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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밝히는 ‘트러스트 무용단’ 김형희 단장을 만나다

2020년 12월호(13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2. 3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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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밝히는
‘트러스트 무용단’ 김형희 단장을 만나다

 

춤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집념
어렸을 때부터 춤추는 게 좋아서, 사람들이 꿈을 물어보면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죠. 지금도 나에게 다시 꿈을 물어본다면 대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후, 중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하게 되어 이사벨 여자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목요일 채플 시간에 가끔씩 현대무용으로 예배를 드리는 걸 볼 보았어요. 춤추는 학생들이 너무 멋지고 부러웠죠. 저는 무용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나서, 같은 반에 있는 무용을 배우는 친구를 매일 찾아가 달달 볶아댔습니다. “무용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해? 네가 무용부 선생님에게 물어봐 줄래?” 계속 캐물었죠. 그런데 어느 날 무용선생님이 무용실로 오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입이 귀에 걸려 달려갔고, 무용부에 들어가서 점심시간마다 30분씩 무용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8남매를 남겨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가운데 여섯째인 제가 무용을 한다는 건 가족에게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았죠.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보내준 용돈으로 무용 신발을 사 신으면서 춤을 계속 배웠답니다. 물론 학원은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요.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해 무용을 본격적으로 배우며 실력이 점점 향상되어 갔지만, 오빠들은 저의 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자인 네가 무슨 무용을 한다고 해! 가정 형편도 좋지 않은데 말이야.” 오빠들의 말은 저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친척들과 엄마까지 반대했지만, 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봐. 내가 열심히 해서 정말 보란 듯이 모두에게 인정받을 거야’하고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죠. 덕분에 대학교 때 열심히 해서 상을 타고 신문에도 났어요. 등록금은 제가 알아서 해결했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을 넘게 춤과 함께 살아왔네요.

‘무용계의 이단아’
학교에 다니면서 반항기가 생긴 것 같습니다. 경직된 제도권 아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았죠. 교수로서 가르치면서도 마찬가지였고, 늘 부딪치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95년도에 ‘트러스트 무용단’을 창단했습니다. 당시 무용계에선 난리가 났어요. ‘무용계의 이단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니까요. 변변한 배경도 없는 ‘트러스트 무용단’이었지만 실력 있는 아이들이 몰려들었죠. 


저희 무용단에서 잘못된 학교 제도를 비판하고 차별화된 춤을 가르치니, 학교 교수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우리 무용단 아이들에게는 일부러 좋은 성적을 주지 않았죠. 참다 못해 학교로 따지러 갔어요. 미스코리아 나가는 사람은 A를 주면서, 우리 아이들은 왜 F를 주느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밖에서 그렇게 활동하지 말고 대학교수로 오라는 거예요. 고민이 많았죠. 예술가의 길과 교수의 길은 성격이 달랐으니까요. 저는 교수로 다시 가면 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트러스트 무용단’ 단원들을 데리고 실크로드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어요. 티벳, 몽골, 중국, 중앙아시아, 터키를 다니면서 한 달의 생활비를 정해놓고 현지인들과 똑같이 먹고 자는 훈련을 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훈련을 한 것이죠.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훈련을 시켰어요. 토하고 싶으면 토하고 와서 다시 훈련하라고 할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었죠. 순수한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귀하게 여기며 공장처럼 똑같이 찍어내는 무용수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들만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하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를 늘 질문하게 만드는 춤의 작업방식, 작품과 연습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수업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트러스트 무용단’
저희는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 티베트, 터키, 시베리아 등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 공연을 열고, 교류하며 소통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공연 작품의 주제는 ‘사람’,‘사회’,‘역사’인데,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늘진 면들을 주로 다루고 있죠. 하지만 단순히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밝은 부분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내 새로운 시대정신과 인간애를 담고자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거칠더라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화려한 기교보다 춤꾼들이 흘리는 땀과 정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야 작품에 감동이 있고 관객들에게 그 이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그럴 때 춤은 시각적으로 보는 춤이 아니라, 보는 이의 모든 지각을 통해 인식하게 하는 춤, 소외되고 불구된 세상 구석구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되지요.

