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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그 해전에서 그 전술과 그 진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나?

2022년 10월호(15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 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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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그 해전에서 그 전술과 그 진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나?


이순신 장군은 3대 해전(한산도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각기 다른, 그 상황에 딱 맞는 전술과 진법으로 백전백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순신은 해전의 전술과 진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해전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을 이길 수 있도록 최선으로 배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전에서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육전의 경우 진법이 안 통할 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면 됩니다. 이에 반해 해전은 도망칠 수가 없고 그 자리에서 너희 죽고 우리 살든, 우리 죽고 너희 살든 어느 한 쪽은 다 죽어야 합니다. 이순신은 수많은 고뇌 속에서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땅의 지형 뿐 아니라 바다의 지형, 바람, 조류, 그리고 바람과 조류의 세기 및 시간, 병기의 차이를 비롯하여 먼 바다와 섬과의 거리, 적과의 거리, 화포의 거리를 계산하는 산학, 그리고 적과 나의 심리를 알고 각기 다른 해전의 상황에 딱 맞게 그것들을 통제하고 이용하였습니다.

고뇌하는 이순신 상, 출처: News in 전남


첫째, 각 해전에서 공간을 최적으로 이용한 전법, 시간을 최선으로 이용한 전술을 썼습니다.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은 좁은 바다에서 넓은 한산도 앞 바다로 적을 유인해 일망타진하는‘학익진’을 선택하였습니다. 견내량이라는 지역이 포구가 좁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위험이 있었고, 적이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후 학의 날개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전투 대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적의 함대가 날개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기다렸다가 화포를 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적이 바로 앞까지 오는 때, 즉 적이 나를 향해 코앞까지 달려드는 것에 요동하지 않고 공격할 정확한 때를 전군이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명량해전은 이와는 반대로 넓은 바다에서 좁은 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일자진’을 펼쳐 적을 막아서는 진법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울돌목’이라는 독특한 장소의 특성을 이용하여 적들을 그곳으로 유인했습니다. 울돌목이라는 지형은 암초가 많고, 물살이 세기 때문에 속도전에 빠르지만 바닥의 깊이가 깊은 왜군의 V자형 첨저선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의 깊이가 깊어 암초에 부딪칠 수 있으며, 물살의 세기 때문에 배를 선회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신의 한 수가 된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는 때(밀물-북서류에서 썰물-동남류로)를 이용한 것입니다. 당시 왜군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12시 30분 경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면서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바다물을 이용한 조선 수군의 총격으로 좁은 해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로 부딪쳐 충파되고, 결국 참패하게 됩니다. 10배가 넘는 함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울돌목이라는 공간과 조류가 바뀌는 시간을 기막히게 이용해 승리로 이끈 해전입니다.
노량해전은 퇴각하는 일본전선의 길목인 노량수로라는 장소를 선택하여, 시간적으로는 왜군의 지원군이 오기 전 조선수군이 먼저 도착하여 기습을 한 것이 관건이 되었습니다. 전장의 장소를 중간지점인 묘도를 선택했더라면 좌우 양쪽에서 일본수군의 협격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진법이 아니라 근접하여 총공격을 가한 것이 특징입니다. 총공격을 가할 때, 이순신은 겨울철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였습니다. 노량해전 당시 북서풍이 강하게 부는 겨울철을 맞이하여 풍상(風上) 쪽을 선점함으로써‘화공전’을 펼치는 데 유리한 위치인 동남쪽을 확보하였습니다. 바람을 예측한 공간의 확보로 포와 화살은 쏘지도 않고 불뭉치 만을 왜군의 전선에 던져 2백여 척을 소각시켰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량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놀라 도망가는 일본군이 관음포로 들어가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관음포는 포구가 깊숙하여 외해와 연결된 곳으로 착각 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이순신의 예측대로 일본군은 포구 깊숙한 막다른 곳까지 갔다가 퇴로를 찾아 입구 쪽으로 되돌아 나옵니다. 관음포구 입구 부근 일본 군선들이 몰려나오는 그 때 조선 수군의 화포공격에 좋은 표적이 됩니다. 이순신이 시간적으로 조선수군을 노량수 좌단으로 미리 선제 기동한 것과 관음포라는 공간을 이용, 격전지를 조성한 것은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탁월한 전술입니다.

