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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시민, ‘로버트 파우저’박사를 만나다

2022년 12월호(15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4. 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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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시민, 

‘로버트 파우저’박사를 만나다

스페인어, 나의 첫 외국어
스페인어가 첫 번째 저의 외국어가 된 것은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고교시절 만난 스페인어 선생님은 멕시코 분이셨는데, 이모처럼 친근하고 유쾌해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습니다. 학생 때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면 그 과목 공부를 더 열심히 하듯 저는 좋은 성적을 받았고 선생님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스페인어를 즐겁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본어에 입문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 교토에 머물며 미군용 건물과 시설을 설계하는 일을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주말마다 헤이안 신궁 숙소 근처와 긴카쿠지 등을 다니시며 그곳의 풍경을 간단히 스케치해 편지와 함께 집으로 보내곤 하셨죠. 덕분에 저에게는 일본과 아시아는 환상적 이미지로 남게 되었고,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 고교 여름방학에 도쿄 부근 일본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는데, 매우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미시간 주 앤아버로 미국의 수많은 지역도시 중 하나였는데, 맛있는 빵집, 세련된 카페문화도 갖추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반면 도쿄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저에게는 신세계와 같은 신기한 도시였습니다. 젊은이들의 멋진 옷차림, 도시의 활기찬 분위기는 저에게 엄청난 자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 미시간 대학에 진학한 저는 전공을 일본어로 정하기까지 했으니까요.

1983년 한국어 배울때 사용한 노트


일본과 다른 독특한 매력,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다
한국과 한국어를 처음 만난 건 1982년입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여름방학을 이용해 도쿄에 두 번째로 머물 때였는데, 이때 잠시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을 다녀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의 분위기는 일본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일본보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어디를 가나 활기차고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 일본인들이 한창 유행과 패션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혼란스러운 정치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제 속에서 ‘이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올까?’, ‘한국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 할까?’ 등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레 한국어 학습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 한국어 공부를 조금씩 하다 더 알고 싶은 마음에 1983년 아예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현 언어교육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1992~1993년 한국에서 조선시대 시조를 공부할때 사용한 노트


독학으로 한국어! 전공으로 일본어, 배울 때의 차이
한국어를 공부할 때, 일본어와 달리 독학으로 하다 보니 시험을 볼 필요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는데, 모르는 부분은 그냥 넘어 가기도 하며 정독보다는 다독을 했습니다. 현재 제가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책을 읽은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2021년에 출간한《외국어 학습담》을 포함해 책 5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한국어로 썼습니다.

10개 이상 외국어를 할 수 있게 된 원동력  ‘소통의 즐거움’
10대 후반부터 관심을 가지고 배우기 시작한 외국어는 내게 평생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평생 새로운 외국어를 순례하며 살아왔으니까요. 제가 하는 언어는 대략 영어, 한국어, 일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 몽골어, 여기에 이탈리아어는 조금, 중국어는 유창하지는 못하고, 한문은 2000자 정도로 맹자를 공부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며 가장 좋은 점은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고, 각 나라 사람들과 즐거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1월 초에 부산 김해 외국인 마을에 조사할 게 있어 외국인이 많이 사는 마을과 상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청 뒤편 수로왕릉 바로 옆 동네에서 잠시 쉬고 싶어 들어간 곳이 튀르키예 식당이었죠. 마침 한국에 오기 전 튀르키예에 잠시 여행 차 갔던 터라, 간단하게 튀르키예어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요리사는 튀르키예인으로 한국어는 못하고 영어는 조금하는 반면, 알바생은 우즈베키스탄 사람으로 영어, 한국어, 튀르키예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바생과 영어로 잠시 대화를 나누고, 튀르키예 요리사에게는 튀르키예어로‘데세큐라르(Teşekkürler)’라고 감사 인사를 했는데, 그 한마디로 서로 통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마치 하루 종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주 기분 좋게 다녔으니까요. 

