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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서예 영업사원 캘리그라퍼 ‘김도임’ 작가

2023년 3월호(16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1. 1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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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나는야! 서예 영업사원 캘리그라퍼 ‘김도임’ 작가

 

어린 시절 유독 잡생각이 많았던 아이
저는 어렸을 때 너무 생각이 많아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죠. 그냥 ‘나는 이런 애인가 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말로는 제가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해요. 바로 위의 언니는 그림을 그릴 때 선을 찔끔 찔금 그렸던 반면, 저는 과감하게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엄마도 미술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엄마는 잡생각이 많은 저에게 도움이 되도록 피아노, 그림, 서예 등을 하게 하셨죠.

10살, 서예에 완전 빠지다
10살 때 즈음 서예학원을 처음 갔는데 이때 완전 서예에 빠져버렸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저였지만, 서예를 할 때는 잡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화선지에 먹이 번지고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니까요. 완전 글쓰기에만 집중을 해야 했는데, 그래서 더 빠져들게 된 것 같기도 해요. 피아노 학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피아노는 30분 정도 뚱땅거리고 도망치듯 서예학원으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서예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글씨를 쓰며, 아예 살다시피 했습니다. 소극적이었던 제가 서예를 하며 칭찬을 받고 대회에 나가 상도 타니 자신감이 생겨 저에게 긍정적인 선순환이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 내가 서예를 잘하나’하는 생각에 더 열심을 낼 수 있었죠. 그렇게 시작한 서예가 어언 30년이 되었네요.

맞으면서 그림공부? NO!!
중학교에 들어가며 서예로 전공은 못하니, 부모님께서 “너는 글씨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니 미술 전공을 하는 게 어떠냐”며 미술학원을 다니라고 하셨어요. 미술입시학원을 갔는데 입시생 언니, 오빠들이 맞아가며 배우고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데생을 4시간 안에 100% 완성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그리지 못하면 매를 맞는 거였죠. 물론 입시는 경쟁이니 스파르타식으로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리 맞으면서 그림을 그리기는 싫더라고요. 무엇보다 그림자체가 싫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 이후 일반대학으로 진학했지만,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고 계속 취미로 하며 공모전에도 나갔어요. 사실 취미를 격하게 하니(웃음) 선생님이 “넌 계속 서예를 해도 될 것 같은데…” 하셨죠. 마침내 2007년 서예로 대학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서예로 병을 이겨내다
어렸을 때부터 아팠는데 왜 그런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 21살 때에‘베체트’라는 면역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베체트는 아주 애매한 병이에요. 죽을병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사회생활을 못할 병도 아니죠. 하지만, 약 부작용이 있거나 실제로 몸이 좋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웃긴 게 그냥 누워있으면 병자고, 나가면 말짱한!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피곤할 때 입안이 헐게 되는데 구멍이 20개씩 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력으로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는 것인데, 글씨를 집중해 쓰다보면 병을 잊어버릴 수 있었죠. 부모님은 제가 이렇게라도 병을 이겨내는 것에 너무 고마워하셨습니다.

 



‘전통 서예’와 ‘캘리그라피’의 차이
쉽게 생각해서 전통 서예가 클래식 음악이라면, 캘리그라피(이하 캘리)는 실용 음악이라고 보면 됩니다. 음악에서 악보대로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을 클래식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서체를 법도에 맞게 전통적으로 쓰는 것이 전통 서예인 것이죠. 반면 캘리는 변주입니다. 변주는 정답이 없습니다. 제가 보는 견해는 전통 서예 안에 캘리가 포함 된다고 생각해요. 한·중·일 나라마다 서예를 받아들이는 것도 다릅니다. 중국은 ‘서법’이라고 해서 법도에 맞추어 쓰고, 일본은 ‘서도’로 도를 닦듯이 쓰고, 한국은 ‘서예’로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더 발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중국과 일본이 캘리그라피라는 말을 쓰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현대서예, 창작서예라 하여 상업화시켜 캘리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실 일본과 중국은 옛날부터 캘리그라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간판도 붓으로 썼으니까요. 우리나라는 이런 중간 단계 없이 캘리그라피 붐이 2000년대 초에 확 일어난 경우이고요.

