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좌충우돌 미국 정착기 (1)

2019년 10월호(12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2. 14. 17:08

본문

[세계속의 한국인]

좌충우돌 미국 정착기 (1)

 

2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이야기를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 사는 ‘캐빈 리’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에 보내왔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여러 개인적 상황 속에서 이민행을 결정했을 텐데, ‘캐빈 리’의 삶을 통해 실제 이민자의 삶이 어떠한지, 어떻게 난관들을 극복해갔는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이 글은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희망이 보이다
1986년, 한국에서 사업한답시고 수출 오퍼상으로 시작해 레프트, 라이트 훅에 어퍼컷까지 맞으며 버텨봤습니다. 그러다 IMF 이후 조그만 철제 옷걸이 제조업을 마지막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6개월 관광비자로 입국했는데, 관광비자로 일을 찾아 취직한다는 것은 옷 가게에 가서 식사를 주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겨우 잡일을 얻어 일당을 받는 것이 전부였죠. 기회만 주어지면 성심성의껏 열심히 일할 텐데, 타국 땅에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백방으로 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고, 남은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사는 사촌 누님이 생각났습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인사나 드리려 차를 빌려 산호세로 향했습니다. 옆에 앉은 아내 때문에 내색은 못했지만, 캘리포니아 101 highway의 경치는 정말 끝내줬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만큼이나마, 차 안의 분위기는 묵직하고 조용할 따름이었죠. 10시간을 걸려 도착한 그곳에서 “여기 머물면서 함께 길을 찾아보자”는 반가운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넓지 않은 누님 집에 눌러앉았습니다. 그냥 있기 미안해 저는 loan officer(대출 담당 직원)로 일하는 누님을 돕고, 아내는 햄버거 집 주방 보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출근했던 아내가 엉엉 울면서 돌아오지 뭡니까? 하루 종일 상추만 씻었는데 손이 시려서 죽어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누님이 “어려워도 어떡하니?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지. 이를 악물고 해봐라. 내일 주인한테 전화해서 다른 일을 부탁해 볼게.”라며 아내를 달랬습니다. 정말 난감했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었고요. 그 후 근처 살리나스의 필리핀인이 운영하는 모텔에 간신히 일을 얻어 일하던 차에 누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산호세의 한국 신문사에서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잘하면 영주권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요. ‘얼마나 찾아 헤맸던 기회인가!’ 산호세로 돌아가는 저희의 가슴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듀플렉스’를 얻다
막무가내로 미국에 온 지도 벌써 6개월이 흘렀습니다. 살 집도 구해 이사도 했습니다. 이사라고 해야 간단한 옷 가방 두 개가 전부였지만요. 집은 ‘듀플렉스’로 방 2개, 화장실 2개, 부엌과 거실, 차고가 딸렸는데, 임대료가 한 달에 1800불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세 개념이 없고 전부 사글세로 엄청 비쌉니다. ‘듀플렉스’란 방이 5개 정도 되는 큰 집을 2개로 나눈 집입니다. 한쪽은 방3개로 만들고 다른 한쪽은 방2개로 만들어서 별도의 2채 집을 만든 것이죠. 물론 주소도 2개로 별도입니다. 어떤 집은 2층으로 올려 집을 4칸으로 구분해 각각 세를 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포플렉스(four plex)’라고 합니다. ‘듀플렉스’를 얻는데도 소셜번호와 신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월세로 1년 이상 살다가, 집세를 못내도 집 주인은 무작정 세입자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세입자가 살 집을 구할 때까지 집 주인은 기다려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호사를 고용해 재판을 해야 하니, 세입자를 잘못 받으면 집 주인은 엄청 손해입니다. 그래서 처음 집을 세놓을 때 주인은 여러 가지 상황을 꼼꼼히 따집니다. 저는 소셜번호도 없고 신용도 전무하니 결국 누님이 보증을 서서 집을 겨우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집세 때문에 걱정은 되었지만 떠돌이 생활을 끝냈다는 생각에 마음은 뿌듯했습니다.

