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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화(명) 비판 : 철학, 과학, 기술이 종교(의 지위)를 탐하다

2019년 9월호(11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0. 1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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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의 황혼에서 새 문화의 여명으로 26]

  서구문화(명) 비판 : 
철학, 과학, 기술이 

종교(의 지위)를 탐하다 

 

현재 한국의 미디어들의 제작 기준은 중학교 졸업생이지만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는 조금 높여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기준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 문화의 황혼에서과 새 문화의 여명으로]는 더 높여 한국에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졸업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분들이 조금만 끈질기고 사려깊게 읽어주시고, 또 만나는 분들과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사회에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는 주역이 되시기를 바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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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종교문화(명) 체계인 세계 3대 절대종교문화(명)
‘핍박’보다 ‘유혹’이 더 어렵다
이 시리즈의 궁극적 목적은 서구문화(명)를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별도로 독자적으로 평가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금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화(명),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려 효용성이 없다고 판정되어버린 동양문화(명) 대신에, 제3의 문화(명)체계를 자연스럽게 새롭게 수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배꼽에서 동쪽과 정반대로 서쪽으로 나간 것이 아닌, 그 중심의 정체성을 여전히 가진 세계 3대 절대종교와 그 문화(명)체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 3대종교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 세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 대한 피상적 관찰이나 일시적 이해를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서구문화(명)를 그리스(정신)문화와 로마(물질)문명과 유대교/기독교(종교)로 이루어졌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왜곡된 등식은 철저히 다시 교정해야 할 것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150-225)의 말과 같이 그리스, 로마문화(명)는 유대교, 기독교와는 물과 기름과 같이 절대 섞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구역사에서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를 부정적으로 판단해 곧바로 기독교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사실 중세기 유럽을 천년동안 지배했던 로마교는 구악성경과 신약성경이 말하는 종교나 문화(명)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물과 같이 변형된 체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왜곡된 역사로 세상의 배꼽의 본래 종교와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과녁을 놓친 헛된 사격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배꼽의 종교가 허용하는 자비를 악하게 이용한 악과 어두움의 세력이 그 핵심에 침투해 들어가 알을 낳고 세력을 장악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는 것은 그 종교의 자유와 진리를 나타내는 하나의 역설적 징표입니다. 즉 기독교가 시작되자마자 겪은 3백 여 년 동안의 로마의 핍박은 매우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그 이후에 오래 지속되면서 진리를 드러내야 하는 유혹보다는 쉬웠습니다. ‘핍박’은 죽음의 순간만 견디면 되는 단순한 것이지만, ‘유혹’은 총체적 삶과 문화 속에서, 진리를 욕망을 거스리고 역사 전체에서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10년도 채 안 되는 일제 신사참배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한국교회는,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65년의 전쟁 없고 물질적 편안함과 명예심의 ‘유혹’이라는 도전에 철저히 무너진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기초 자체가 아예 없으며 악한 체제를 가진 한국교회가, 장구한 세상의 배꼽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할 리가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핍박당하던 기독교가 공인되며(313) 로마의 국교(325)까지 되는 천지가 개벽할 변화 이후에, 온갖 명예와 물질적 부가 주어지는 유혹적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도전을 극복하지 못한 기독교는 조직화된 메마른 로마교회화Romanized Church되어 갔으며, 가장 자생적이고 실천적인 파트릭Patrick과 콜룸바Columba의 훌륭한 전통을 간직한 아일랜드 교회마저 로마교의 조직화에 흡수되어 갔을 뿐입니다. 동쪽에서 일어난 새로운 절대종교인 이슬람의 서진을 진정한 종교적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유일하게 네 번이나 겨나면서도 결국 이슬람 칼리프에게 순교 당했던 13세기의 레이몬드 룰Raymond Lull의 사례 밖에 없었습니다.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하며, 예루살렘은 더 이상 지리적 종교적 중심지가 아니므로 거기서 아예 예배드리지 말라 했던 예수의 명령 자체를 잊어버리고, 칼로서 성지를 탈환하자는 사탄적 이데올로기로 어리석고 악한 십자군운동을 일으켜 지금까지도 이슬람과 관계와 대화 자체가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의 ‘후퇴’와 유대교의 본질에서 ‘유아시절에 고착화됨’
이렇게 서구문화(명)와 유대교, 기독교를 분리시켜 보아야 서구문화(명)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세상의 배꼽에서 나온 3대 절대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그 본질에서 후퇴했는지를, 또 유대교가 얼마나 본질에서 유아시절 고착화에 머물렀는가를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지금까지 로마교나 개신교나 동방교(러시아, 그리스정교)를 막론하고 유지되어온,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우주만물을 황태자로서 다스리라는 명령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정신, 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세상에서 물질적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이방 땅에 선교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도 허용하는 이원론적 위선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선교사를 파송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파송하기 전에 자기 나라의 정치에서 우선, 군사적 힘으로 남의 나라를 착취하는 제국주의를 시행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체제부터 만들었어야 하는 겁니다.