캘리그라피를 하게 된 이유
사실 저라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전통 서예를 하면 마음은 너무 편한데, 뭔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즉 내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 안에 나는 없고 기술적으로 도를 닦는 거였죠. 수행하는 의미로 글씨를 쓸 수는 있지만 나는 거기에 없으니 한계에 많이 부딪혔던 것 같아요. 2009년 석사 청구전을 준비하고 논문도 끝내면서‘아! 그럼 난 뭐 해야 해지?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캘리가 처음 시작된 시기라 딱히 본보기가 없었거든요. 그나마 디자인하는 사람들, 대학 서예를 전공한 1세대들이 캘리를 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지금 더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에 원광대, 대전대, 경기대, 계명대 등에 서예학과가 있었는데, 3개 대학의 학부는 다 없어지고 경기대 하나만 남았습니다. 서예 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안타깝죠. 이런 이유에서 더 공부를 지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5년간의 노력으로 글씨체를 바꾸다
전통 서예에서 캘리라는 창작서예를 하기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해야 했어요.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궁체를 전공해서 그런지 캘리 글씨가 궁체처럼 이상하게 만들어졌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이죠. 바꾸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도 제 글씨는 계속 변화하고 있어요. 이런 변화하는 과정이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도 되지만 스스로 고민도 많습니다. 롤 모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정확하게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가 없으니 저 혼자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외롭기도 하지만, 저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간혹 캘리하는 사람들은 전통 서예를 한 저를 특이하게 생각하거나 색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유분방한 캘리를 하는 제가 전통 서예를 못할 것 같은 거죠. 그런데 저는 전통 서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깊이 가운데 제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지같은 글씨에 길이 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명의 영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만약 한 분만 보고 왔다면 그 선생님 글씨와 똑같이 썼을 겁니다. 선생님께 글씨를 써 가면 제 글씨가 거지같다고 하며 야단을 치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글씨를 써서 가져갔어요. 그 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요. 저는 제자들에게 거지같은 글씨를 써야한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고 하면 그때부터 꼬이게 되니까요. 이미 고정이 되어 변화를 줄 수가 없거든요. 엉망으로 써도 거기에 잘못된 것을 수정할 수 있고, 변화할 가능성도 있어요. 잘 쓰려고 하는 순간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 밖에 되지 않고 정형화된 글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30년 붓을 잡게 된 힘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글을 쓸 때 다른 잡생각을 하지 않고 집중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이유였어요. 하지만 캘리는 잡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서예와 캘리는 너무 다르면서도 같아요. 음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서예는 매일 똑같이 쓰며 수행하듯이 합니다. 이리 수행이 쌓여 내 정신이 담긴 선, 획이 다듬어지는 반면, 캘리는 창작이니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문구가 있다면 이 문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어떻게 글씨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데, 이때 전통 서예를 하며 쌓인 수행이 캘리로 표현 됩니다. 전통 서예를 기반으로 캘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하는 캘리, 즉 모양만 따라서 쓰는 것은 글씨를 따라 그리는 거지 쓰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그 안에 자기 것이 없는 것은 쓰는 행위자체일 뿐입니다. 전통 서예의 내공과 창의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힘, 이 두 가지를 스스로 계속 고민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즐겁게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의 화두는 ‘위로’
저의 작품의 기본적인 화두는 ‘위로’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생각이 많았던 이유가 어떤 것에 공감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글씨로 다른 사람의 아픔, 기쁨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2016년 두 번째 개인전 전시의 컨셉이 ‘위로’였거든요. 보통 서예전시는 주제를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그림전은 그리 할 수 있는데 서예는 사람 이름이 들어간 ‘000전’으로 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기존에 하던 대로가 아닌, 무언가 색다른 기획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 주제로 서예 작품을 다 전시하는 것은 쉽지 않죠. 그러다 ‘내가 왜? 전시회를 하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내가 쓴 글씨와 문구를 통해 그 순간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담아 ‘위로’라고 주제를 정했습니다. 실제로 몇몇 분이 작품을 보며 엄청 울고 가신 분이 있어요. 여자일 것 같지만, 남자분이셨죠. 정말 오열했습니다. 30~40분을 본 후 저를 토닥이며 가시더라고요. 고맙다고!! 그 남자 분이 본 제가 쓴 글씨는 바로 ‘괜찮다, 다 괜찮다’였습니다. 