 

장애인무용단 케인앤무브먼트 시선1+1 공연

공동체로서 ‘트러스트 무용단’
‘트러스트 무용단’은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같이 밥 먹고 연습하고‘몸’을 열심히 훈련하며 늘 몸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다음에는 ‘대화’를 하며 ‘삶’을 같이 나눕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먹는 것 하나까지도 신경을 많이 씁니다. 삶의 모든 면을 제대로 가꾸어야 하니까요. 덕분에 단원들이 힘들어하기도 해요. 어떤 무용수는 ‘트러스트 무용단’이 마치 ‘인격양성소’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동료가 있었고 이젠 각자 독립하여 각자의 길에서 아주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죠. 떠나지 않고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열심히 훈련시켜 이제 제대로 작업할 것 같으면 떠나게 되는 현실을 보며 실망스럽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르친 아이들이 떠나면 참 힘들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춤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말이 아닌 춤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동작으로 사람의 심리와 생각을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람의 동작과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그 사람의 성격, 심리 등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죠. ‘저 사람이 웃는 의미는 뭐지?’,‘저 사람의 동작과 표정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까?’등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사람들을 유심히 봅니다. 먹는 것, 씹는 것, 바라보는 시선 등을 통해 저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죠. 그 후엔 새롭고 창조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석류를 ‘빨간색이고 먹으면 시큼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너를 끌어당기는지, 무엇이 석류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드러낼 때 새롭게 석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저는 작품을 쓰기 전에 성경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과 사물의 본질과 다양한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아주 정직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장애인 무용단, 케인 앤 무브먼트
우리 무용단 안에는 장애인 무용단이 있습니다. ‘케인 앤 무브먼트’라는 단체입니다. 이전에 저는 미국에서 춤을 배웠는데, 미국은 솔직히 ‘테크닉’ 밖에 없어요. 유럽에 가면서 그것을 알게 되었죠. 미국으로 가는 비자가 힘들어져, 90년대부터 유럽을 많이 갔는데, 프랑스와 독일의 춤은 미국과 완전히 다른 거예요. 유럽의 춤에 비하면 미국의 춤에는 영혼이 없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선생님들이 사비를 들여서라도 다 유럽으로 가더군요. 유럽의 춤을 접하면서 저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춤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죠. 테크닉으로서의 춤이 아니라, 누구나 출 수 있는,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는 것도 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장애인들의 표현은 그들에게 정상이며 춤인 거죠. 그래서 2003년부터 장애인 무용수와 공연을 같이 하다가, 2017년도에는 아예 장애인 무용단을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무용수들이 십여 명 있는데, 이들과 같이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답니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 감추고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대로 드러냅니다. 비장애 무용수와 장애 무용수가 같이 연습을 하는데, 장애인 무용수들이 계속 발전 하는걸 보며 저는 이들이 함께 섞여서 연습하고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이 엄청난 것이죠.

장애아들을 위한 무용 가르치기 
장애아들에게 춤을 가르쳐 공연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막 돌아다녀요. 그게 장애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지 마’,‘앉아 있어’라고 하기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돌아다니다가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그걸 보면서 깜짝 놀라죠. 잘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조차도 관객이 있고, 조명을 받으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답니다. 평소에 말도 잘 못하던 아이가 아웅아웅 거리면서 “안녕하세요. 저는 김OO입니다.”라고 말하면, 엄마들이 그동안 아이들 돌보느라 힘들었던 것이 단번에 날아가고, 공연이 끝나면 아이들이 대견해 엄마들은 펑펑 웁니다. 그리고 엄마들이 나중에 저에게 말하죠. 처음엔 믿지 않았다고요. 프로젝트라고 하면서 장애아이들을 이용해 먹는 게 아닌지 하고 의심했다고 말이죠. 