H1 비자를 구하다
한글 주간 신문사에 들어간 지 3개월 남짓 되어 신분도 H1 비자로 바꿨습니다.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주로 많이 받는 영주권 비자는 H3입니다. 이 비자는 미국에서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직종에 많이 적용되는 비자로 특별한 학력 제한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닭 가공공장에서 닭털을 뽑아야 하는데 기계로는 한계가 있으니 사람을 고용해야 하지만, 힘들고 고된 일이라 주로 외국에서 사람을 구해 H3 비자를 줘서 일하게 하고, 1년 이상 근무하면 영주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자는 비교적 얻기 쉽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 대기시간이 엄청 길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H1 비자는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합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해당 분야에 4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고, 미국 사람으로 대체하는 데 한계가 있는 직업에 한해 발행해 줍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어로 발행하는 신문인 경우 기사를 한국말로 써야 하니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죠. 단 이 H1 비자는 발급받을 시 명시된 일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종 회사에서 3년 이상을 근무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영주권을 받고 나서는 직업의 제한이 없어집니다. H1 비자는 매년 일정 수량이 정해져 있죠. 저는 운이 좋아서 비교적 쉽게 이 비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뭉치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아이들 둘이 도착했습니다. 저희 내외가 갑자기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6개월간 할머니 집에서 얹혀 지내던 아이들이 도착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손에는 냄비, 솥, 밥그릇 등 다양한 생필품이 들어있는 이민 보따리가 각각 하나씩 들려 있었습니다. 그동안 애들이 보고 싶어 아내는 거의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당장 생활은 어렵지만 집도 마련되었고, 이제는 뭉쳤으니 살길을 찾아서 열심히 노력하는 길만 남았습니다.
저는 신문사에서 한인사회(예를 들어 한인회, 한인 상공회의소와 같은 각종 한인들을 위한 봉사단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취재하여 간단한 기사를 작성하고, 일주일에 한번 발행되는 신문을 배달하고 남는 시간에는 업체에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수주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한 달에 1000불 받습니다. 제 월급으로는 집세도 안 되었죠. 다행히 아내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한 달에 1500불 정도 받아, 둘이 합치면 겨우 빠듯하게 생활비를 쓸 수 있었습니다. 

내부의 적을 만나다
2001년 2월, 늘 조용하던 신문사 사무실이 하루 종일 전화로 북새통입니다. 바로 부시 대통령이 245i조항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245i 조항이란 미국에 있는 불법 체류자로서 5년 이상 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일정 금액의 벌금만 내고 스폰서를 구하면 영주권을 내주도록 하는 일종의 사면 조치입니다. 그리고 5년 미만 3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게도 벌금을 낸 후, 출국했다가 다시 들어와 스폰서를 구하면 영주권을 주는데,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이 조치로 인해 약 1500만 명의 불법체류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한인들이 이 조항에 자신이 해당되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체류자 숫자는 약 2000만에서 2500만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해당사항이 없는지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럭저럭 신문사에서 일한 지 벌써 7개월로 접어들면서 직장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장님과의 관계가 힘들어서였죠. 미국에 먼저 와 있는 한인들은 새로 미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텃세를 부립니다. 특히 영주권이 없으면 아예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미국에 미리 와있는 사람들은 이민 올 때 일 인당 200불만 가지고 와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자립했기 때문에 대부분 고집이 셉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고 정착에 성공한 자부심이 아주 강해서 새로운 유입자의 의견은 아예 듣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견도 잘 바꾸려 하지 않고 지극히 보수적이죠. 그런 케이스의 사장님은 저에게 영주권을 내준다는 것이 엄청난 혜택이라는 생각이 드셨는지, 점점 개인 비서처럼 일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엔 이 정도야 하며 응했는데, 점점 도가 지나쳐 아예 상머슴으로 부리듯 저를 대했습니다. 도저히 그 모멸감을 견디기가 어려웠죠. 영주권을 위해서 참고 참았지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영주권을 포기한 채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다시 영주권을 얻기 위해 수소문 끝에 마늘 공장에 3만 불을 지불하고 H3 비자를 받기로 했습니다. 엄청 큰 금액이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누님에게 부탁해 계를 들고, 그것을 담보로 3만 불을 지불했던 것이죠. 돈은 벌지도 못하는데 빚만 생기니 걱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돈을 지불했다 해도 바로 영주권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또다시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것이 잡화점 직원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서 캐빈 리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0>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