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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클라이번’과 ‘임윤찬’ 우째 이런 일이…

2022년 11월호(15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3. 1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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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클라이번’과 ‘임윤찬’

우째 이런 일이…

칠레 노익호님이 직접 그린 그림

 

올해,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3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연주한 임윤찬이 우승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또 한 번 올라갔다. 클래식분야이기 때문에 음악애호가들만의 이야기 거리였을 법한데, 의외로 전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아 임윤찬과 관련된 유튜브의 조회 횟수와 인기는 나날이 치솟고 있다. 
회상해보면 한국인으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해 최초로 이름을 날린 피아니스트는 정명훈이었다. 정명훈은 1974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했는데 정부주도하에 정명훈의 카퍼레이드가 있었다. 1974년, 아마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공항중학교를 다녔는데, 전교생이 김포가도에 집결하여 손에 손에 태극기 깃발을 들고 정명훈의 입상을 축하하자는 카퍼레이드에 동원되었더랬다. 차가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재밌었다. 


반 클라이번의 카퍼레이드
반 클라이번은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미국 국민들은 너무나 신나 대대적인 카퍼레이드를 벌였다.(이것을 본떠 정명훈의 카퍼레이드를 벌였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피아노의 대국 소련에서 말도 약간 더듬는 텍사스의 키 큰 청년, 반 클라이번이 우승을 할 수 있었을까? 
이참에 오늘날 임윤찬을 세상에 알리게 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반 클라이번’에 대해 알아보자.


1958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소련과 미국이 누가 더 대단하냐로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1957년 10월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를 발사하여 콧대 높은 미국의 허를 찌르며 우주경쟁에 가장 먼저 성공했다. 게다가 한 달 뒤 강아지 ‘라이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 또한 우주여행에 성공을 해버린 것이다. 그 참에 미국을 묵사발 내기로 작정한 소련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열면서 자국이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면에서도 뛰어남을 과시하려했다.


그런데, 우째 이런 일이
미국인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2013)이 23세의 나이로 제1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했는데 피아노협주곡 1번을 너무나 잘 연주한 게 문제였다. 당연히 소련인(레프 블라센코)을 1위로 입상시키려던 소련진영은 난리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이 승인을 했고 반 클라이번은 국민적 영웅에다가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이 사건으로 미소냉전이 때 아닌 해빙무드로 잠시나마 전환되었으니 노벨평화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때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우리의(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이다보니)‘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그의 책《리흐테르》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리히터의 회상
“1958년에 나는 마지못해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참가자가 우승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콩쿠르에서 연주를 가장 잘 한 사람은 반 클라이번이었다. (그를 1등이 되게 하고픈 나머지) 그래서 세 명의 참가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에게 영점을 주었다. 청중은 반 클라이번의 연주에 열광했고, 그가 1등상을 받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위로 밀려난 레프 블라센코의 회상
“그 당시 소련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스타일이 매우 엄격했으며, 이 엄격함은 순수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서 클라이번이 나타났는데, 그는 옛 러시안 스쿨의 특성인 벨칸토 같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연주했다. 이것은 큰 인상을 주었다.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로 6피트의 껑충한 소년이 청중을 강타했다. 반 클라이번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반 클라이번은 우리보다 더 러시안적이었다. 그의 연주는 구름을 뚫고 비추는 햇빛 같았다.”
2위를 차지한 레프 블라센코는 사실상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런데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에 차이코프스키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의무적으로 쳐야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2주 안에 연습을 해야 했다. 결선에서 당연히 고전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1등을 뺏기고도 이렇게 반 클라이번을 치켜세워준 착한 레프 블라센코는 이후에 유명해진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총17명의 심사위원단의 점수집계에 의한 순위를 알아보자면, 2라운드 때까지만 해도 레프 블라센코가 1위, 2위엔 중국인 류시쿤, 3위에 반 클라이번이었다.


결선에서 생긴 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쳤는데 누구도 뭐라할 수 없을 만큼 반 클라이번이 잘 친 것. 피아니스트의 역사를 통틀어 제왕이라 할 수 있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반 클라이번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듣고 대단히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강철타건으로도 유명한 피아노의 신 에밀 길렐스가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결선에서 레프 블라센코가 아닌 반 클라이번이 1등을 했다는 사실을 서기장 니키타 후루시초프에게 알리러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 이제 이 말을 전하고 나는 수용소로 추방당하겠구나’그런데 서기장 후루시초프는 “그가 최고인가? 그렇다면 그에게 상을 주게나!”하고 허락했다고 한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역사
1958년 이렇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한 반 클라이번은 콩쿠르에서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지휘했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을 모셔와 순회공연을 돌며 공전의 히트를 친다. 이 여파로 1962년부터 반 클라이번의 이름을 걸고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열게 된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반 클라이번 재단에 의해 개최된다. 전언에 의하면, 1958년 어느 리셉션 파티장에서 누가 “상금 만 달러를 내가 내겠소!”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재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맺음말
64년 전, 센세이션을 일으킨 반 클라이번과 수개월 전 클래식 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임윤찬은 닮은 데가 많다. 한 가지만 들자면, 반 클라이번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듣고 심사위원인 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임윤찬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지휘자 마린 올솝의 지휘로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마자 마린 올솝이 감동의 눈물을 훔친 것이다.
세기에 한 사람이나 나올까 말까 한 이런 예외의 반응 속에서 임윤찬의 바위같이 흔들리지 않을 행보를 미리 점쳐보며 박수를 보낸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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