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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3): 도스또옙스끼 기독교의 한계

2022년 3월호(14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3. 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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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도스또옙스끼 3]

 

 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3)
: 도스또옙스끼 기독교의 한계

 

2022년에 들어오면서, 전염성은 강하나 독성은 약한 것으로 평가된 오미크론 변이가 전세계적으로 우세종이 되면서, 코로나에 대한 걱정은 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긴급하게 우리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며 매일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소식은, 우크라이나로의 진격의 방향타를 결정적으로 쥐고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 장기집권자로, 러시아 젊은이들 80%의 지지를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뿌띤(1952~)입니다.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지정학적인 외통수 지역과 같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돈바스에서의 분쟁으로 인한 서유럽-미국과 러시아의 대결구도는 어제 오늘에 형성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가 더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항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


첫째, 외적으로 뿌띤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 하는 것보다, 그와 러시아인은 대체로 어떤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먼저 뿌띤은 1) 뻬떼르부르그에서 갑자기 부자가 된 전직 KGB요원으로, 2)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정치역사에서 보드카 중독에 빠진 무능한 옐친을 이어 그 어떤 민주적 절차없이 대통령이 되었으며, 3) 세계를 뒤흔들 간교한 원숭이상(예 :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거짓과 기만’이라는 두 가지 독재자의 기본적 책략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1) 러시아인들이 대체로 여성적 자기정체성을 가진 점을 이용하여, 그는 정반대로 근육질의 남성성을 온몸으로 과시하는 연극을 자주 연출하는데, 그가 벌이는 전쟁들도 그 일부입니다.

(G.Hofstede, et.al, Cultures and Organizations, 2010,143)
 2) 뿌띤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히틀러를 부러워하며 동일한 독재적 국가사회주의를 조국인 러시아에 적용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타향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죽은 이반 일린(1883~1953)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체를 2005년 10월 러시아로 옮겨오는 성대한 이장식까지 거행했습니다.(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2019,11)       


둘째, 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아에는 이런 인물의 정반대편에 서서 21세기에 이러한 정치적 판도가 일어날 것을 예언처럼 선포한 문학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러시아를 소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도스또옙스끼 자신은 한 때 아주 젊은 시절 사회주의적 이상에 물들었다가, 죽음 일보 직전에 그 환상에서 깨어나서, 진정한 답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神→人)에게서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체제 개선을 통해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현혹하지만, 인간 자체의 변화가능성은 완전히 부정하여 인간을 대상화,동물화시키는,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계급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나치))의 허구를, 그는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여기서 더 깊이 관찰하여, 정치를 비롯한 서구문화(명) 자체가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로 걸어갈 것을, 사자의 목소리(사자후)로 전 생애에 걸쳐서 쓴 문학작품들을 통해 예언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문학)평론가들은 그가 20세기 내내 소련의 극단적 통치 속에서 러시아가 지옥에서와 같은 삶을 살 것을 예언한 인물 정도로만 여긴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먼저 죽음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살았던 예수를 향해 절대적으로 의탁하여 만들어진 공동체 이외에는,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라도 실상은 사탄의 도구임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행의 정치적 경험을 하고서도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면 역사적 교훈을 받지도 새롭게 적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현 21세기 뿌띤의 행동을 러시아의 종교와 정치적 역사와 무관하게 단순한 불장난 정도로만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1) 만약 뿌띤이 그 교활한 구중궁궐의 심중에서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이반 일린처럼 히틀러의 나치와 유사한 (러시아)국가사회주의적 사상을 철저히 신봉한다면, 또 2) 만약 러시아인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매우 오랫동안 무려 1200년 내내 독재적 정치가에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번 사태는 러시아를 넘어서 전 세계사에 매우 충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한반도까지도 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중학생들조차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한 서유럽과 러시아의 충돌은 즉각 올림픽의 실패,무관심으로 코너로 몰린 중국과 시진핑에게는 기회로 비쳐질 수 있으며, 그것은 대만 사태와 함께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폭풍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만약 뿌띤의 (러시아)국가사회주의로 엄청난 광풍이 세계에 몰아친다면, 도스또옙스끼는 자기 조국에 스딸린의 소련 이후에 ‘인간이 신이 된 역사’(人→神)의 불행을 한 번 더 지적한 예언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는데,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뿌띤 뿐 아니라, 인간(독재자)이 신이 되는 비극을 이토록 처절하게 예견한 도스또옙스끼 자신이 그 인생의 후반에, 근본이 매우 부실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민중,민족)주의’를 주창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비극은 매우 역설적으로, 도스또옙스끼가 서구문화(명)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설파할 때 사용했던 자신의 종교적 확신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도스또옙스끼 종교(기독교)의 한계 

