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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문화에서 해양문화로의 결정적인 전환을 이룬 두 해전,레판토해전(1571)과 칼레해전(1588)

2022년 10월호(15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 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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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문화에서 해양문화로의 결정적인 전환을 이룬 두 해전,
레판토해전(1571)과 칼레해전(1588)

 

21세기 초인 지금 해양문화의 미국과 대륙문화의 중국은 서로 매우 치열한 패권 다툼을 하는 중입니다. 이 투쟁 이전에 대륙문화에서 해양문화로 그 패권이 이동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번의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레판토해전’과‘칼레해전’입니다. 첫째인‘레판토해전’은 1570년 7월 오스만 셀림 2세가 베네치아 속령인 키프로스 섬을 침공하자, 해양국가들로 구성된 신성동맹 함대와 대륙국가인 오스만 터키가 해상에서 벌인 전투입니다. 오스만이 참패한 결과, 해양세력은 오스만의 침략 위험으로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을 보호할 수 있었고, 육상에 이어 해상에서의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려고 서진하는 대륙세력인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인‘칼레해전’은 스페인이 영국을 로마교 국가로 되돌리고, 스페인의 상선에 대한 노략질을 막기 위해 대규모 함대(아르마다)를 편성해 영국해협에서 벌인 전쟁입니다. 이 해전에서 패한 스페인은 점차 패권을 잃게 되었고, 반면에 승리한 영국은 새로운 해양강국으로 발전할 매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 두 해전을 자세히 비교 분석하면서, 21세기에 큰 바다인 해양뿐 아니라, 더욱더 큰 광활한 바다인 우주에 최우선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보려 합니다. 이를 위해 각 전투를 가능하게 했던 국가들의 총체적 체계를 먼저 비교하고, 이런 국가들이 전투를 치른 세부적 방식을 비교하여 승리의 원인을 찾아보려 합니다.

1.노선시대에 치러진‘레판토 해전’ 
1)국가체제의 비교
①오스만 제국의 국가체제
오스만은 전제군주제로 셀림 2세 이전의 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 때 국력이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확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교로서 일신교인 이슬람종교는 정치체제로서 단일 통치자에 의해 지배되는 전제군주제가 서로 잘 맞는 구도였습니다. 쉴레이만은 훌륭한 군사적 성공을 거둔 것 외에도, 전제군주정을 차츰 완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쉴레이만 사후, 전쟁터에서 군주가 앞장서 출정하는 일도 없어졌고, 정치도 거의 재상이 처리했습니다. 군사구조에 있어선 대포로 무장한 포병인, 일종의 용병과 같은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상비군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국민 자체가 아닌 전투전문집단인 예니체리의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함으로써 유지비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전통적 기병인 시파히 계층은 점차 몰락해 갔습니다. 이후 오스만의 주 활동 무대인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 무역이 크게 번성하면서 오스만의 무역이익도 점차 줄어들어 재정도 어려워졌으며, 18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졌고 20세기 초에 와서는‘동양의 병자’라는 병명까지 얻을 정도로 몰락해 버렸습니다. 


②신성동맹의 국가체제
신성동맹은 교황 비오 5세와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로마교 해상 국가들이 포함되어 조직된 동맹입니다. 동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로 1571년 5월 25일 공식적으로 선포한 동맹으로, 참가국은 교황령,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스페인, 나폴리, 시칠리아, 베네치아, 제노바, 토스카나, 사보이, 파르마 공국 그리고 몰타기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의 종교는 한 하나님이 아닌 삼위 하나님을 믿는 삼위일체적 기독교 중의 로마교였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이런 다중 중심적 요소와 함께, 하나의 중심국가가 아닌 지중해 전 영역에 동서로 길게 늘어선 다양한 (도시)국가와 연합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레판토해전에서 오스만을 상대로 승리를 얻은 후, 1573년 평화조약에 서명하면서 동맹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습니다.

레판토해전 오스만과 신성동맹의 백병전, 출처:thewiki.kr


2)해전의 비교
오스만은‘알리 파샤’지휘 아래 갤리선 229척, 소형 함선 60척으로 총 289척, 군사력은 병사 3만 4,000명, 선원 1만 3,000명 및 노수 4만 1,000명으로 기독교 측보다 약간 우세했지만, 대포는 758문에 불과했습니다. 신성동맹은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인‘돈 존’의 지휘 아래 갤리선 209척, 갈레아스 6척, 갈레온 26척, 브라간틴과 프리기트 76척 등 총 316척이었으며, 보병 2만 8,000명, 선원 1만 2,900명, 노수 4만 3,500명, 그리고 대포 1,815문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전투는 해상전 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방식을 따라 적의 함선에 올라가 땅에서 싸우듯 지상 전투를 방불케 하는 백병전으로 싸웠습니다. 결정적 차이는 결국 함포 수에 있었습니다. 키가 높은 갈레아스선 6척이 사방으로 포를 쏘며 다가가면, 오스만 함선은 접근해 백병전을 시도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습니다. 오스만은 신성동맹 연합함대 갈레아스선의 포격에 압도당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지휘관이 전사하자 일대 혼란에 빠진 것인데, 전투 중 지휘관 부재 시 부지휘관제가 사전에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신성동맹은 해전 지휘에 있어 돈 존이 탁월한 지휘능력을 보여줬는데, 여러 해양국가가 모여 서로 반목하기 쉬운 병사들을 전대별로 혼합해 전투 편성을 함으로 출신국 별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단합과 협조를 발휘하게 했습니다. 

