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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한옥집’ 임수진 작가를 만나다

2022년 11월호(15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2. 1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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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안녕, 나의 한옥집’
임수진 작가를 만나다

사랑채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면 밝은 햇살 아래 너른 땅이 펼쳐지고, 사랑스럽고 풍성한 갖가지 푸성귀와 야채,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한옥집 남새밭이다.

 

공주 한옥에 살았던 소중한 기억들, 구슬로 엮어 책으로!
공주에서 자란 저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접하며 이문구의《관촌수필》, 이미륵의《압록강은 흐른다》등의 소설들을 읽으면 항상 제 어린 시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이것 못지않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린 시절을 담은 소설들《작은아씨들》과《빨간 머리 앤》처럼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어릴 적 시간들을 담아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저의 글재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 코로나를 겪으며 2020년 10월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반응이 즉각적이었죠. 신기하더라고요. 누가 내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가질까 했거든요. 첫 번째 스토리는 한옥에 살 때의 뒷간(화장실)경험 이야기였어요. ‘그 시절 그 공간에 가 있는 것 같다’ 등의 블로그 이웃들의 댓글이 이어지면서 그 반응에 힘입어 계속 글을 쓰게 되었죠. 이런 향수가 저 말고도 많은 분들에게 있더라고요. 10회 글을 마무리 할 때 즈음, 입소문을 타고 ‘한옥일기 이야기’ 를 연재하는 제‘밤호수’블로그에 한 출판사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며 책을 내보자 하더군요. 그래서《안녕, 나의 한옥집》이 2021년 11월에 탄생되었답니다. 


엄마에게서 딸 셋, 시 ·서·화 재능을 골고루 물려받다
아버지는 예술과는 완전 거리가 먼 분이셨죠. 공주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운수업 운영을 하셨는데, 생각이 자유로운 분이셨어요. 반면 엄마는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시·서·화에 다 능하신 분이었죠. 그것을 사이좋게 하나씩, 큰 딸은 그림, 둘째는 서예를 잘 썼고, 막내인 제가 글쓰기를 물려받았어요. 현재에도 시를 쓰는 엄마와 제가 글로 만날 수 있어 제일 잘 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만큼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공주 시내 최초‘오토바이 타는 여자’, 울 엄마
저희 엄마는 시·서·화만 능한 게 아니었어요. 울트라 슈퍼맘이었죠. 시댁 어른 모시고, 남편 내조하고, 학교 근무에, 딸 셋 양육에, 공주 한옥집으로 적든 많든 매번 모이는 손님들 대접에… 이런 엄마에게 정말 필요한 건 기동성이었죠. 어느 날 아빠가 오토바이를 구입해 엄마에게 타보라며 가져다 주셨어요. 그 당시 공주에서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그런 시절이었죠. 할머니는 깜짝 놀라 극구 반대를 하셨지만, 저희 엄마는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접고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가정 선생님이었던지라 원피스, 스카프도 직접 만드셨어요. 본인이 만든 옷을 장착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집으로, 학교로, 시장으로 공주 시내를 달리셨죠. 아침이면 원피스를 휘날리며 하얀 모자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엄마의 모습은 공주시내 명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오토바이 가게에서 고맙다며 추석에 갈비를 보내왔으니까요. 이렇게 엄마는 한옥집 안주인이자 강인한 세 딸의 엄마로 모든 삶의 무게를 싣고 오토바이와 함께 달리셨죠. 전 엄마의 오토바이를 한 번 타면 내릴 수 없는 삶의 무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희 세 자매는 모이면 매번 엄마 이야기를 한답니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없다고!  

오프라인과의 만남, 감동적인 북토크
올해 뜨거운 7월의 여름날,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해 블로그 이웃님들이 준비해준 북토크를 서울 북촌, 부산, 대구, 전주, 공주 등에서 진행했답니다. 상상과 글로 창조해낸 블로그의 꿈의 마을에서 만났던 분들을 오프라인을 통해 처음으로 만난 것이죠.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저에게는 고국을 방문하는 의미도 컸어요. 북촌에서 첫 모임 할 때 서로서로 만나 너무 좋아하고, 얘기하며 껴안는 분위기였어요. 책 이야기는 사실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해서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서로 공감하는 눈빛, 제스처 등을 보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70대의 블로그 이웃님께서 그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셨던 것이죠. 블로그 마을 (블로그로 글을 쓰는 이들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마을)에서 잃어버린 꿈을 찾으셨다고요. 