 



강력하고 자극적인 것을 써라?
어느 갤러리 관장님은 저에게 “왜? 이리 고리타분한 것만 쓰냐? 이런 문구는 재미없으니, 욕도 쓰고 강력하고 자극적인 것을 써라 그래야 요즘 세상에 먹힌다.”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나쁘다보다 그런 문구를 쓰는 게 기쁘지 않는 사람이죠. 제가 생각한 것을 글씨로 표현해야 문장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예가 어찌 보면 그림이 아닌 글씨다보니 이해하기가 쉬워 더 직관적입니다. 그래서 캘리가 유행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이런 직관성 때문에 그림보다 캘리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갤러리 관장님 말씀처럼 자극적인 것을 위주로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마음에는 밝은 것보다 어두운 게 훨씬 많아 그 어둠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저의 어두움도 그 작품 속에 들어가겠죠. 그러니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 저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
대놓고는 아니지만 서예문화 속에는 여자, 남자의 구분이 있어요. 동등하게 가는 것이 분명한데 약간의 이런 시선들이 있고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점점 활동을 하면서 이런 부분이 힘들더라고요.‘아~ 이런 문화는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인정할 때까지 내가 커야하고, 제가 실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두드려야 하고요. 어떤 여자 선생님은 얼마 전에 본인은 살아남기 위해 쌈닭이 되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계속 버티면서 부딪히고 있어요. 사실 이런 고집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기도 하고요. 

작품의 경계를 지우다! 
작품의 시작은 제가 쓰고 싶은 문장을 찾기도 하고, 평상시에 여러 전시회나 그림 등을 많이 보는 것에 있습니다. 최근에 ‘흔적’이라는 작품을 하면서 서예, 캘리, 그림, 문구 등 이런 것이 제 안에 다 섞여져 ‘시각예술’의 하나로 표현된다고 스스로 제 작업에 대해 정의를 내렸어요. 굳이 분야나 경계를 나누기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그 경계가 제 안에서도 많이 없어졌거든요. 그러다보니 쓰고 지우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보통 전통 서예를 하는 분들은 예전부터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은 원래 쓰던 글씨에서 조금만 바꾸어 새로운 것이라고 발표를 하는데,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이죠. 전시를 할 때 깊이감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는 열망만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건축가나 화가들은 한 건물, 그림 등을 죽을 때까지 완성시키는 경우도 있잖아요. 저도 완성을 향해 한 작품 한 작품을 완료하며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기류에 휩싸여 이것저것 한다면 평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제가 하는 것이 100% 맞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저의 길을 갈 뿐입니다.   

 

 


글쓰며 이야기 하는 ‘별샘 놀이터’
용인에 10년 된 저의 작업실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10년을 같이 하신 분도 있는데, 이분은 문화센터에서 만났다가 제가 몸이 좋지않아 그만둔다고 하니 제 작업실로 배우러 오신 분이셨어요. 저는 작업실에서 제자를 키우면서 많이 성장을 했습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아 육아나 모든 가사 일에서 비껴난 가운데 있지만, 이곳에 오는 제자들에게 스스럼없이 글씨 쓰고 이야기하며 어떤 때는 선생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대하니 한 번 오면 5~7년 이상 유지가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제자에 대해 책임감도 생기더군요. 단순히 몇 개월, 1~2년 하고 가면 제가 이리 열심히 안했을 것 같아요. 제자들 때문에 더 공부를 하게 되니 이 공간이 저의 성장 공간인 셈이죠. 서예를 배우러 온다고 하면 조용히 각 잡고 글씨만 쓴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 스트레스도 풀고 고민도 이야기하고, 사실 나이 많은 제자들에게 저도 인생에 대해 배우게 되고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제자들이 독립을 하거나 실력을 더 키울 기회가 있다면 그런 기회를 아낌없이 주고 나의 것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있는 작품, 제자들은 제 자식과 같습니다.