도스또옙스끼의 문학과 종교의 장점 
도스또옙스끼의 장점은 매우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입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문학은 불가능하며, 문학은 반드시 철학 내지 종교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입니다. 이 점은 러시아의 다른 문학가들이나 당대와 19세기 후반부터 일어날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한 문학가(예술가)들을 향해 명확한 경종이 됩니다. 이 사실은 그와 똘스또이를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역사 속에 낮아져서 오신 하나님인 예수를 진실로 믿었던 사람이 도스또옙스끼였습니다. 하지만 똘스또이는 현실 교회와 종교지도자의 무능과 부패에 좌절하여, 궁극적으로는 자기만의 종교(自己敎) 혹은 철학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즉 이 둘은 종교적 기초에서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문학적 깊이와 차원에서 당연히, 대학생(도스또옙스끼)과 중학생(똘스또이) 정도의 차이가 나 버립니다. 똘스또이에 비한 도스또옙스끼의 장점은 명확하고 매우 단순합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종교적 문화(명),역사비평이라는 단순명쾌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다양하고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첫째, 그는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세상의 불행(人→神)의 본질이라는 점을 확신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체에 대해 전 생애 동안 일관되게 몰입하였고, 개인 내면과 그 외부(사회)를 향해서 벌이는 모든 불행과 비극을 처절하고도 본질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소련 치하에서 노벨문학상(1970)을 받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의《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20세기 내내 일어날 러시아에서의 숨막힐 정도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100여 년 전에 예견한 듯합니다. 


둘째, 그렇지만 이런 문제의 유일무이한 해결책은,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데 있다(神→人)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이것 외에 역사적으로 제시된 모든 해결책들은 사실상 사탄의 술책에 불과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술수에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독재자들은, 사탄이 역사를 휘저을 때 쓰는 일회용 도구에 불과한 존재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가운데 인생이 그냥 스러져버린다는 겁니다.


즉 그는 눈에 띄는 것, 조직으로서의 교단, 건물로서의 예배당, 신앙고백서, 교인들의 숫자 등 따위의 외형적인 것으로 종교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종교란 각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확신으로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념,주의,주장,개똥철학 등의 넓은 의미로 정의한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넓게 정의내려야 정당합니다. 만약 종교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확신,결론 등을 신처럼 섬기는, 즉 자기교(自己敎)를 섬기는 일종의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그 거짓종교 때문에 모든 불행이 일어나며, 그것의 해결책은 진짜 종교 밖에 없음을 드러낸 거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심 즉 ‘임마누엘’(Immanu-el)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 神→人의 진리가 人→神의 불행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임을 도스또옙스끼만큼 ‘대칭적으로 그리고 절절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神→人이 이루어진 것을 기념하는 전인류의 축제인 크리스마스가, 도스또옙스끼의 해석을 따라 펼쳐졌다면, 흥청망청한 축제가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 보다 더 가까이 간 차원 높은 것이 되었을 겁니다. 神→人이 된 것은 그냥 하나님이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리고 유일하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人→神의 대반역의 역사를 뒤집기 위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스또옙스끼의 종교(기독교)의 한계 1
그렇지만 도스또옙스끼 기독교의 근본 한계를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려고 합니다 : 
 1) 그는 기독교의 본질과 그 역사가 깊고 넓은 대양처럼 얼마나 풍성하고, 다양하고, 포괄적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2) 오직 러시아의 기독교인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경험에 집요하게 머물렀습니다.  