또 유대교는 세상의 배꼽에서 진행된 장구한 종교, 문화를 거부하고, ‘길 건널 때 차 조심하라’는 유치원 시절의 엄마의 말씀만 신주단지처럼 절대적 종교(문화)체제로 삼은 꼴이 되고만 겁니다. 지금은 완전히 해체되어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이스라엘 12지파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원하던 아브라함의 순수한 후손으로 이루어진 선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예언자인 예레미야조차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장 중요한 성물인 ‘언약궤’자체를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을 암시함으로서, 공간적 성전 자체가 소멸될 것을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서 3장 16절). 중세 로마교가 성지탈환이라는 아주 어리석고 악한 이데올로기를 가졌듯이, 유대교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2천년동안이나 버리고 살았던 팔레스타인 땅을 날강도처럼 되찾겠다고 작정한 시오니즘으로 무장해서 강탈하여 만든 나라가 현대국가 이스라엘입니다. 철저하고 지독한 정통유대교인들Haredim이라면, 자신들을 그렇게 적대적이 되도록 만든 이슬람 인구 14억 전체를 다 죽여서라도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어리석음을 아마 마음에 품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지구상의 다른 지역과 민족과 이데올로기상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중동의 화약고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가장 풀기 어렵고 힘든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계사와 문화(명)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맏형과 같았던 유대교의 유아시절 고착화로는 도리어 더 크게 만들 뿐인 것이 자명합니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세상의 배꼽의 종교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기루를 믿고 따라갔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매우 현실적인 곳이 사막입니다. 이런 곳에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절대종교 이슬람교는 사막종교의 단순성, 일원성을 모든 면에서 가집니다. 마호메트는 유대교도 알았고 시리아교회를 통해서 기독교도 알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고 철저히 왜곡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신은 하나다’라는 유대교의 해석을 우선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교가 일신론을 주장할 때에 근거로 내세웠던 신명기 6장 4절은 사실상 ‘이스라엘과 유일하게 언약 맺은 하나님’을 말하고, 단일한(숫자 하나인)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막 적 단순성의 관점에서는 유대교의 이런 해석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기독교는 인간끼리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에서 명확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공동체를 주장하면서도 그 공동체성의 근거를 그들이 해석하는 ‘단수적 하나님’에게는 찾을 수 없으니, 이론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부모가 실제적 삶으로 그런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편부모에서는 이것을 교훈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같은 출발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차별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대교인은 이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이츠하크(이삭)-야곱의 계열로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하메트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은 이츠하크가 아닌, 종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해 그 때까지 전수된 성경 자체가 왜곡되었다고 왜곡하고 만 겁니다. 모하메트가 구술한 코란만이 진짜 경전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막종교가 이론적으로는 엉성하지만 단순하다는 교리적 장점은 실천적 삶에서 단순함, 선명함이라는 장점으로 드러났습니다. 마음에 호소하여 전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칼에 의한 정복에 호소하였기 때문에, 초기부터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를 바람같이 서진하여 유럽까지 정복전을 벌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기독교의 서진이 영적 성격을 가진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지요.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는 21세기에서의 IS에 이르기까지 그 군사적, 물질적 지배력을 추구하는 종교형태가 되고 만 겁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뒤에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오늘 뿐이라는 유대교와는 정반대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면은 기독교를 차용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천국에서도 우스꽝스러운 물질성과 남성 위주성을 볼 수 있는데, 신을 위하여 희생하면 천국에서 아름다운 아내5명을 둘 수 있다는 주장 등에서 말입니다. 이런 점들이 이슬람교가 세상의 배꼽의 문화(명)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전수된 세상의 배꼽의 종교, 문화(명)가 꽃피려면!  