고정관념을 완전 뒤집은 초딩들
작년 ‘경기도 꿈의학교’에 학부모 한 분이 저를 강사로 초청해주셨어요. 15주 동안의 커리큐럼을 기획해 그 동안 실력을 쌓은 제자들과 강사로 가게 되었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펜글씨는 커녕, 노트필기조차도 하지 않을뿐더러, 더구나 산만한 아이들도 많아 가기 전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다 엉망이 되어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기까지 했죠. 그런데 웬걸, 막상 진행해 보니 작은 손으로 큰 붓을 잡고 집중을 하는데… 우리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확 뒤집어졌어요. 완전 초 집중, 고개도 들지 않더라고요. 어떻게든 똑같이 써보려 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요. 그래서 캘리를 가르치려다가 전통 서예인 궁체, 고체, 민체를 가르쳤답니다. ‘아~ 내가 너무 아이들이라고 선을 긋고 제한했구나. 아이들은 안되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하면 되는 거다’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죠. 어찌 보면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제가 기회를 빼앗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작업실로 아이들도 배울 수 있냐는 문의가 왔지만 제가 받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작년 이 경험 이후, ‘이제는 배우려고 하면 무조건 가르쳐야 한다. 한 달이라도 가르쳐서 내보내야 한다. 서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저의 생각이 변했습니다. 작업실에 오는 분들도 어렸을 때 서예를 해서 그때 좋았던 기억으로 오는 분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아쉬운 것은 지금 아이들의 부모세대는 서예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서예에 대한 데이터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누군가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서서히 맥이 끊어지겠죠.  

 

꿈의학교에서 서예를 배우고 작품을 만든 아이들

 


“우리 선생님! 또 서예 영업한다!”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저의 작업이 결과를 얻고, 작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싶습니다. 진짜 작가로서 살아야 한다면 작품을 팔아 살아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 부분은 미술 분야보다 서예 쪽이 더 힘듭니다. 사람들은 “글씨하나 써줘”라고 아주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냥 써주는 것은 잘 하지 않습니다. 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제자를 키우는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책임감 있게 제자들을 잘 성장시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작업실에 와서 공부하는 분들이 마음이 따뜻해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제 할 일이지요. 무엇보다 서예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서예를 하고 싶게 만들고, 서예로 삶이 풍요로워지게 하고 싶은 것이죠. 저에게 캘리를 어느 정도 배우면, 이런 분들에게 서예를 왜 배워야하는지 꼭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 선생님 또 서예 영업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 일은 서예 영업을 열심히 하는 거다.”라고 받아치죠. 한국 캘리는 서예 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디자인 분야로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서예 하는 저희들보다 디자인,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 상업 쪽으로 더 잘 이용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서예 하는 사람들의 약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영업을 잘 못하는 거군요^^) 캘리만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캘리와 서예가 다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캘리를 배우다 막혀 저에게 오시는 분들이 간혹 있어요. 그러면서 “아~ 내가 부족한 부분이 이것이었구나.”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

“책을 보며 좋은 문구가 있을 때 이것을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 있지만, 직접 자기 서체로 썼을 때의 감동과 기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펜이나 노트를 가지고 다녀요. 어디서든 좋은 문장이 있거나 문구가 떠오르면 씁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말하는 김도임 작가! 본인의 습작한 작은 두루마리를 보여주더군요. 습작이라기보다 작품집이라고 해도 손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냥 카페에 앉아 멍 때리고 서로 대화도 나눌 수 있지만, 본인의 생각을 써보고 남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고 말한다는 김도임 작가의 말 속에 제자를 향한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모든 것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도 완성이 아닌 완료를 했을 뿐, 이것을 통해 성장해야 함을 자기 자신에게 매번 이야기 하다는 김도임 작가의 서예영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별샘 김도임 (1982~ )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글로벌파인아트학과 박사과정
경기대학교 파인아트학부 강사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서예전공 석사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개인전 6회 그룹전 다수
단원미술제 우수상(2006)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대상 문체부장관상(2007)
헤럴드경제 제17회 대한민국문화경영대상 작가부문 수상(2022)
한국캘리그라피창작협회 초대작가상(2022)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국립한글박물관(2016)
아리랑TV 한국의 선을 그리다 영상촬영(2020)
TvN드라마 블라인드 작품협찬(2022)
2022 캘리 인천에서 꽃피다 캘리그라피 퍼포먼스
별샘서예 운영(2010~ ), (사)한국캘리그라피창작협회용인지부장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1>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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