먼저 교회역사적으로 보면, 러시아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일부일 뿐입니다. 러시아정교회의 뿌리였던 그리스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 이후 존재 기반을 상실하자, 모스끄바가 이제는 새로운 차원의 로마가 되었다는, 소위 ‘제3로마설’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이 기독교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그리스정교회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즉 정치가 교회를 지배하는 체제를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천년 이상을 유지하였는데, 이 체제를 러시아정교회는 고스란히 이어받아, 무력과 폭력으로 정권을 확보한 황제는 자신의 정통성을 옹호할 체제로 교회를 사용할 권리를 가지게 된 겁니다. 심지어 뾰또르 대제(1672~1725)이후 러시아정교회는 독자적 최고회의체제 대신, 황제가 임명한 사람들이 이룬 최고 기구인 신성종무원을 통해 황제복종적 체제를 만들어 러시아혁명(1917) 때까지 유지했습니다. 이것은 교황이 황제 위에 있던 중세의 로마교 시절이든지, 아니면 나란히 병존하는 체제를 유지한 서방기독교와는 판이한 현상이었습니다. 도스또옙스끼는 이런 기독교의 역사를 러시아에도 서유럽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눈으로 관찰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러시아정교회의 왜곡되고 타락된 현상을 비판하기는 했어도, 이 교회의 본질과 역사를 균형있게 비판할 기초를 세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방기독교와 서유럽에서는 근세 이후로 두 가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르네상스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운동’인데, 러시아에서는 이 둘 모두를, 같거나 유사한 시기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서방기독교와 서유럽에서는 이 두 가지 운동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기도, 경쟁하기도 하는 가운데, 대체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의 르네상스가 신중심주의의 종교개혁을 이기거나 극복하는 패턴을 이때까지 역사적으로 보여왔습니다.

 

도스또옙스끼가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만국박람회(1851)에 참석하고 난 뒤, 서구문화(명)에 대해 가했던 철저한 비판은 이 두 운동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차원이 있습니다. 즉 신앙고백의 차이로 싸웠던 30년의 종교전쟁(1618~1648)이후, 서구에서는 종교에 대해 관용하는 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종교는 개인과 마음의 차원으로 후퇴하거나 축소되고, 거기서 벗어난 정치,문화 등의 외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온 세상을 지배해 갔는데, 그 가운데 열렸던 것이 만국박람회였습니다. 그렇지만 만국박람회 이전의 영국에서는 교회, 특히 ‘클라팜 공동체’Clapham Community가 사회개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은 폭력이나 혁명을 사용하지 않고 매우 오랜 시간 끈질지게 차근차근히 노력한 끝에 합법적으로 국회를 통해 노예거래(무역) 폐지(1807)에 이어 노예제도 폐지(1833)를 이루었습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영국사회의 윤리와 정치문화를 개선,개혁한 발전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도스또옙스끼는 알지 못하였거나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더 근본적으로는, 로마교뿐 아니라 개신교를 포함한 서방기독교, 교회라는 조직체가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교적 패턴을 벗어날 뿐 아니라, 교회가 희생적으로 사회,문화,역사를 섬겨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물을 행복하게 만드는 통치 모습을 풍성하도록 항구적으로는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정교회는 이런 가능성 자체가 아예 없는, 즉 황제나 그 어떤 독재자가 나서도 그의 행위와 통치에 대해 비판할 교회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기독교였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정교회 자체에 소망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소망을 수동적,순종적인 농민,민중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동성과 순종성’은 기독교의 한 차원이지만, 다른 차원인 ‘능동성,적극성과 잘못된 권위에 대한 죽음을 각오한 (예언자적) 도전성’ 역시 기독교가 가진 또 다른, 어쩌면 더 중요한 차원입니다. 특히 러시아정교회 신학과 농민들의 수동성과 순종성은 신적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러시아 정교회가 황제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할 수 없는 본질적 구조 속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가운데 습관적으로 형성하여 왜곡된 종교적 태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차원에 도스또옙스끼가 소망을 둔 것은 그의 치명적 약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는 ‘르네상스’와 그 이후의 서구가 이루어낸 문화적 발전 혹은 전개를 뾰또르 대제 이전에는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최단 시간에 그것을 흡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로 군사,건축,기술 등과 같은 문화(명)의 외적인 차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에 모든 문화(명)의 근원적 차원인 종교,철학,윤리,사상 등의 발전에서는 현저하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는 파국적인 결말을 일으키는 전범국이 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서방기독교가 21세기까지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 이상적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정교회는 그 근원이었던 그리스정교회와 동일하게, 문화 전반에 긍정적이며 동시에 비판적 영향을 주는 모습으로 발전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힌 교회였던 것입니다. 

