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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덕업일치를 꿈꾸며

2020년 12월호(13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2. 3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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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30]

제 2의 덕업일치를 꿈꾸며

 

잘 아는 전직 포털사이트 대표님이 현직에서 물러나시고 6개월 만에 안국동에 카페를 오픈하셨습니다. 그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장소가 아닙니다. 1층엔 카페, 2층엔 젊은이들의 독서모임 장소, 3층엔 전문직이신 사모님의 사무실, 4층엔 살림집으로 계획하여 설계한 공간입니다. 평소 고서 수집을 하셨던 대표님은 1층 카페 한구석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희귀본 서적도 전시해 두셨습니다. 평소 젊은이들과 격없이 소통하시고 마인드가 젊으셨던 대표님의 제2의 삶에, 본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시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 과정이었습니다. 
몇 달 후 작은 회사의 파운더가 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회사는 스타트업을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투자자를 연결해주고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회사였습니다. 대표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내 주위엔 사회적으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신 후, 심지어 그 업계의 셀럽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셨던 분들이 퇴직 후 자기만의 일을 새로 개척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모로 나에게 자극을 주시는 분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올해로 저의 직장생활이 만 28년이 되었습니다. 28년 전 모두 취업전쟁에 뛰어들어 직장 잡기가 한창일 때 조금은 엉뚱하게도 나는 직장인이기보다는 직업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아니어도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업이 되도록 실력과 경험을 쌓으며 회사를 다니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28년을 보냈죠. 단 한 번도 회사에 나가기 싫었다거나 일이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나 자신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건 아마도 덕업일치에 가까운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업일치. 덕질(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과 직업이 일치했다는 의미입니다. 덕후 중에서도 관심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이제 “그 일이 밥 먹여 주냐”는 힐난은 옛 말이 되었죠.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빠져 그것을 아예 직업으로 삼은 이들을 보고 ‘덕업일치 했다’고 표현합니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공연, 전시를 좋아했던 제가 지금의 일을 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덕업일치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제가… 요즘 많이 흔들립니다. 주위에 덕업일치로 즐겁게 일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주52시간 근무가 일상화된 근무 환경 속에서 워라벨을 외치는 젊은 직원들에게 일의 보람, 가치 등을 주장하는 것이 구태의연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 저는 회사생활을 통틀어 가장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역시 사회생활은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사회 분위기나 직업의 가치가 바뀌는 요즘 나의 직업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직급이 높아도 나는 여전히 내 일을 통해 성장하고 싶고 발전하고 싶습니다. 익숙하고 뻔한 일들 속에서 늘 새롭게 성장 동력이 될 만한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 때로는 예상치 않은 프로젝트로 인해 작은 인사이트를 경험하면 그것이 직업에 대한 보람과 한 동안은 버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신입사원 시절엔 한없이 크게만 보이던 회사라는 조직과 까마득한 선배들을 보면서 회사만 열심히 다니면, 제 일만 열심히 하면 저절로 성장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금, 나는 새로운 30년을 준비하려 합니다. 사회활동 시기가 점점 늘고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오래 사는 것이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려면 건강과 적당한 일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는 70대까지 저만 할 수 있는 일을 준비 해야겠습니다. 어떤 일이 좋을까… 그 일은 한창 때 하던 일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에 가장 잘 했던 일과 연관되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나의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여 상대방이 그것으로 인해 앎의 기쁨을 누리고, 역시 성장해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내가 아는 문화예술 지식을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아우르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어렴풋하게나마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얻기 위해 약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필요한 책을 사고 시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머리에 떠오르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실행력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저의 희망은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입니다. 20대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금전적인 댓가보다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어른이고 싶다는 희망이 우선입니다. 빛나는 제2의 전성기 70대를 위해, 저는 지금 공부하러 갑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본부장 손미정

mirha200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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