. 그 이후에는 계획을 세울 틈도 없이 업무가 몰려들어왔죠. 매일 자정이 되는 시간에 귀가할 만큼 바쁜 날들이 한 달이 넘게 이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행이 일주일 남아 있었어요. 그때야 한 달간의 짐을 싸기 위해 캐리어를 샀고, 급히 여행 물품을 주문해 집에는 매일 택배 박스가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결국 출발 직전까지 업무를 인수인계하느라 주말 출근을 했고, 체력도 멘탈도 바닥인 채로 다음 날 시작할 여행의 짐을 챙기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웠답니다. 그때 몰려드는 후회란. ‘왜 한 달의 휴가를 꼭 여행으로 다 채우려고 했을까, 조금 쉰 뒤에 여행을 떠날 걸’하며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집을 나섰어요. 
문득 여행이란 본디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을 던져 놓는 것이지,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내 한 몸 이끄는 것도 버거운 상태에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여행의 속성을 되새기게 되었죠. 주변에서 그토록 부러워했던 직장인의 한 달 여행은 사실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조그마한 동양인 여자라는 낯선 상황 
비행기 안에서 쏟아지는 잠을 자다 일어나 밥을 먹고, 이렇게 두 번 즈음 반복한 후 도착한 첫 여행지는 로마.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어둠이 깔리지는 않았지만, 비가 올 듯 말 듯 흐린 날씨와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동양인보다 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려니 괜히 마음이 쪼그라 들었어요. 가까운 일본과 같은 동양 국가를 여행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설고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키가 꽤 큰 편이고 덩치도 있어서 한 번도 스스로를 조그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유럽 한복판에서 ‘동양인 여자’라는 존재는 얼마나 물리적으로 자그마해 보이던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쪼그만 동양인 여자 한 명이 한 달 치 짐이 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언덕길을 끙끙거리며 올랐어요. 

나의 여행이 시작된 한 장면 
지친 상태에서 도착한 로마의 숙소는 바람이 부는 한적한 -당시에는 날씨와 기분 덕에 스산해 보이는- 주택가 사이에 있었어요. 이곳이 맞나 두리번거리며 한껏 위축된 상태로 벨을 누르고 몇 분을 기다렸는데 잠시 뒤 3층 창문에서 호스트가 손을 흔들며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치 저를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반가움을 가득 담아서 말이죠. 아~ 그 순간 저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예감했어요. 여행지에서 기대하지 못한 순간 만난 현지인의 호의는 한국에서 가져온 피로와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인 스산한 마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온기를 더해 줬습니다. 더 이상 그곳은 위험한 곳이 아니라 궁금하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되었죠. 여행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저에게 어떤 에너지가 시작된 장면이었어요.

대체 불가한 브랜드, 로마라는 도시 
여행의 첫 번째 도시로 로마를 선택하게 된 것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끌림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단 한 번도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던 ‘로마’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그 끌림은 무척 또렷해서 망설임의 여지가 없었지요. 그리고 로마에서 일주일 가까이 머물면서 그 끌림의 이유는 명확해졌습니다.
첫째 날 저녁 로마에 도착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았고, 그 다음날 새벽부터 근교 여행을 다녀와 아직 로마라는 도시를 만나지 못했던 날. 테르미니 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4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서울에서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걷기에 대한 갈증이 컸던 터라 길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역에서 사람이 없는 큰 공원을 지나 한참 걷고 있는데, 공원의 끝 큰 나무가 시야를 다 가리는 언덕을 내려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콜로세움이 바로 제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아! 그때의 놀라움이라니. 와~ 하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어요. 로마의 상징인 거대한 콜로세움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것, 그게 로마와 저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 걸음을 옮기니 티투스 개선문이 보였고, 조금 더 걸어가니《로마인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했던 로마시대 황제의 궁전과 귀족의 거주지가 있던 팔라티노 언덕도 나왔어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음날 숙소 근처에서 아침 조깅을 하며 옛 로마시대의 사람들이 목욕을 하던 거대한 목욕 터를 만날 수 있었고, 마을 사이사이에는 성곽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라는 도시는 ‘걷다 보면’자연스럽게 오래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고, 아주 오래된 고대의 유적과 현대의 사람들이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로마라는 브랜드는 단지 이런 유적의 풍경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자긍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도시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일 중 하나는 바로 로마에서 기차를 탔을 때 노신사 한 분을 만난 것이었어요. 소매치기로 유명한 도시에서 처음으로 하는 기차 이동이라 저는 잔뜩 긴장해 있었죠. 큼지막한 캐리어를 이끌고 기차에 들어섰는데, 4명씩 마주 보며 앉는 곳에 노신사 한 분이 앉아 있는 자리만 남아 있었어요. (유럽의 기차는 대부분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아 빈자리에 가서 앉아야 해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묻고, 캐리어를 옆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그분은 ‘신사’라는 말이 어울리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한 옷차림에 맑고 또렷한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주저 없이 제 캐리어를 들어 (그 무거운걸!) 좌석 위의 짐칸에 실어주려 했고, 점심때가 되자 자신이 챙겨온 도시락을 나눠주기까지 했어요.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로마는 어땠는지, 다음 여행지는 어디인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말했어요.
“로마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야기와 역사가 이 도시를 이루고 있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눈은 자긍심과 품격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말투에는 로마에 대한 애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읽은《유럽도시기행》에서 책의 저자는 로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 제가 노신사에게서 느꼈던 느낌과 꼭 같았어요.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오래된 것과 현대의 것이 공존하는 도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자긍심이 있지만 오만하지 않고 사람이 매력적인 도시. 제가 만난 로마는 그랬어요. 이후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를 들렀고, 도시마다 제각기 멋진 매력을 지니고 있어 어느 곳 하나 아쉬움이 없었지만 이탈리아에서 단 하나의 도시를 꼽으라면 이런 이유로 로마를 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 여행은 이탈리아를 지나 스위스와 스페인까지 계속되었습니다. 9월호에서는 이탈리아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저를 사로잡았던 스위스와 스페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서울시 노원구 이한나
 brightlife.lee@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8>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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