글 샘이 마를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원동력
저는 스스로를 ‘그리움의 작가’ 라고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너무 그리운 게 많아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어린 시절이 항상 그립고, 남들보다 더 옛날 생각을 많이 하고… 그래서 언니들은 “너는 왜 옛날이야기들,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냐?” 고 핀잔을 준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언니들은 더 오래 살았는데 저보다 기억을 못합니다. 그래서‘나는 특이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니 이런 그리움들을 글로 쓰며 버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주 흐릿한 흑백사진 한 장으로 글쓰기 출발
블로그 마을, 에세이 강의 수업을 하며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죠. 이분들을 보면 자신 안에 이야기가 많고, 하나하나 다 귀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분들에게 글 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하나같이“뭘 써야 하냐?”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해요. 그러면 저는 답을 하죠. 우리 안에 두 시간짜리 영화 필름이 있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흐릿한 흑백사진 한 장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거라고. 흑백사진은 그냥 사람하나만 덩그러니 있지만, 들여다볼수록 옆에 나뭇잎과 나무도 있고 그 옆에 여러 친구들도 있고… 정말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기억이 나는 거라고. 이런 것을 자기 안에서 꺼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닌, 내 자신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글이 되고 의미가 생기는 거죠. 자신의 힘으로 표현할 때 그 가치가 훨씬 빛을 발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치유를 받습니다. 글의 힘이죠. 

미국에서 살아남기!!
30대 초반에 가서 지금은 40대 중반이 되었네요. 물론 남편의 직업 때문에 가게 되었죠. 미국에서 살며 처음에는 집안일과 육아만을 전담했는데, 저희 남편은 동양의 이름 모를 의대를 나와 영어 한마디 못하는 동양인 의사로, 고생을 말도 못하게 했고,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그럴 때마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시설이 낙후되어 쓰러질 것 같은 기숙사에서 살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한국에서 교사로 휴직을 반복하다 아예 그만두게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비록 남편은 한국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갔지만, 점차 돈도 없고, 너무 스트레스 받아 쓰러지고, 머리를 빡빡 밀고 힘을 내어 다시 일어서고… 말도 못하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한국에 있을 때 내가 되게 겸손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내가 참 교만한 사람인 걸 알았다”라고. 저희 부부가 한국에 있었다면 둘 다 잘 살았겠죠. 항상 겸손한 척하며 말이죠. 하지만 극한 상황으로 내 몰리니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올라오더라고요. 저희 부부 둘 다 서로 깎아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2세대 아들을 통해 본 미국 문화, 나와는 천지차이
솔직히 지금도 굉장히 고군분투 하고 있는데요. 겉에서 보는 미국문화와 제 아들이 미국사람으로 자라면서 아이를 통해 보는 미국문화와는 너무 달랐어요. 백인들과 어울리며 파티를 즐기는 아들에게 한국사람, 미국사람으로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충실할 뿐이죠. 우리는 유교사상이 아직 남아있고,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너무 흔하고, 친구들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을 즐기는(중독이라고 생각지 않음) 문화 속에,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저에게 미국문화가 새로 정립되는 것 같았어요. 저와 남편은 뼛속까지 동양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동안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던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20대를 옷으로 나를 치장하기 위해 돈과 에너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는데, 30대를 넘어가며 미국에 있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남의 눈을 의식해 꾸미는 시간과 돈을 쓰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게 너무 편했어요. 그러면서 더 많은 책을 읽게 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보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었죠. 내 껍질이 벗겨지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선언했죠. 상징적인 의미로서 ‘내 인생에 명품백은 없다’ 라고요. 명품 같은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로 말이죠.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남의 눈이잖아요. 한국에 있었다면 계속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았을 것 같아요. 