부산 김해 튀르키예 식당


한중일, 외국인으로서 구분이 가능?
일본에서는 14년을 살았고, 한국도 첫 방문부터 현재까지 40년간 인연을 맺고 있지만, 중국은 여행정도 한 것이 전부입니다. 한중일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을 끼고 사는 등의 행동과 패션, 라이프 스타일이 굉장히 비슷해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한중일의 윗세대들은 특징이 뚜렷해 구분이 쉽습니다. 예전 학회나 문화적인 행사에 가면 일본은 70대도 참여할 정도로 폭이 넓었다면, 한국은 4~50대가 좀 있는 정도였습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일본이지만 교양 있는 중산층이 빨리 형성되어, 한국에 비해 거칠게 행동하는 어르신이 별로 없었지요. 이러한 차이는 한국이 부족하다기 보다, 그 당시 한국은 6.25까지 겪어내느라 힘든 시기로 치열하게 생존 문제에 힘쓰다 보니, 문화를 누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죠. 반면 중국은 와글와글한 분위기만으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과 일본은 너무 다른 전화 응대를 봐도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제가 일본 가고시마 대학에서 근무할 때 재단이사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런데 전화 받을 때 저 혼자 있는데도 책상 앞에 서서 수화기를 잡고 하이! 하이! 그러는 겁니다. 그냥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편하게 전화를 받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대화할 때 일본식 반응이 중요해 상대방에게 관심 있다는 표현으로 계속 하이! 하이! 하지 않으면 전화가 끊겼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조금 흐르면 바로 모시모시… 반면 한국 친구랑 전화를 하면 쭈우욱~~~~ 침묵했다가,“어? 그래!”하고 반응을 합니다. 듣긴 하는데 반응을 즉각 안 하는 것이죠. 듣고 알았다는 표현도 어, 어, 어… 약간 거리 있는 사람처럼 느낌이 완전 다릅니다!(웃음) 

다양한 언어를 접하는 본인의 정체성
‘코스모폴리탄’, 즉 세계시민이 노마딕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몇 가지 층의 정체성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미국사람이라는 기본 위에 일본, 한국, 스페인 등 여러 경험이 쌓여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인 이전에 근본적으로는 대학도시이자 자유주의적인 문화풍토가 진한 미시간 주 ‘앤하버 사람’(Ann Arborite)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한옥을 수리까지 하며 사셨다고요?
1988년 올림픽 때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종로구 재능문화센터 근처 한옥에서 1년, 계동에서, 그리고 체부동의 한옥을 매입해 수리해 살기도 했습니다. 한옥을 수리하고 어락당(語樂堂)이라는 한옥 이름도 붙였지요. 20대 후반, 제가 한옥에 살게 된 이유는 한옥에 대한 로망이라기보다 재정상황을 고려해 선택한 것입니다. 요즘은 한옥을 특별한 거주지로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옥을 일반주택처럼 여겨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재정적인 부분 말고도 조용한 동네, 프라이버시 문제, 공간의 분위기 등을 생각해 한옥을 선택했습니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 주택에서도 살아봤는데, 한옥에 비해 겨울에 엄청 추웠어요. 에피소드 한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일본 공동주택은 너무 시끄럽습니다. (그래요? 의외인데요? 일본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문화가 한국보다 더 강할 텐데요) 한 번 큰 싸움이 있었죠. 저는 아래층에 살았고, 위층에 사는 사람의 층간 소음이 너무 컸습니다. 문을 닫을 때 마다 쾅쾅,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아 녹음을 했습니다. 시청 시설 관리과에 가서 해결해 달라 하니, 집주인에게 통보가 갔나 봅니다. 그러자 보증금에 두 달 월세를 미리 주며 나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웃음) 이때 교훈을 받고 집을 구할 때 아파트보다 주변의 간섭을 덜 받을 수 있는 단독주택을 찾았고, 여기에 한옥이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체부동 한옥을 수리할 때는 외국인인 제가 한옥을 수리하는 것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도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동네 친구도 한옥을 수리하는 등 한옥 보존에 관심이 높아졌거든요.

