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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민속음악에서 음의 자유로움을 발견하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선구자 ‘벨라 바르톡’

2022년 9월호(15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2. 1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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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민속음악에서 음의 자유로움을 발견하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선구자 ‘벨라 바르톡’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서울 나들이. 오랜만에 찾은 마로니에 공원은 그간 코로나로 막혀있던 공연들이 하나둘 다시 시작되면서 제법 활기차 보였습니다. 음악회가 있는‘예술가의 집’바로 앞 야외무대에서도 한 연주자가 열정적으로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었지요. 오늘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 음악회 속에서 처음 만난,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친근한 헝가리의 작곡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 1881~1945)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첫인상_현대화된 오래됨의 독특한 매력
 먼저 여러분이 궁금하지 않도록 바르톡을 중심으로 공연의 소감을 짧게라도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겠죠? 이번 공연된 바르톡의 작품들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헝거리 전통 민요들이었는데, 해학적이고 솔직한 가사의 성악파트는 분명 민요의 그것인데, 함께 연주된 피아노의 음들은 노래와 상관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대음악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어색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해 보이는 조합임에도 가사가 표현하는 곡의 느낌이 충분히 전달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자유로움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옛것을 가져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시켜 곡을 만드는 바르톡 만의 특별한 매력을 만나는 시간이었죠. 


 바르톡 음악의 근원으로서 ‘자연’과 ‘민속음악’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바르톡은 20세기 중요한 작곡가 중에 하나로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현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불편함 속에 몰아넣는 음의 자유로움일 것입니다. 바르톡과 거의 동시대를 살아갔던 쇤베르크(1874~1951)는 12음계로 된 무조음악을 만들어 현대음악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역시 각각 인상주의와 신고전주의 음악으로 현대음악을 이끌어 갔는데, 바르톡이 이들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르톡은 그 어느 음악적 사조에도 속하지 않았고, ‘자연’과 ‘민속음악’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자연_개인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바르톡이 인생의 후반기에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와 교류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1999)은 바르톡이 세련된 어른들과 있을 때보다 어린이 혹은 동물과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해 보이곤 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연 속에 머물기를 좋아했으며, 곤충, 식물, 광물을 수집해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바르톡이 사람보다 자연의 매력에 푹 빠진 이유로, 그가 한 살 때부터 5살이 될 때까지 앓았던 심한 피부질환을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육체적, 정서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시기를 겪으며 그는 자신 안에 갇힌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연애에 실패한 뒤로는 모든 남녀 간의 사랑을 의심하고 부정했는데, 그 가운데 그는 점점 더 깊이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이지요. 


 자연으로부터 창조한다!
 바르톡은 평소에 ‘자연으로부터 창조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가져와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피아노 연습곡집인 ‘미크로코스모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파리의 일기 중에서’(From the Diary of a Fly) 에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파리의 비행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오랜 관찰 속에 식물들의 꽃잎이나 이파리가 가지고 있는 수적 패턴들, 소위 ‘피보나치수열’을 자신의 음악작품에 도입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소리와 규칙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음악의 화음과 선율로는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계곡의 물 소리, 새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일정한 화음과 선율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엄청나게 불규칙하고 자유로운 음들이 어우러져 우리에게 감동을 주듯이, 바르톡은 이런 자연을 닮은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갔던 것이지요.


 민속음악_ 시대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헝가리는 유럽전체를 벌벌 떨게 만든 훈족의 후손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늘 강대국들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16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에게 패해 한 세기를 식민지로 지냈고, 그 후 오스만제국을 물리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다시 지배를 받아야 했지요. 그리고 끈질긴 독립투쟁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국위를 회복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피지배국으로서 오랜 시간 눌려 지내 온 헝가리 사람들이 갖는 조국을 향한 남다른 애정과 주변강대국을 향한 반항심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 바르톡 역시 자신의 조국 헝가리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습니다. 그가 전액 장학금을 약속한 빈 음악원 대신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선택한 것, 그리고 음악원 재학 당시 헝가리 민속의상을 즐겨 입었던 것, 가족들과의 대화를 반드시 헝가리어로 하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22살에 그는 1848년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이끈 ‘러요시 코슈트’의 영웅적 투쟁을 그린 교향시 ‘코슈트’(1903)를 작곡했고, 190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헝가리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속한 헝가리 민족 음악에만 푹 빠져 있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관심을 주변의 민족과 나라들로 확장해 갔습니다. 바르톡은 헝가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헝가리 민속음악의 뿌리가 주변의 여러 민족들의 음악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헝가리는 역사적으로 주변국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 아니라, 단일민족이 아닌 여러 유목민들이 모여 시작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그는 헝가리 민속음악이 중앙아시아, 아나톨리아, 시베리아와 같은 아시아의 민요 전통과 유사한 오음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토대로 기존의 7음계를 벗어난 독특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두 개의 세계대전을 관통한 바르톡의 음악
그가 헝가리를 넘어 보편적인 민속음악에 집중했던 이유로 그의 생애를 관통하며 일어났던 1,2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습니다. 바르톡은 엄청난 전쟁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 나치즘 같은 지나친 민족주의가 얼마나 큰 위험이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인 헝가리가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 때, 거듭 잘못된 선택을 하며 커다란 고통을당하는 것을 절절하게 경험했습니다. 늘 강대국에 시달리던 헝가리는 자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의지하려는 나라가 어떤 노선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없이 강해 보이는 편에 줄을 섰습니다. 그 가운데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 쓴 채로, 나라전체가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지독한 똥통에 빠져 고통을 받아야 했지요. 혹 이들과 함께 전승국의 위치에 섰다 할지라도 이후 토사구팽을 당하거나, 이들 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많은 주변 나라와 민족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의 길을 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인간이 저질러 놓은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다 순수한 음악적 근원으로서‘민속음악'에 더욱 집중해 들어갔고, 그 속에서 민족을 뛰어 넘은 보편적인 그 무엇을 찾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바르톡은 ‘자연’과 ‘민속음악’에 몰두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만들어 20세기 현대음악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나치즘을 반대했고, 자국 안에 노골적인 파시즘이 판칠 무렵, 1940년 미국으로 탈출하여 다가오는 공산주의의 폭풍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 중심의 민족주의 음악을 추구하며 나치즘을 옹호한 바그너나, 러시아의 국민악파가 일종의 음악적 민족주의를 만들어 그 이후의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그릇된 음악적 기초를 놓았던 어리석음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르톡이 그렇게 주목했던 자연과 민속음악에서 만들어낸 음악들이 내리막길로 쳐 박히는 헝가리와 그 시대를 얼마나 깨우고 포옹하는 힘이 되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미국으로 탈출한 바르톡이 날카롭게 비웃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뒤에는 2차 대전의 살벌한 현실과 독재자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폭정 속에서 외롭게 투쟁한 작곡가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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