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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속에 담긴 나와 이웃들의 솔직한 이야기

2022년 4월호(15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4. 2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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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속에 담긴
나와 이웃들의 솔직한 이야기

 

 

지난 호에서 다룬 소련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의 ‘피터와 늑대’(1936)가 흥미로운 스토리로 어린이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소개하는 음악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에 소개할 영국의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1913~1976)의 작품,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The Young Person’s Guide to the Orchestra; 1945), 부제로서 ‘퍼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역시 제목 그대로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는 친절하게 잘 짜여진, 아름답고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선율을 가진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을 들자면, 혁명과 전쟁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음악을 통해 다음 세대를 이어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죠. 전자의 작품이 러시아와 주변 국가들을 피로 물들인 소련 공산당 혁명의 폭력적 혁명정신을 아이들에게 계속적으로 주입시키려는(프로코피에프에 의해 어느 정도 저지되었기는 했지만) 섬뜩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후자인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고통스럽게 만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해인 1945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청소년들의 음악교육을 목적으로 만든 BBC 다큐멘터리 영화에 사용할 작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있어 물리적으로 덜 피해를 본 영국이기는 했지만, 전쟁의 치열한 상흔 속에서 이런 기획을 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합니다.

 


왜 벤자민 브리튼인가? 
뚜렷한 반전주의자로서 병역기피와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동성애자라는 논란 속에서도 브리튼에게 국가적인 차원의 중요한 작업을 의뢰한 것은 32세의 비교적 젊은 음악가를 향한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작곡가의 음악세계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오늘날의 명성을 가져다준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1945)’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1년 미국에 머물고 있던 브리튼은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조지 크램(George Crabbe, 1754~1832)의 장편시 ‘The Borough’(1810)를 읽게 됩니다. “그 시절 나는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젊은 음악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접했을 때 내게 무엇이 빠져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나에겐 뿌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음악, 그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훗날 브리튼이 했던 이 고백처럼, 그는 자신의 고향인 1830년대 영국 어촌 마을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대로 드러낸 이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시대의 아픔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합니다. ‘피터 그라임스’는 원작을 따라 당시로부터 100년 전인 19세기 초,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의 역동성을 통해 패권국가로서 우뚝 선 영국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의 모습, 종교적 위선과 파괴된 인간성을 처절하게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 레퀴엄’(1962) 속에서도 전쟁 속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병역기피와 동성애자라는 비판 속에서도 그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시대의 아픔과 비참함을 그대로 음악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죠.

왜 헨리 퍼셀인가?
이런 각도에서 오늘 다루고 있는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을 살펴본다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아름다움과 효과적인 악기 연주의 배치와 조화를 넘어 조금 더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단초가 되는 것은 바로 브리튼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박함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으며, 많은 문학작품들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브리튼의 입장이 되어 함께 상상해 볼까요? BBC로부터 작곡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무엇보다 어떤 곡을 사용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직접 작곡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쉽고 익숙한 이전 작곡가의 곡을 선택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의 곡을 선택해야 할지가 문제인데, 그는 단번에 한 인물을 생각해 냈을 것입니다. 바로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이죠. 그는 퍼셀과 같은 오페라를 만드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길 정도로 퍼셀과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곡을 연구해 왔습니다. 더구나 영국 음악 역사 속에서 퍼셀은 대륙의 나라들에 비해 걸출한 작곡가가 적었던 영국인들의 스크래치 난 자존심을 세워줄 몇 안 되는 작곡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음악의 자존심으로서의 퍼셀, 그리고 그의 명성을 이어가는 현시대의 음악가로서 자신이라는 구도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곡의 부제인‘퍼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에 나타난 대로, 퍼셀의 사랑받는 작품의 주제 선율을 사용해 멋진 곡을 탄생시킨 것이죠.

왜 아프라 벤인가?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와 문학에 해박한 브리튼이 퍼셀에 주목한 것은 단순히 그의 명성과 곡의 아름다움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브리튼이 가져온 퍼셀의 곡은 퍼셀과 같은 17세기 중반을 살아간 아주 독특한 여성 극작가인 아프라 벤(Aphra Behn, 1640~1689)의 연극, ‘무어인의 복수’(Abdelazer)에 사용할 음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희곡은 17세기 아직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제한 된 상황에서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로 활약한 아프라 벤의 작품 중 유일한 비극 작품으로서, 17세기 초 에스파냐의 왕궁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복수와 살인,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재탈환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이후, 노예와 같이 살아가던 무어인들의 반란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더 중요한 작품인 ‘오로노코(Oroonoko; 1688)’와 동일하게 역사의 뒤편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으로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 왕자의 이야기를 다룬 오로노코는 식민지와 노예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여성의 눈으로 과감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당시 영국은 노예무역이 성행했고, 네덜란드와의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점점 세계 패권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을뿐더러, 또한 명예혁명(1688)이라는 결정적인 정치적 전환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희생당하고 있는 약자들과 노예 문제를 작품 속에 등장 시킨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직한 고백과 정치적 개혁, 결정적으로 윌버포스와 클라팜 공동체의 사회참여적인 종교적 헌신을 통해 1833년 영국은 마침내 노예제도를 철폐하기에 이르죠. 이러한 배경을 살펴볼 때, 퍼셀뿐 아니라 아프라 벤의 작품세계까지 알고 있었을 브리튼은 주저함 없이 ‘무어인의 복수’에 나오는 선율을 자신의 작곡의 주제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브리튼이 자신의 음악적 결심으로 삼았던 사람냄새 풀풀 나는 나와 이웃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솔직한 이야기였던 것이죠.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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