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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통영, 통영의 이순신

2022년 9월호(15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2. 1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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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통영, 통영의 이순신

남망산 이순신 장군 동상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이 한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에 다녀왔다. 통영이 초행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직후였기에 감흥이 새로웠다. 통영은 이순신의 고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임말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신설됐다. 충청과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할 각 수영(水營)의 상급 지휘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서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들을 아울러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의 사령관격이었지만 이억기와 원균은 장군의 부하가 아닌 수평관계의 장수였다. 지휘체계의 결함이 불가피했다. 통제영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관으로 1895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수군의 총본부였다. 통제사는 종2품 관직으로 팔도의 도백(道伯)인 관찰사(觀察使)와 동급이었다. 외직으로는 최고위급이다. 역대 통제사는 모두 208명이었다. 


초대 통제사는 한산대첩의 주역, 이순신 장군이 임명됐다. 통제사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통제영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은 전란이 끝난 1604년의 일이었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작전지도에서 보이는 통영(統營)이라는 지명은 명백한 고증오류이다. 한산해전이 벌어졌던 임진년(1592년)에는 있을 수 없었던 지명이다.


선조 임금은 1606년 통제영 북서쪽 여황산 자락의 상서로운 땅을 골라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한 사당, 충렬사(忠烈祠)를 세우게 했다. 봄, 가을의 향사(享祀)는 통제사가 올렸다. 임금이 이곳에 사당을 세우라 명하기에 앞서 이 지역 민초들은 스스로 장군의 전사 소식이 들리자 초당을 짓고(1599년) 제사를 지내왔다. 1877년 이순신 장군의 10세손 이규석(李奎奭)이 통제사로 재임중 이 초당을 기와집으로 중수하고 착량묘(鑿梁廟)라 이름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충렬사가 관립(官立) 사당이라면 착량묘는 민립(民立) 사당인 셈이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충렬사나 착량묘에서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없었다. 통영사람들은 기미년(1919년) 독립선언 만세운동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를 결성하고 제향의 맥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왜경이 이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왜경은 장군의 위패를 파괴하고 정당(正堂)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대못을 박았다. 삼문의 태극문양도 온통 붉은 칠을 해 일장(日章)이 되게 했다. 충렬사영구보존회는 해방 후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로 이어져 충렬사와 착량묘의 관리·운영은 물론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통영에 가서도 충렬사를 찾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충렬사를 찾아가봤다.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정당(正堂) 앞에서 나름의 예를 표했다. 그랬더니 문화해설사로 보이는 어르신이 내게 다가와 글씨가 쓰인 나뭇잎을 기념선물이라며 건네 주셨다. 이 어르신께서 경내에 떨어진 동백나무 잎사귀 가운데 깨끗한 것을 골라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는 글씨와 날짜 그리고 ‘백야(白夜)’라는 당신의 아호를 써 주신 것이다. 달필이었다. ‘욕일보천(浴日補天)’은 정당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의 문구라는 설명도 해주셨다.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이 장군의 업적을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깨끗이 하고 하늘의 허물을 메운 공)’이라 칭송했던 말에서 따온 글이라고도 하셨다. 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극찬이다. 또 다른 주련에는 ‘맹산서해(盟山誓海)’라는 구절이 보였다. ‘맹산서해’는 장군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서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응해 꿈틀대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안다)’에서 따왔다. 장군의 충절과 기개가 여지없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통제영 앞의 강구안은 군항이었다. 판옥선과 거북선 같은 조선 수군 전함들의 모항이었다. 강구안 동편에 바다로 돌출된 야트막한 구릉이 남망산(南望山, 72m)이다. 한산대첩의 현장인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남망산 정상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통영에 갈 때마다 가보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규모가 좀 작은 듯해 볼 때마다 좀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좀 더 잘 만들어 세울 수는 없었을까?’ 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동상 좌대 뒷면에 있는 건립문을 읽어 보고는 그런 생각을 더는 할 수 없었다. 동상은 단기 4285년에 건립됐다. 서기 1952년이다. 전란중이었다. 건립문에는 ‘왜란(倭亂)을 겪으시던 임진년(壬辰年)이 이에 여섯 번째 돌아왔나이다. 오늘의 국정(國情) 그 당시(當時)의 간난(艱難)을 방불(彷彿)케 함이 있거늘 우리 어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어른의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사오리까.’라는 문구가 보인다. 동상건립 주체는 ‘통영군임진6주갑충무공 기념사업위원회(統營郡壬辰六週甲忠武公記念事業委員會)’라고 명기돼 있다.
충렬사 문화해설사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통영 사람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사당이 아닌 다른 민가에서 숨죽이며 장군의 제사를 이어왔다. 그리고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임진년에 비록 물자가 부족한 시기였지만 충무공의 동상을 이곳에 우뚝 세웠던 것이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동상의 규모가 작다거나 완성도가 미흡하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은 남해의 황금어장에 주목하고 통영을 수산항으로 개발했다. 일본 어민들을 정책적으로 집단 이주시키기도 했다. 통제영의 건물들은 세병관을 제외하고 모두 훼철됐다. 당당했던 통제영도, 한산대첩의 영광도 무참히 무너졌다. 통영의 일인들은 번성했다. 일인들은 그런 통영의 거리를 활보했다. 통영 사람들은 그런 치욕을 겪으며 이를 갈고 속을 썩였을 것(切齒腐心)이다.     
남망산 동편에는 새로 이순신공원이 조성돼 있다. 거기에는 훨씬 규모가 크고 잘 만들어진 동상이 세워져 있다. 통영읍이 시(市)로 승격해 통영군과 분리됐을 때(1955~1995년)는 충무시로 불렸다. 장군의 시호에서 따온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도 이 고장 향토음식인 충무김밥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산 : 용의 출현>은 임진전쟁의 성격을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했다. 최근 일본사람들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의 일본은 지금의 러시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그런 왜군을 준엄하게 응징했던 한산대첩의 의기(義氣)가 통영에 고스란히 서려 있다.

자유기고가 강귀일  
kgi200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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