 

물론 러시아에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운동이 17세기에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서방기독교에서처럼 기독교의 본질을 조금 더 회복하는 방향으로 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로마노프 왕조가 약하게 시작할 즈음에 러시아정교회의 방향성에 대하여 그 근원이었던 그리스정교회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러시아교회가 말하는 종교개혁’이었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교도’였습니다. 이 때에 주장되었던 핵심은 서방기독교에서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덜 중요한 종교의 외적 요소인 예배의 형식이나 양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여 이때까지 러시아가 섬기는 기독교, 즉 ‘이미 러시아화된 기독교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 ‘구교도’(라스꼴)였습니다. 종교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가서 현실 종교와 문화를 변혁시키는 차원은 러시아의 종교개혁에서는 아예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또 도스또옙스끼는 죽음을 통과하는 개인적인 자신의 경험에 절대적으로 매어 달렸습니다. 그 경험은 총살형을 당할 순간에 황제의 칙령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험, 즉 죽음을 통과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바로 앞에 놓지 않고서는 매우 안일하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철저히 뒤집어 엎어버리며 새롭게 출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나에게 생명이라는 기회를 주신 높으신 분 앞에 ‘나의 생애 사용내역서’를 제출해야 할 심판대 앞에 서야할 것을 안다면, 인간은 절대신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절대겸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절대겸손해진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를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그는 그 이후에 시베리야의 유형지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러시아 전체를 통해, 아니 근현대 동서유럽을 관통해 이만큼 처절하게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 앞에 까발려 놓으면서 정직하게 다룬 문학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모든 허구가 다 보이는 것이고 이것을 다 까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 앞에서의 절대적 경험은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것이고 모든 것의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그것자체가 종교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천착을 했어야 하지만 도스또옙스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는 기독교는 그가 시베리야 유형에서 허락되었던 성경의 일부(신약)였을 뿐입니다. 그는 러시아정교회 신학이라도 근본적으로 연구할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해 그동안 기독교 역사가 이루어놓은 엄청난 연구들과 자료들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 글에서 처음에 했던 말에 돌아가 봅시다. 구원은 러시아로부터 시작되어 유럽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아시아는 러시아가 사용할 도구 정도로 보는 왜곡된 시각들은, 그가 취한 ‘러시아(민중)주의적 입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기독교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종교적 기초 작업을 한 후에 문학적 작업에 뛰어드는 순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평생 동안 몰아치는 듯이 살아가는, 그의 내적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거나 심지어 원고료를 먼저 받아놓고 마지막 시간까지 밀려가며 급박하게 글을 쓰거나, 도박이나 여인에 중독되는 중독현상까지 보인 겁니다. 이는 종교적 절대경험 이후부터 자신 안에 쌓인 삶의 태도와 심리적 경향성 등에 대한 예민한 내적투쟁에 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절대적 종교적 체험은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벼락같은 축복으로 찾아와 주신 은혜일뿐입니다. 내가 그 이후 즉각 완전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 같거나 죄의 면제를 받고 감옥에서 막 출소한 죄수와 같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 속의 모든 것을 깊이 살피고 세심하게 고치고 새롭게 해 나가는 꾸준한 과정을 거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세계의 풍성함을 이루지 못한 겁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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