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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주 여름학교, 갈아 넣은 영혼의 무게

2023년 9월호(16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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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주 여름학교, 
갈아 넣은 영혼의 무게

 

6주간의 여름 한글학교 교사 급구
광고를 보고 여름학교에 합류한 것이 6월 초였다. 이제는 어느 자리에서건 직업인으로의 내 나이가 약점이 된다. 경력과 노련함이라는 포장지로도 감당이 안 될 때 나의 선택은 부지런함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토요 한글학교와는 또 다른 집중력이 요구되는 여름학교다. 교회의 시설을 이용하다 보니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지금 나에겐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는 공간과 시간만이 허락되면 감사할 일이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부에 사인을 하고 복사기를 독점한다. 오전 8시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한 나와 출근 1, 2위를 다투는 또 다른 선생님과 은근한 순위 경쟁을 하는 즐거움이 있다.


고요만이 머무는 빈 교실에서 감사, 그저 감사의 기도를 한다. “써니 샘이 작성한 지도안이 제일 잘했다고, 항상 교감 샘이 얘기하세요.” 한국에서 교사를 했던 짬밥 운운했지만 속삭이는 교장 선생님의 칭찬에 또 다른 감사 기도를 보탠다. 사랑받고 있는 소중한 마음이 식기 전에 아이들에게 얼른 전하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얼굴을 연결한다. 내 아이도 이리 사랑스럽지 않았다. 단점도 귀여운 실수로 보이니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샘! 수업 끝나면 교무실로 오시래요.”
“왜 왜 왜! 나만?”
“(어깨를 으쓱하며) 몰라요. 다요!”
“선생님들 수고 하셨어요~! 벌써 2주가 지났네요.”


2주마다 지급되는 첫 번째 Pay Check이다. 통 휴지를 변기에 쑤셔 넣는 대참사, 거울에 손 비누를 문질러 대는 크고 작은 말썽이 이어져서 본당을 사용하는 중급반 담임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더구나 강력한 용의자가 우리 반에 있다고 의심하는 나로서는 호출에 좀 더 예민해졌다. 첫 주는 긴장 때문인지 집에 가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는 시간이었다. 기대 보다 설렘을 안고 봉투를 뜯는다.
‘이런 젠장! 쥐꼬리에서 여우꼬리만큼 tax를… 아무리 엉클 샘1)에게는 대들지 말라 했지만… 너무한 것 아냐!!’


투표 날, 체육관에서
“샘, 친 교실 비상이요! 화요일에 민주당 예비선거가 있어서 친 교실 사용 못 한 대요.”
월요일 개강하자마자 교실에서 쫓겨난다. 친 교실 교사 네 명이 머리를 맞대고 체육관에서 할 합동수업의 계획을 짠다. 주제는 ‘독도’,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진행에서 나의 역할이 없다. 경로 우대도 아니고… 머리로 도움이 안 될 땐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내일 점심은 김밥 한 줄씩으로 제가 준비합니다.”


첫 시간은 반별 활동. 오늘을 위해 자기소개 활동지를 아껴 두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활동지를 채워나가던 아이들은 어느새 배를 깔고 편한 자세로 누워있다. 좋아하는 색깔과 음식을 고르느라 연필 꼭지를 입에 물고 고민한다. 시간 때우기용으로 준비한 학습지에 몰두하던 아이들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에서 집단 멘붕 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한 줄 세우기’일까. 고민하지 않고 손쉽게 복사한 활동지는 나비가 되려는 번데기를 고치 속에 계속 묶어 둔다. ‘제일’이라는 낱말을 뺐다면 아이들 생각의 범위를 넓히지 않았을까. 선택 장애가 있는 나도 하나만 고르기가 어렵다는 걸 잘 알면서… 후회는 지나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선생의 실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책 제목으로 소소한 복수를 한다.


한국어가 제2외국어인 이곳 아이들에게 ‘독도’는 화성보다 낯선 이름이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ANK)에서 제작한 영어 독도 영상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로 기억하는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가 내 허락도 없이 바뀌었다. 하와이는 여전히 미국 땅인데, 대마도는 일본 땅에서 조선 땅으로. 뭔가 유쾌하지만 억지에 억지로 맞서는 떨떠름이 있다. 헤드 마이크를 장착하고 성악을 전공한 선생님의 선창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 체육관에 울려 퍼진다. 어설프지만 프로젝트가 쏘아 올린 동작을 신나게 따라한다. 둘씩 짝을 지어 독도 협동화를 그려 즉석 전시회까지 마치며 독도는 확실한 우리 땅이 되었다.

 


비밀의 열쇠
여름학교가 4주를 지나고 있다. 지난 금요일 전체 운동회를 하면서 덩어리의 힘을 보여 주었던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때로는 장난과 고성이 오가지만 수업 중에도 틈만 보이면 떼창과 댄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다. 양볼이 유난히 발갛고 빵빵한 민서는 첫날, 고정 팔걸이를 목에 걸고 왔다. 혹시라도 의도치 않은 충돌로 팔의 부상이 가중될까 신경 쓰였다. 역시 공부는 엉덩이의 힘! 수업 중 제자리를 가장 잘 지키는 민서의 다양한 어휘에 깜짝깜짝 놀란다. 물 흐르듯이 매끈하게 교재를 읽을 때면 “선생님이 누구니?”묻고 싶다. 미국에서 태어나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라도 학교만 가면 잊히는 한국어. 어버버… 혀 짧은 소리로 반 토막 난 한국어를 말하는 2세들에게 읽고 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4학년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민서의 한국어 실력은 놀라웠다.


