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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요트 여행기(2)

2022년 4월호(15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4. 1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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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이야기 17]

겨울 요트 여행기(2)

 

크루들과 테스트로 요트를 몰아 바다를 나가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 엔진을 쓰는 기주만으로 4.2노트(시속 8km/h)정도. 배 바닥을 살피려 아래 고프로를 들이대니 바닥에 붙은 물풀, 따개비와 이물질들이 저항을 만들어 배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 돌아와 선장님께 배에 대해 관찰한 내용들을 말씀 드리고 막배로 위도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 크루들과 배를 본 소감들을 나누며 마음을 정했다. ‘이 배를 사서 서해를 누비자.’ 마음을 먹은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12월 초에서 1월로 요트 딜리버리가 넘어가게 되면 한겨울에 배를 옮기기 쉽지 않다. 해가 짧아져 하루에 배를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 5시까지 10시간 남짓. 시간당 5노트를 평균으로 잡으면 50마일, 약 100km 정도 운항이 가능하다. 먼 거리 항해가 불가능하고 겨울 내내 바닷바람의 추위를 견뎌야 한다. 날씨를 보니 12월 20일부터 21일까지 위도의 낮 기온이 10~13도를 가리킨다. 물때는 대사리 때라 연중 가장 물살이 빠른 때. 물때가 안 맞으면 역류를 만날 경우 속도가 나질 않아 자칫 위험한 변수가 될 수 있겠지만 속도보다 저체온증을 피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 온 크루 Marcin이 그린란드의 빙하 세일링을 다녀왔다며 보여준 사진들이 용기를 내도록 도와주었다. 빙하 옆에서도 일주일간 배에서 먹고 자며 세일링을 하는데 못할 이유가 없지. 12월의 바다 세일링은 어떨까? 호기심이 발동되었고 더 지체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크루들과 일정을 맞추고 곧바로 항해 준비에 들어갔다.

요트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그 물건들이 제 구실을 하며 잘 작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대비해 짐을 꾸린다. 핫팩류의 보온을 위한 장구, 안전조끼 등 여차하면 무어링(항구에 배를 정박시키기 위한 공간)을 하며 바다 한 가운데 닻을 내린 채 요트 선내에서 잠을 자야 하기에 한겨울용 두꺼운 침낭과 3일간 먹을 음식들까지 네 다섯 박스의 짐이 꾸려졌다. 장정 셋이서 등짐과 양손에 가득 짐을 싣고 새벽 첫 목포행 KTX에 탑승했다. 김제역에서 사촌 형의 도움을 받아 격포항까지 짐을 옮긴다. 전날까지 서해안에 내린 폭설로 서쪽과 김제의 지평선은 온통 하얀 설국으로 아름다웠다. 

새로 맞이할 배의 이름은 엘사(Elsa)라고 지었다. 배는 여성의 이름으로 짓는 것이 전통인데 모아나, 아리엘 등 개성 있고 용기 있는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의 이름으로 배 이름을 짓는 클럽 전통을 이어가는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한 겨울에 하얀 눈밭을 뚫고 배를 옮기는 상황이 어우러지며 여러 디즈니 후보들 중 겨울왕국의 엘사라는 이름을 택하게 되었다.

새벽에 김포에서 출발해 격포항까지 가는 길은 하얀 설경과 함께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일정대로만 진행되면 바다가 아니다. 겨우겨우 짐을 싣고 격포터미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매표소 주변에 술렁이고 있다. 예감이 안 좋다. 전날까지 서해에 폭설과 한파, 강풍이 몰아쳤기에 그 여파가 남아 도착 당일 격포항 모든 배들의 발이 묶였다. 소식을 듣고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했다. 모아나호를 가져올 땐 연료 문제로 첫 3일 내내 피항을 했고, 아리엘호를 데리러 올 땐 첫날 기름이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에서 좌초를 했다. 
바다를 여행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바다의 문법은 도시의 잘 짜인 시스템과는 달라 거의 모든 일정을 자연이 스스로 결정한다. 자연이 하루 쉬었다 가라니 쉬어가는 수밖에. 바다 상태를 보아 빠르면 3일, 변수가 생기면 4일 동안 배를 나른다는 예상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3일 안에 어떻게든 배를 목적지인 김포와 가장 가까운 곳들까지 날라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선택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되려 마음이 편하다. 마음을 비우니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곳엔 내가 사랑하는 크루들과 강릉에서 날아온 김선장의 가족들이 함께 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를 수소문한다. 급하게 오느라 꼼꼼히 준비 못한 바람, 날씨 등의 항해 정보들을 찾고 예쁜 카페에 앉아 SNS에 사진과 글을 남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외국의 낯선 섬들을 항해할 때 날씨로 발이 묶이면 으레 하는 행동들이다. 해가 저무니 보름달이 떠오른다. 밤에는 크루들이 생일을 챙겨주어 치킨과 케이크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내일은 배가 뜰 수 있을런지…’염려 속에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터미널에 전화를 걸고 사람을 보내 배가 뜨는지부터 확인한다. 다행히 위도를 향하는 연락선이 움직일 수 있다고 해 이른 아침부터 모든 크루들이 비상에 걸렸다. 어떻게든 빨리 배에 도착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두근대는 가슴과 함께 크루들과 터미널까지 달렸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강풍과 폭설로 일주일 만에 위도에 들어가는 차량과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선장님이 SUV 차량으로 마중을 나오셔서 차로 수월하게 짐을 날랐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착한 엘사호. 12월 대사리와 강한 북서풍을 관통하는 한 겨울 항해가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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