둘째, 적군과 아군 모두의 심리를 완벽히 이용하고 조련할 줄 알았습니다.
이순신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아군의 심리 뿐 아니라 적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용하고 각 해전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딱 맞게 통제하였습니다. 그 결과 23전 23승이라는 전적을 기록하였습니다.
한산도해전에서는 당시 육전에서 일본군이 크게 이기고 있는 가운데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과감하게 들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과감한 심리를 이용해 6척의 배로 아군을 얕잡아 보도록 했고, 어렵지 않게 학익진을 펼칠 넓은 바다로 유인했습니다. 아군은 화포의 적중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학익진 진형을 유지해야 하는 긴장과 코앞까지 왜군의 포와 조총의 공격이 가까이 오는 불안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이순신은“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태산처럼 움직이라(勿令妄動 靜重如山물령망동 정중여산)”고 명하며 아군의 심리를 통제하는데 성공합니다.
명량해전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바다의 주도권을 잃은 상황이었습니다. 병사들 속에 퍼진 두려움과 공포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순신은“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는 엄준한 선포로 아군의 두려움을 통제하였습니다. 왜군은 조선함선의 숫적 열세와 거북선이 한 척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껏 거만해져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그러한 적군의 심리를 알고, 백성들의 배를 열 지어 놓고, 전선 근처 육지에서 강강수월래 등을 부르게 하는 위장전술을 펼쳐 적을 위협하는 한편, 거북선의 두려움이 적에게 아직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조선의 판옥선으로 충파를 과감하게 구사함으로서 그들의 두려움을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은 빨리 전장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군에게 쫓기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왜구를 한 놈도 살리지 말라고 하는 각오를 모든 조선군에게 알려 결사적으로 전장에 임하도록 했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에서도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는 말로 조선군의 심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과 일본의 무기체계의 차이를 선명하게 알고, 그 차이에 따라 전술을 달리 하였습니다.
조선의 경우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사용한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판옥선을 주력전선으로 하여 전면에서 포를 쏘고,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빠르게 적군의 진 안으로 들어가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두 가지를 나눈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배로 빠르게 달려와 적군의 배에 접근시켜 뛰어 올라오는 백병전을 치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평저선은 바닥이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이 넓어서 배의 직진 능력이 좋지는 않지만,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했고, 갑작스런 썰물에도 뒤집힐 위험이 없었습니다. 또한 화포를 발사할 때 반동의 흡수가 용이 하였습니다. 판옥선에 사용한 소나무는 일본 배의 삼나무나 전나무 보다 단단했고, 일본수군은 쇠 못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판옥선은 나무못을 사용하여 물을 먹으면 팽창하여 결합부위가 단단해져 당파(충파)전술을 구사할 때 더 유리하였습니다. 판옥선의 높이가 높아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튼튼한 판옥으로 노꾼과 사부를 보호하여 전투에 안전하게 임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내부가 넓어 4~6명이 커다란 노를 저어 작은 노를 젓는 일보 수군보다 효율적이었습니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습니다. 이순신은 이러한 우리의 함선과 적군의 함선의 기능과 성능을 정확히 알고 각 해전에서 그 상황에 딱 필요한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그 다음 주력 무기로 우리는 천자총통과 화살을 사용했고, 왜군은 조총을 사용했습니다. 천자총통은 강력하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쏴서 배를 박살내는 전술이기 때문에 정확히 들어맞기만 하면 아군의 피해를 월등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왜군의 조총은 멀리서도 쏘지만 개별적인 공격을 하는 전법으로 상대의 배에 갈고리를 걸고 올라와 백병전을 했습니다. 이순신은 개별전이 아닌 포 사격이 굉장히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준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나와 적의 모든 것을 꿰뚫고, 무기와 진법 및 전술의 혁신을 거듭하며 각 해전마다 그 해전에 필요한 전략을 창의적으로 구사했습니다. 이순신과 나의 시대는 500년에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나는데,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우주시대에 필요한 혁신을 창의적으로 구사하고 있는지 반문해 봅니다.

중국어 통번역사 김송희
zulu7909@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6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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