바로 그 열쇠는 Korean Two-Way Dual Language Immersion Program (한국어 쌍방 이중언어 몰입프로그램)이다. 이곳 공립학교에서 진행하는 Korean Two-Way Dual Language Immersion Program은 영어와 사회 과목은 영어로, 수학과 과학, 체육은 한국어로 진행한다. 민서는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5년간 Korean Immersion School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공립학교의 수준이 예전만 못하고 교권은 이곳에서도 바닥을 친지 오래지만 공교육의 힘은 대단하다. 유치부 한 반에서 시작된 Korean Immersion School은 현재 초등 전 학년으로 확대되었고, 다른 학군의 학생들까지 등록 대기자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리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학군이 다르면 스쿨버스를 이용할 수 없고 보호자가 통학을 책임져야 한다. Korean Two-Way Dual Language Immersion Program (한국어 쌍방 이중언어 몰입 프로그램)자체가 한국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귀중한 자산이다. Korean Immersion School 운영에 한국 정부의 도움이 절실했고,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첫 번째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열쇠는 부모였다.
“민서는 집에서 한국말 써? 영어 써?”
“한국말만 써야 해요. 영어 쓰면 엄마가 밥 안 줘요!”
“ (얼음) 엄마… 대-단-하-시-다!!”


밥을 굶겨서라도 한국어를 제2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 가르치려는 민서 부모의 노력이 고맙고 부러웠다. 부모의 등을 보고 크는 아이들이니 어찌 반듯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짧은 대침이 날을 세우는 덤불 안에서 작은 새들이 둥지를 튼다. 어미 새는 가시에 찔려도 그 가시가 새끼를 보호하는 일이라면 어미는 얼마든지 가시에 찔린다. 이민자의 부모는 그렇다. 팔걸이를 빼기 위한 마지막 검진이 있는 날 조퇴를 신청하는 민서 엄마의 문자를 받고 사심 가득한 답글을 쓴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사로서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는 민서에게서 사소한 것에서도 정성을 다하는 학습 태도를 보았습니다. 사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거라 좀 조심스럽지만… 저는 참 복이 많습니다. 민서 같은 학생을 만나서”

 

여름학교 마지막날 학예발표회 리허설, 유치반-꼭두각시


여름학교 이야기
영희는 한국학교에서 반쪽이로 주변인이 된다. 미국에 오래 산 한국 사람은 얼굴에 칼을 대지 않아도 음식 때문인지 언어 때문인지 얼굴형이 바뀐다. 나 역시 외국(동남아) 사람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영희 엄마는 하얀 피부 작은 얼굴이 거의 백인 같다.


골프를 배우느라 눈 밑에 주근깨가 귀여운 영희는 말괄량이 삐삐 머리가 잘 어울린다. 토요 한글학교나 여름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어만으로는 학습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최근의 K-POP과 드라마, 음식 등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엄마의 성화에 떠밀려 여름학교에 계속 참가하는 것만이 고마울 뿐이다. 영희 엄마의 한국어 실력도 영희의 숙제를 돌봐줄 정도로 대단치는 않다. 미흡한 숙제에도 ‘잘했어요’ 도장을 아낌없이 남발하는 건 내 사랑의 크기가 도장의 갯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런 영희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펄펄 난다. 밀려 올라가는 파도의 흐름으로 펼치는 부채선에 홀딱 빨려든다. 여름학교에서 한국어 공부만 했다면 영희의 저 밝은 미소를 볼 수 있었을까. 몸에서 배어져 나오는 춤사위는 배움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옅어졌을지라도 한국인의 DNA가 핏줄을 타고 이어진 것을 볼 때 목구멍이 먹먹해진다. 애쓰지 않아도 그냥… 한국인이란 선명한 낙인.


여름학교 마지막 주에 기말고사(?)가 있다. 자신의 실력을 잘 아는 상우는 시험 소리만 나오면 밥맛이 떨어진다. 그리곤 배가  사알~ 살 아프다.
“선생님… 나 시험 못 보면 이반에서 Kick Out 돼요?”
“상우가 친구를 때리거나 괴롭히면 그럴 수 있지만 시험을 못 봤다고 쫓겨나지 않아. 지금 선생님이 도와주고 있잖아.” 
족보 확실한 프리 테스트를 하고 친절하게 답안까지 확인하며 도와주었지만 결과는 극과 극. 만점자가 속출한 가운데 영희, 상우를 포함해 몇 명은 낙제점이다. 다른 친구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묻혀 수업 중에는 어찌어찌 묻혀 갔지만 홀로서기에서는 휘청이고 만다. 따라 읽다 보니 그냥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애써 문법을 짚지 않았어도 그냥 시나브로 적시는 우리말의 가랑비에 (아직 글쓰기는 아니다) 그들의 한국어가 윤슬2)이 된다.

 

(주)1) Uncle Sam : 엉클 샘은 미국의 마스코트 격 캐릭터다. 미국 그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로서, 미국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성조기와 같은 컬러링(청색, 적색, 백색)의 의복으로, 별이 그려진 하얀 실크 모자, 파란 상의, 빨간 줄무늬 하의로 구성된 옷을 입은 백인 중년 남성 캐릭터다. 전용 이모티콘( =|:-)= )도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서 보자. (출처 : 나무위키)
2) 윤슬 :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필진 박선희

 

미국 Virginia주에서 박선희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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