우리는 문화(명) 단위를 세 가지로 보려는 관점을 가집니다: 1) 동쪽으로 파생해 나간 동양문화(명), 2) 서쪽으로 파생해 나간 서양문화(명), 3) 세상의 배꼽에서의 문화(명). 
그런데 ‘세상에 배꼽에서의 문화(명)’를 앞에서 간략하게 평가했듯이, 세계의 3대 절대종교가 그 본질적 능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면이 너무 아쉽습니다. 먼저 기독교가 제정신 차리고 그 퇴보와 후퇴에서 벗어난다면, 또 유대교가 그 유치한 단계에서 벗어난다면, 그리고 이슬람이 그 심각한 왜곡에서 벗어난다면 동양과 서양으로 흩어져 나간 모든 상대종교들과 그 파생된 문화(명)들에서 볼 수 있는 허무함, 어리석음, 위선, 이원론 등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조건 하나만 먼저 말한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자체에서 전수된 종교와 문화(명)의 본질에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배꼽의 세 종교의 공통특징은 ‘절대경전의 종교’라는 겁니다. 불교경전에 비해서 매우 단순한 이 공통경전인 구약성경이, 사실상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성경 사이의 상관관계가 선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중의 하나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없으면 신약성경은 출발할 수도 없었으며, 신약성경이 없으면 구약성경은 절대종교의 완전한 계시형식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기독교의 매우 특이한 약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약성경은 거의 천년동안 엄청나게 많은 사람과 수많은 역사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인 반면에, 신약성경은 거기에 비하면 매우 짧은 30여 년 동안 10명도 채 안 되는 사람의 손에 의해 기술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다루는 내용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아주 초기단계의 모습만을 서술하고 있다는 ‘약점’처럼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즉 신약성경은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매우 짧은 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로마의 강압적 통치 속에서 인내하며 견디는 것이 핵심이었지, 장차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는 상황은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황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통치해야 할지를 신약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성경의 시절의 현자왕인 다윗왕처럼 행하려면 어떻게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온 세상과 우주를 어떻게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려야 할지를 먼저 배우고 깨달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고 온 세상에 전쟁이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 자체가 이 방식을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히 착하게 살면 된다는 정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온 세상, 역사, 문화, 우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인가를, 다양성, 총체성을 가지지만, 차원이 낮은 구약성경을, 제한된 관점이지만, 깊은 차원을 말하는 신약성경의 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서 찾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성경은 열린 책들인 것입니다. 즉 구약성경은 새 시대에 새롭게 적용될 수 있는 열린 책이라면, 신약성경은 총체적 관점으로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열린 책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으로 기록된 계시가 마무리된 것에만 만족하지, 우주로 나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유대교가 그 경전 중에서도 최초의 다섯 권의 책을 토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보호하려고 주위로 울타리를 쳐서 만든 것이 탈무드입니다. 이제는 이 수많은 충돌되는 전승들을 모은 방대한 책들인 탈무드를 초등학교의 교과서를 상세히 설명한 참고서 정도로 상대화시키는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오히려 후대에 오랜 시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인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가 매우 풍성할 뿐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며 깊어져간 하나님의 계시를 중학교, 고등학교의 책으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시간과 공간, 혈통과 영토, 물질적 욕망을 초월한 종교가 된 것이라는 계시가 이미 주어졌으며 그 시기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 대학 교과서와 같이 최고의 책으로 준 신약성경이, 사실상 구약성경을 새롭게 완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드디어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의 전 과정에 주어진 계시를 가지고서 역사와 우주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할 시간이 온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교에 속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배꼽의 문화(명)를 만드는데 동참하려면, 가장 먼저 왜곡된 계시로 제시된 코란을 7세기 당대의 사막종교의 전승으로만 해석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기록된 구약성경이 잘못된 책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그것을 나중에 모하메트가 받아 적은 코란과의 비교를 통해서, 코란이 상대적 가치만을 가짐을 선명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 영에 대한 관심이 근본적으로 없으며 물질주의적 이슬람교 내에서도 발현된 ‘수피즘’sufism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 운동입니다. 구약성경 속에서도 회복할 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더 자세하고 세부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영적 차원을 인정한다면, 중동과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필리핀)에까지 퍼진 수피즘이 극단적인 무장 세력으로 발전되는 IS의 온상이 되지 않고 정상적 발전으로 선회할 수 있을 겁니다.     