저희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한 번의 이벤트성이 아니라 어떻게 지속적으로 해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보여지는 것을 따라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긍지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습을 할 때 테크닉을 많이 가르치지 않고, 기본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훈련을 하되, 자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게 되고, 더욱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장애아들에게도 춤의 정신과 작업자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공연료가 지급됩니다. 한 예술가로 인정하고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려는 사람에게 본인도 한 명의 프로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트러스트무용단 yesterday 공연

숟가락 드는 동작 하나도 중요하다
저는 무용을 가르칠 때 기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코어근육에 힘을 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몸에 힘을 뺄 수가 없어 좋은 동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근육이 없으면 자신의 체중을 감당할 수 없고 다양하고 유연한 동작을 할 수가 없죠. 이 기본적인 것부터 기르고 나서 다음에 기술을 얹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생활 습관들, 심지어 숟가락 드는 것까지 중요합니다. 관절의 각도 하나하나가 다 춤으로 나오니까요. 


무용수가 무대에 설 때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진정성 있게 표현할 때 보는 이들이 느끼는 것이죠. 어떤 사람의 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가 딱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욕심이 많구나, 자기밖에 모르는구나 하고 말이죠. 춤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아내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초등학교만 다닌 치과의사, 무용가, 통역가입니다》 책을 내기까지
저에게는 딸이 셋 있는데, 첫째는 치과 의사로 독일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고, 둘째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무용가이고, 막내는 지리학도이면서 7개 국어에 능통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초등학교만 다녔다는 것이죠. 보통의 홈 스쿨처럼 시간표를 짜고 특별한 공부를 시킨 건 아니고, 저희 부부는 아이들이 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공부는 본인들이 필요를 느끼면 할 거라 생각했죠. 주변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어쩌냐고 걱정들이 많았습니다. 저희도 가끔은 그랬고요. 하지만 아이들을 믿어주는 가운데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도록 했던 것이 주요했던 것 같습니다.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찾아가되, 그것에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죠.


코로나와 ‘트러스트 무용단’, 그리고 미래
코로나 때문에 좋은 게 있다면, ‘트러스트’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연을 전혀 할 수 없으니 더욱 연습에 집중할 시간이 많았죠. 이전엔 공연 때문에 외국도 많이 나가고 뭔가 쫓기는 듯했다면, 지금은 그런 게 없으니까요. 학생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않고 집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코로나로 삶이 단순해졌는데, 그게 오히려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현대사회는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쉽게 산만해져서 무언가에 집중해 창조적인 것들을 만드는 것이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트러스트무용단을 운영하게 되면서부터 직접 무대에 서는 것을 거부 했습니다. 무용수로서가 아니라 대표, 안무가로서 작업을 하다 보니 기회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어요. 젊고 잘하는 무용수들도 많으니 나는 안무에 집중하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단체를 운영하며 힘들지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나에게 다시 춤을 추고 싶은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80세가 넘어갈 때쯤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평생 춤을 출 수 있고, 삶이 춤이 되고, 춤이 곧 삶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며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김형희 무용가는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그 어떤 전쟁도 이기고 헤쳐나갈 여전사 같았습니다. 춤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면도 있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일은 때로는 맞서 싸워가야 하고, 위로하고, 꿈을 심고, 희망을 퍼트리는 일이기 때문이겠죠. 앞으로도 김형희 무용가는 힘들고 소외된 많은 사람을 위해, 힘들 때 일으켜 세워주는 친구가 되어 따뜻한 손을 내밀 것입니다.
“Do you trust me?”

 

 

‘트러스트 무용단’ 김형희 단장 프로필

 

학력
1984년   부산여자대학교 무용학과 졸업
1986년  부산여자대학교 체육대학원 졸업
1989년~1994년  Erick Hawkins dance school (intensive course) 수료

주요경력
1985년~1988년  하야로비 현대무용단 창단, 초대회장 역임
1988년~1993년  부산여자대학교 무용학과 출강
1989년~1994년  제1~4회 김형희 현대무용(개인발표회) 공연 
2016년~2017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예술감독
1995년~현재  트러스트무용단 창단, 상임안무 및 대표
2014년~현재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이사 
2014년~현재  케인앤무브먼트 장애인무용단 대표 및 예술감독
2020년~현재  한국장애인무용협회 부회장 및 이사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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