2006년 가고시마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장면


40년 전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라는 호기심에서 지금 한국의 모습은?
한국 특유의 에너지로 빠른 성장을 하는 가운데 사회, 경제, 교육, 사람들의 의식수준 등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쉬운 점은 코로나에 대한 한중일의 대처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양 언론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 그렇지, 동아시아 세 나라가 취한 엄격한 코로나 관리로 한중일의 이미지가 엄청 나빠진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은 최근까지도 코로나 제로정책으로 국민을 거대한 강제 수용소에 가두어 둔 것 같습니다. 일본도 자신들이 표명하는 민주주의 가치관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강압적 정책을 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14년을 살며 평생 처음 반일감정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3일 내에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영주권을 박탈한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보냈습니다. 일본 밖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모든 것을 정리하고 3일 이내에 들어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민주 선진국이자 G7, G20국가에 걸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펼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한국이 조금 덜하긴 해도 서양인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겁니다. 2주 격리는 너무 길었고, 지속되는 PCR검사에, 한때는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외국에서의 백신 접종은 인정하지 않고… 이런 부분은 좀 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계가 글로벌한 노마딕 사회로 가고 있는 지금에 있어 한국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합니다. BTS, K팝 등 밝고 재미있는 한류가 한국 이미지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과 외국인 노동자 차별 등의 부분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혹 한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잘 살게 된 선진국의 상징으로 인종차별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국이 계속 단일민족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배타적인 사고에 갇힐 위험이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를 충분히 해서 정상적인 다문화 국가로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외국인에게 개방적이고 차별이 없는 편이어서 한국 이미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
한국은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등 민주적인 가치관이 의외로 강합니다. 이런면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유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민주적 가치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강해 이 점이 중요한 하나의 기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다민족, 다문화에 대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한 사고를 좀 더 발전시키면 여느 유럽 국가보다도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관련된 사례로 스페인을 들 수 있습니다. 스페인도 프랑코의 독재 경험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70년대에 일어났습니다. 한국보다 한 10년 정도 빠른데 민주적인 헌법도입과 EU 통합, 열린 민주국가를 만들자는 의도가 강합니다. 2018년 스페인에 2주 정도 머물렀던 그 당시에도 외국인들의 이민 비율이 16%정도로 높았습니다. 이렇게 외국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적인 가치관을 오래 전부터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민주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사회적 개방과 통합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고질적 문제인 ‘저 출산 고령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준비 없이 단순히 노동력 확보 등 현실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인을 받아들이면 차별이나 갈등이 생기게 되어 더 많은 사회적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liberty와 freedom의 두 가지 자유 개념
프랑스어도 liberté 하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freedom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자유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억제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는 것, 반면 liberty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이지만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폐를 끼치면 그것은 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5층 건물을 지으려 하는데, 조망권이나,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이웃이 피해를 보게 될 때 이 권리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체부동 한옥을 수리할 때 그곳에 사시는 어르신들 중에 한옥을 없애고 개발 하자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싫어했습니다. 자신의 재산권 행사를 하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정치인 중 링컨을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링컨이 노예제도를 없앤 것도 위대하지만, liberty의 가치를 포함한 독립선언서를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헌법과 독립선언서가 있는데, 헌법은 한정된 의미가 있다면 독립선언서의 3가지 권리, life(생명), liberty(자유), the pursuit of happiness(행복추구권)은 이념적이고 굉장히 강력한 것입니다. 또한 링컨이 했던 유명한 연설 중에 게티스버그 연설보다, 1865년 링컨의 두 번째 취임사에서 했던 연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연설에서 링컨은 북부가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한쪽 편에 쏠리기보다 중립적인 부분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남북을 통합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이 부분도 링컨이 가진 위대한 능력이라고 보는데 정치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자신의 입장에서 떠나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나중에 통일하게 되면, 남북이 통합하는 차원에서 링컨 대통령의 이 리더쉽에서 배울게 많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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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친 로버트 파우저 박사님의 입에서 “오늘 인터뷰 재밌었어요. 혹시 나중에 식사나 차를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셨어요. 순간 ‘이 분이 한국 사람이 다 되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말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엄격한 약속의 말이 아닌,‘사회적 멘트’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곧 11월 말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내년 3월이면 다시 한국에 오신다고 하니, 그때를 기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링컨 이야기가 나와‘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에서 8회에 걸쳐 링컨을 연구해 연재한 기사를 보시도록 챙겨드렸습니다. 40여년 한국과 계속 연을 가지고 저술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 박사님의 한국에 대한 기대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발걸음을 산본으로 향했습니다.

외국어 학습담(2021년)
외국어 전파담 5쇄 개정판(2021년)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1961년에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에서 태어났다.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2016년에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고 2018년에 『외국어 전파담』, 2019년에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2021년 8월에 『외국어 학습담』을 출간했다. 외에 영어로 1997년에 『한국문학의 이해』(김흥규 저)를 『Understanding Korean Literature』영어로 번역해 출간했고, 2015년에 『Hanok: The Korean House』을 공저로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 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대수선하기도 했다. 2016년 교토에서 열린‘KG+’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고 2017년과 2018년 인천과 홍천에서 각각 사진 공동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019년에 인천‘코스모40’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학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8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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