2. 범선시대에 치러진‘칼레해전’
1)국가체제의 비교
①스페인의 국가체제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최전성기 시절의 군왕으로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왕이었습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아버지 시절 기틀이 잡힌 부왕령제도나 전문 행정 관료 육성 계획을 통해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유지할 정부 부처 내각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로마교 세계 전체를 강타하던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 과정에 적극 참여해 여기서 나온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 로마교 세계 전반에서 스페인의 정치, 군사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 또한 확립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아라곤 왕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총독을 파견해 제국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중앙 집권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는 로마교를 통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했고, 본인 또한 신심이 깊은 로마교인이었습니다. 반면 개신교와 이슬람,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탄압해 나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상인, 기술자 등을 종교의 이름으로 내어 쫓아 나라의 부를 스스로 차버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②영국의 국가체제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시기로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의심해보고 또 결정을 재촉하는 추밀원 사이에 균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는 성실청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통해 통제했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 정치를 했습니다. 1년에 두 번 나라를 순시하면서 민중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입니다. 종교는 아버지 헨리 8세의 반(反)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수장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교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여 설립한 영국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2)해전의 비교
스페인은 메디나 공의 지휘 아래 총 130척의 함선으로 병력은 28,000명, 대포는 2,431문으로 ‘근거리와 중거리’포에 중점을 두었고, 육군 포병이 해전에서도 임무를 수행하여 배 안에서‘포의 숙련도’에 있어서도 영국에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의 파르마공의 육군과 합세해 영국을 침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자체가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통신체계’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전 경험이 풍부한 산타크루즈 제독이 무적함대가 출동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전쟁의 경험이 부족한 메디나 공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대사령관으로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했고, 해전에서의 중요한 요충지를 선점하지 못했으며, 출항 후 함대에 ‘군수보급체제’도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스페인 함선은 선원을 지휘하는 선장과 승선전투원을 지휘하는 대장이 달라 배를 탄 인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은 레판토 때의 전술인 백병전을 그대로 사용하고자‘횡렬진’을 이용했는데, 이는 주위 해양국가의 변화 움직임을 미리 읽지 못한 것으로, 패전의 핵심요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해군참모총장 하워드, 부사령관 드레이크, 해군소장 존 호킨스와 프로비셔의 지휘 아래 총 197척의 함선을 애초부터 전투함으로 건조해 함수와 함미에 누각을 없애고 현 측에 다량의 포를 설치했습니다. 병력은 15,000명으로 1,600문의 포를 적재하고 특히 ‘장거리포’에 중점을 두었으며‘포의 성능과 포 요원의 경험’도 스페인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의‘함포 사격속도’는 스페인보다 무려 3~4배 빨랐습니다. 범선 전투 함대를 건설한 헨리 8세에 이어 엘리자베스 1세는 전투 함대를 더욱 발전시켰고, 통일된 지휘 아래 ‘종렬진’의 전투 진형과 신속한 전술 신호를 개발하며 이를 꾸준히 적용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영국함대는 적선에 전선끼리의 접근전과 백병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함포로 승리를 결정짓도록 했다는 것인데, 이 전술은 임진왜란 당시의 배들을 접근시킨 백병전을 선호한 왜군에 비해 일관된 진을 형성하여(학익진, 장사진, 일자진) 함포로 승부하도록 한 이순신의 전법과 매우 유사합니다. 또 영국해협에서 싸우는 홈그라운드 이점을 이용해 최대한의 효율적인 군수물자 보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영국은‘심리전’을 이용했는데 8척의 ‘화공선’공격을 하여 스페인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선 기술자 지암벨리를 고용했다고 선전함으로써 스페인군을 불안케 만들었는데, 화선이 접근하자 공포감에 사로잡힌 많은 무적함대의 함장들이 급히 닻줄을 자르고 불길을 피하려고 도피함에 따라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칼레해전 영국군의 포 사용, 출처: historiamilitarefemerides.wordpress.com


이 두 전투를 계기로 지난 5백여 년 동안 해양문화권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은 일신교인 이슬람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 대륙 문화적인, 즉 왕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동양식 전제군주정으로 오랫동안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탁월한 왕이 항상 나올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치러진 레판토해전에서, 여러 사람과 세력(도시국가)들의 집단 지성의 장점을 갖춘 지중해 서편의 신성동맹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또 전제군주전적 요소와 교황중심주의의 로마교적 전통과 함께 대륙문화적인 요소를 여전히 지닌 스페인은 칼레전투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협력이라는 개신교 정치 연합체와 해양문화의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특성 가운데 개발한 전투 방식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한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단순히 군사적, 기술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그 국가의 정치체제나 실용적 태도와 종교적 성향에 의해서 더 많이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편집장 김미경
hasun2001@hanmail.net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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