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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주는 힘

2023년 9월호(16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6. 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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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담긴 당신의 마음 이야기 16]

 

공간이 주는 힘

 

10여 년 전 사랑하던 사람과 갑작스럽게 헤어졌습니다. 자의였지만 상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해야만 할 것 같았고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정말 빠르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위로 문자와 전화가 빗발쳤지만 모두 피했습니다. 그때는 그것들이 위로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불행과 슬픔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다는 비뚤어진 판단이 제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저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티켓만 구매해 계획 없이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인데 이상하게 오전 4시만 되면 눈이 떠졌고 뜨는 해를 보며 제주 올레길 하나 하나를 완주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20대 때 유럽여행을 하면서 발에 물집이 터졌던 그때처럼 발 상태가 엉망이 되었지만,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습니다. 처음 며칠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가 고파지더군요. 그럼 눈에 보이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제주의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지독한 불면증 때문에 약을 먹거나 새벽까지 잠 못 들던 저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푹 잠을 자고 다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면서 제주에서의 시간이 제가 살던 곳과 다르게 흐른다 느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강사라는 직업 때문에 종일 말을 해야 했는데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것이 당연시될 무렵 원통하고 괴롭던 감정들이 점점 무뎌져 갔습니다. 대신 제주 바다의 깊고 깊은 차분함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에는 소소하게 작업을 하는 작가분들이 많았습니다. 한적한 바다에 가면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분들 옆에 앉아서 하염없이 붓질을 쳐다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그분들과 말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에게도 숨기고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깊은 슬픔을 털어놓는 믿지 못할 상황.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이 대화에서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언제든 와요. 제주 바다에.” 작가님은 제주의 청보리가 담긴 그림 한 장을 건네주셨습니다. 저와 특별한 관계가 아님에도 흔쾌히 베푸는 이 ‘사심 없는 호의’에 놀라울 정도로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문득 어느 책에서 읽었던 ‘깊지 않은 관계가 깊은 상처를 치료한다’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가족이나 친구같이 가까운 관계는 사랑이라는 ‘사심’이 생겨 위로의 과정에서 오히려 갈등을 빚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심’없는 호의를 경험할 때 더 긍정적인 감정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 경험 이후 저는 깊지 않은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누군가에게 제가 받은 ‘사심 없는 호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주변을 잘 관찰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바다


일상에 복귀한 후 위로가 필요할 때 그림을 가만히 쳐다봤습니다. 마음탓인가요? 신기하게도 고갈된 저의 에너지가 다시 채워지는 듯했습니다. 이 그림은 제주에서 선물 받은 특별한 기념품(souvenir)인 셈입니다. ‘souvenir’는 프랑스어 동사로‘(무엇인가를)기억하게 하는 것,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명사로는 ‘기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기념품’(記念品)의 한자를 풀이해 보면‘記(기록할 기), 念(생각 념), 品(물건 품)’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장의 누수로 청보리 그림이 망가졌습니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던 ‘souvenir’가 없어진 것입니다. 다시 훌쩍 제주로 떠나면 되겠지, 쉽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주저앉게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면서 수선스럽지 않게 저를 위로해주던 제주 바다를 그리자는 큰 결심을 했습니다. 

그림 안에 깊고 푸른 바다가 주는 평안함이 느껴지시나요? 사람은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을 갖게 됩니다. 우리 삶의 과정들이 공간 속에서 이어지고 시간의 흐름을 타게 되는 거죠. 물론 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기억이 달라서 같은 공간이라도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위로의 공간’인 제주 바다가 누군가에게는 ‘신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이런 공간은 조건반사처럼 각자의 특별한 감정을 불러내기도 하죠. 제가 제주 바다를 그린 그림만 바라봐도 느끼는 감정처럼 말입니다. 이런 공간들을 우리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도 내면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 공간을 떠올리고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를 위한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각자의 내면과 소통하고, 감정을 기대하며, 위로해주는 어떠한 공간이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지금 한번 가만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리네아스토리 김민정, 조세화
lineastory.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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