그때 그 책들, ‘중앙서림’ 이야기
이민 와서 사는 삶의 가장 슬픈 점을 꼽으라면, 한글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서점과 도서관의 향기를 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름다운 글로 쓰인 책이 가득한, 책 냄새와 활자 냄새가 나를 끌어당기는 책방이 그립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기로 공주 한옥집에서 살 때 제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중앙서림’ 이었어요. 그 주인 아주머니는 엄마랑 같이 공주여중에 근무하셨던 국어선생님이셨죠. 그분은 나에게 제일 부러운 분이셨어요. 그곳을 거의 매일 드나들면서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길 좋아하는 습관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어린 나에게 책방의 아름다움과 꿈의 세계를 맘껏 열어주신 책방아줌마. 몇 년 전 중앙서림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엄마를 통해 들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저에게는 언제나 마음씨 좋은 중앙서림 아줌마인거죠.

 

우리들의 향기가 사라진 집. 우리들의 시절이 지나가버린 집. 그러나 여전히 그리운 그 집


생명의 탄생, 결혼, 죽음을 겪은 집, ‘온전한 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빨간 머리 앤》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어느 나이든 목사님이 그랬죠. 생명의 탄생, 결혼, 그리고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은 온전한 집이라 할 수 없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공주 나의 한옥집은 ‘집’ 의 ‘집됨’ 을 완성했다고 봐요. 집도 사람처럼 생의 초기-중기-후기가 있는 것 아닐까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1930년대, 수원지 옆의 크고 좋은 나무를 베어 2년여에 걸쳐 정성스레 지은 집. 나무 하나하나를 바람에 말려 대패질하고 기왓장 하나도 허투루 올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1950년 6.25 발발로 집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도 한옥집은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요. 바로 그 한옥에서 많은 탄생이 있었고, 할아버지의 죽음, 결혼들이 있었고, 우리 가족 이야기 뿐 아니라 사랑채와 별채를 드나드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까지 수많은 사연과 인생이 품어져 집됨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래서《안녕 나의 한옥집》에는 옛 시절의 이야기도 있지만, 실재하는 세계 사이사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유년의 환상과 한옥집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종적 횡적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한옥집을 둘러싼 마을 이야기들을 확대해 펼쳐놓았죠. 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나는 몹시도 멀리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추억이 되어 저를 더 가깝게 합니다. 나의 마음 중 가장 애틋한 마음 하나는 저 먼 곳, 먼 시간에 두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나의 고향 공주, 지붕이 곱던 한옥집이 있는 그곳에 말이죠. 

《오토바이 타는 여자》책 발간
저는 사실 계획도 없고 목표가 없는 사람이에요. 자기계발을 못하는 사람으로, 굉장히 성격이 즉흥적이고 싫어하면 못하고, 재미있으면 목숨 걸고 하는 그런 스타일이죠. 하지만 항상 꿈을 꾸고 상상을 해요. 한국에서 5년 동안 국어교사를 하며 수업도 똑같은 수업, 재미없는 수업은 제가 못 견딜 정도여서 매번 수업시간에 창의성을 뿜어내려 했던 것 같아요. 목표보다는 늘 그때그때 열정이 닿는 일을 해요. 이런 제가 올해 11월에 책 한권을 발간한답니다. 바로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오토바이 타는 여자》라는 제목으로요. 

 

 


두고 온 삶을 뒤로 하고 이방인의 삶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저 이대로도 괜찮다 싶던 어느 날, 병이 도졌어요. 가슴이 먹먹한 병, 그리운 게 많아 죽을 것 같은 병, 보고픈 이들이 많아서 터질 것 같은 병. 하지만 코로나로 오도 가도 못하고 만날 수도 없는 이 먼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고. 그리고 글을 써야한다면 반드시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친구, 나의 한옥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라고 말하는 진심을 임수진 작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넘게 한국에서의 일정을 소화해내며 처음으로 체력도, 마음도 다운되어 갈 때 즈음 어떻게 하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곧 8월 초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시점에 시간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도리어 고맙다고 하더군요. 모쪼록, 임수진 작가의 밤호수 블로그가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과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통로가 되길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밤호수 블로그
blog.naver.com/moonlake523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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