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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2022년 5월호(15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6. 1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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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의정부 민락동 노을

 

무진에는 안개가 명물이듯 파주에는 노을이 명물이다. 야간자율학습이 고되어도 저녁을 일찍 먹고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장엄한 노을은 가없는 위로였다. 하늘 가득 불타오르는 가운데 잿빛구름마저 노을 덕분에 불씨를 품은 듯 발갛던 그 하늘! 
스탠드에 앉아 김초희 시인의 ‘사랑굿’을 읽고 친구와 흠모하던 선생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노을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여행지에서는 늘 낙조시간을 기다렸다. 파리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개선문에 올라 에펠탑, 라데팡스로 이어지는 방사선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밤에 시간을 넘기기 전 황금빛으로 따스하게 얼굴을 비추던 노을! 달팽이 계단을 끝없이 올라 마침내 마주한 광경! 누군가는 기다리기 지쳐 벽에 낙서도 해놨다. 놀이동산 한편에 누구누구 왔다가다를 빽빽하게 써놓듯, 이곳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한글도 보인다. 낙서는 본능인가보다.
미얀마 우베인 다리의 노을도 떠오른다. 서쪽만 붉은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붉었던 하늘. 저 멀리 아이들은 염소와 노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 맥주를 기울였다. 이 하나를 위해 양곤, 인레, 만달레이를 거쳐 찾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주 ‘백약이오름’의 노을도 생각난다. 분화구 가장자리의 억새와 마른 풀에 석양이 비추면 일제히 황금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모델이다.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도 꽃처럼 피어난다. 물론 사진작가는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카메라 다리를 세워놓고 최초의 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아마추어도, 프로도, 열 손가락이 모두 엄지손가락이나 되는 듯 기교를 부리지 못하는 막손에게도, 백약이 석양은 공평하게 아름답다.

필리핀의 석양도 일품이다. 마닐라 베이는 리잘 파크를 거닐다가 정겹게 만나는 해변이다. 바다를 보려면 동해나 서해로 몇 시간씩 달려가거나,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가야 만나는 바다와 달리, 도시에서 늘 만날 수 있다. 둑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기 어느 유람선을 타고 2박 3일을 가면 보라카이도 가고, 팔라완도 간다는 말에 비행기표 대신 배표를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지던 날들.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전철을 타고 보니파시오로 돌아올 때 느꼈던 서늘함. 
이방인에게 마닐라는 아름답고도 두려운 도시였다. 

우리 동네 민락동, 고산동도 노을이 아름답다. 느닷없이 펼쳐지는 노을에 환호성이 절로 난다. 아파트도 많지만 논들도 많다. 무논에 드리운 노을빛은 화톳불처럼 빛난다. 차를 몰다가도 길가에 세워 노을을 찍고, 길 가다 말고 카메라를 꺼내 하늘을 찍은 뒤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다.
노을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하늘을 물들이지만 눈길을 주지 않으면 포착할 수 없다. 나이를 먹고 가장 애석한 일은 감정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축복을 온 마음에 담을‘감정’만큼은 꼭 지니고 살자.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지상에 대한 사랑이니.

 

의정부시 효자고 교사 박희정
hwson5@hanmail.net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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