서양문화(명)의 특성 : 종교(의 지위)를 탐하는 철학, 과학, 기술
이 ‘옛 문화의 황혼과 새 문화의 여명’시리즈의 현재의 목표는 동양문화(명)와 서양문화(명)에 대한 새롭고 정당한 평가인데, 현재 우리는 후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배꼽을 중심으로 파생해나간 인간이 만든 문화(명)가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동양문화(명)는 철저히 종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근본종교에서 서서히 떠나간 모습을 보였습니다. : 다신교(메소포타미아) -> 만신교/범신론/힌두교(인도서부) -> 신이 된 인간(불교 인도동부) -> 신 없는 인간만의 사회(중국의 유교, 도교). 반면에 서양문화(명)는 처음부터 종교를 떠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서양에 정착하는 과정이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서양문화(명)의 연속성이 없거나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325)부터 중세기(15세기)까지를 제외하면 사실상 그리스로마문화(명)의 연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연속성의 특성은 바로 처음부터 일관되게 ‘종교(의 지위)를 탐하는 철학, 과학, 기술’이었다는 것이며, 우리가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세부적으로 집중해서 다룰 내용입니다. 
첫째,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철학은 철저히 종교의 지위를 탐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 지금 터어키 서해안의 이오니아와 그리스 동쪽의 철학자들(헤라클레이토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과 같이 후대의 과학지상주의 혹은 종교화된 과학을 주장하는 합리주의의 선구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들이라도 기본적으로 신적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그 필요성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서쪽에 놓인 이태리에 개척한 그리스 식민지에서는 정반대로 신비적, 종교적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합리적 논증을 해나가는 철학전통(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을 만들어갔습니다. 아테네가 마라톤전투(490)와 살라미스전투(480)로 페르시아를 물리친 이후, 소피스트들은 현란한 수사학 훈련으로 세계적 도시인 아테네라는 인간사회 속에서의 승리만을 추구하는 상대적인 윤리관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절대적 윤리가치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인 플라톤과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국가인 폴리스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단합을 위한 필요로서 종교를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철학화 된 종교였을 뿐입니다. 이미 철학은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는 대신, 철학 자체가 종교의 지위에 올라선 겁니다.
둘째, 잘못된 기독교인 로마교의 영향이 강했던 중세기가 지난 이후, 르네상스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는 서구문화(명)에서 철학은 사실상 그 최고의 지위에서 후퇴하였으며 대신에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중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경험적, 실험적 요소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가졌던 연역법적 전제인 목적론적(정치적, 종교적)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과학의 시대에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 바로 베이컨 이후부터였으며, 이 때 핵심 방법론으로 떠오른 것이 과학시대의 총아가 된 귀납법입니다. 모든 것을 실험으로, 귀납법적으로 증명하면 된다는, 거의 종교화된 과학사상이 서양문화(명)를 지배한 겁니다. ‘백로는 하얗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백로와 똑같이 생겼지만 검은 색을 가진 새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귀납법적 과학적 가치관이 종교나 우상처럼 서양인들의 마음에 또아리를 튼 겁니다. 이런 가운데 각종 과학주의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현상이 심지어 19세기까지 진행되었는데, 그 때에 나타난 ‘공산주의’도 그 ‘과학성’을 자랑하는 종교였지요. 또 다른 사례는 사회학의 시조인 ‘꽁뜨’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과학적 사회학을 창설하면서 그것을 종교로 간주했으며 실제로는 이 종교의 교주였습니다. 
셋째, 18세기 이후 우주로 나가는 21세기의 지금까지 서양인들은 과학이 가졌던 종교적 지위를 이제는 기술이 이어받아서, 기술지상주의적 종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이와 같은 기초과학의 선구자들이 존경받는 시대는 뒤로 물러나고,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놀라운 기술로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혹은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스티브 잡스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시대가 된 겁니다. 종교를 뒷방할아버지로 내팽개쳤던 최초의 반역자인 철학은 이제 스스로가 뒷방할아버지 신세가 되었고,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극소수인 찬밥신세가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철학을 과학이 깨트리더니, 이제는 기술이 그 과학의 종교적 지위를 폐하는, 기술이 종교의 지위를 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뜻한 인간성, 참된 가치관, 영속성과 영원성을 추구하는 자세는 이미 서양인들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버린, 외골수 문화(명)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동양에 사는 노란 육신의 껍질을 가진 우리가 마음까지 서양화가 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우주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는 서양인을 지나치게 믿고 그 전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요?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9>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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