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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삼국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1)

인문학/황혼과 여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0.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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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후여행을 위한 연구]

동양 삼국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1)

 

공동체 여행에서 사후공부여행 주제로서의 ‘메이지유신’
  2017년 5월에 있었던 ‘큐슈를 통한 일본에의 공동체 여행’에서 남아있는 여행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전여행’의 정반대편에 있는 ‘사후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2018년 추석 즈음에 있을 ‘대만을 통한 중국에의 공동체 여행’을 위한 ‘사전여행’으로서 중국의 인물, 철학, 역사를 우리는 지금 미리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일본에의 ‘사후여행’을 위해 이번에 제가 잡은 주제는 바로 일본이 자랑하는 역사인 ‘메이지유신’입니다. 이 역사가 언제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동아시아 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늘 돋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중국과 조선이 유사한 서양문화/문명의 충격을 같이 받았고 어느 정도의 개혁을 같이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좌절되었던 것에 비하여 명확히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답하고 싶은 궁극적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19세기 말 당시 중국과 조선은 실패했는데, 왜 일본은 성공했을까?’
  둘째,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과연 궁극적 의미에서 성공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양 삼국인 중에서 중국인과 이글을 쓰는 저와 같은 한국인은 시기심과 질투심,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부끄러운 실패를 정직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헛된 자부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동아시아에 청일전쟁(1894) 이후 2차대전까지 준 피해를 정직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문화/문명에 사는 사람들(동아시아를 둘러싼 러시아인이나 미국인)은 자신들이 가진 제3의 관점의 장점도 있지만 오히려 발을 담그지 않고 밖에서 보면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동아시아 삼국이 이렇게 다각도로 반성해서 역사에 대한 질문을 정직하게 답하지 않는다면, 이 삼국이 진정한 하나를 이루어서 물리적으로 점점 하나가 되어 다가오는 우주시대를 가장 먼저 개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물론 지금의 현실은 비록 북한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왕조적 좌파 이데올로기로서 살벌한 수소폭탄을 탑재한 미사일 실험으로 온 세상을 위협하는, 한심하게도 19세기적 행태를 보이는 아주 위험한 시기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이럴수록 현재 전쟁의 위기로 전전긍긍하기보다 냉정하게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은 서양이 16세기 이후로 세계의 문화/문명을 선도해 왔지만 대규모의 환경파괴와 문화선도에 피곤해져 버린 시기에 와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동양 삼국이 먼저 하나가 되어 새로운 문화/문명을 만들어 열려지는 우주개척시대를 선도할 꿈을 꾸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미래를 위해서라도 ‘메이지 유신’이라는 획기적인 과거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그것을 재조명하고 재비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 혹은 사건 자체 혹은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진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와 사건을 능동적,주도적으로 형성하고 움직여간 주체의 중요성
  역사를 판단하고 평가할 때에 일차적으로는 ‘외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중심으로 파악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일어난 사건의 과정을 자세히 파악해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그것이 일어난 원인까지 찾게 되는데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역사의 본질이라는 밑바닥에 도달하지 못하여 결국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많은 역사책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데, 그 이유는 역사를 기술하기도 하지만 결국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 끝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물에 물을 탄듯한 역사서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역사를 내가 보고 싶은 대상이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좌파에서 흔히 행하는 ‘민중’을 중심으로 보려는 시각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을 형성해 가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 의지를 가진 존재와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행동만이 역사에서 최종적이고 항구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운동들에 의해서 결국 역사가 구체적이 되고 제도화되며 형태화되어 그 이후의 역사는 결국 이 만들어진 제도와 형태를 구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바꾸기 원한다면 그 다음 시대에서 그 전시대를 능가하는 역사 변혁의 의지를 발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에 있어서 강철같은 의지를 가지고 유신을 밀어붙인 집단은 바로 ‘사무라이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급 사무라이들’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메이지 유신을 정의하자면 ‘일본의 서남쪽에 위치한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과 그 중심이 시모노세끼下關)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그 중심이 사꾸라지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혁명’이며, 민중에 의한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겁니다.[각주:1] 나중에 민중을 위한 운동들이 다른 하급 사무라이들에 의해 제시되거나 전개되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형성되어가는 메이지유신의 신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수단으로서의 운동이었을뿐이었습니다.


* 신문의 지면상 여러 번에 걸쳐서 연재될 것인데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주도하여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다양한 원인들(10월호)
B.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로서의 메이지유신
C. 메이지유신의 한계에 대한 비판
D. 배우고 따라잡아야 할 그 서구란 과연 무엇이며 과연 따라잡았나?
E. 막부가 개혁을 계속했다면?
F. 아직도 가야할 길 - 일본이 중국과 한국과 함께

 

▲ 대정봉환(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것을 선언한 정치적 사건

 

A.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도하여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다양한 원인들

  그러면 이들 서남쪽에 위치한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그 당시 사람의 경험이나 그 당시에 일본을 방문한 사람들의 눈에도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변화를 일본사회에 일으킨,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원인들이 무엇일까요? 서남쪽의 번들이 메이지유신을 일으킬 수 있는 지리적, 역사적, 정신적 경제적 조건들이 있습니다.

 

첫째, 지리적’으로 일본은 ‘동북(홋카이도)과 서남(큐슈)으로 길게 뻗어나간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겁니다.
  반도인 한반도, 또 같은 섬나라인 영국에 비해 이렇게 길게 뻗은 섬나라인 일본이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문제는 ‘정치적 통합’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위해서 대개 사용하는 두 가지 방식은 사상, 종교를 통하거나 아니면 무력에 호소하는 것인데, 일본은 오랫동안 무력에 의한 통합방식을 택해왔습니다. 이것이 손쉽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두 자루의 칼을 잡은 사무라이들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적 신분구조에서 가장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장 앞에 놓인 계층이 붓을 잡은 선비 ‘사’(士)가 아니라 칼을 잡은 사무라이의 ‘시’(侍)가 되는 것이 중국과 한반도와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이런 통치 방식은 중국 역사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유목 혹은 기마민족이 기마술(활과 말)로서 중국 역사의 시간을 절반 이상 넘도록 지배했기 때문입니다(흉노, 북위, 수, 당, 요, 금, 원, 청). 이들 유목민족이 선비를 지칭하는 유학과 유학자들을 인정하고 심지어 장려하기도 한 것은 정신적으로 유학과 유교는 정권의 안정화를 위한 도구로서 딱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상, 종교적 도구를 단지 통치적 관점에서 사용했을 뿐이고, 지배와 통치에 반드시 필요한 병권은 결코 피지배민인 한족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는, 특히 5백년 이상 유학을 넘어서 유교라는 종교의 형태로 섬기며 그것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역사를 이어가는 현재의 한국인들로서는 천년 이상 오랫동안 칼에 의해서 확 그어진 일본인들의 심성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붓의 통치의 전통에서는 얼마나 칼의 통치의 현실과 그것을 오랫동안 구현해 왔던 일본의 정치문화, 문명에 대해 무지할 수 있는지를 절감해야 합니다.

 

둘째, 이어서 이들 서남쪽의 번들은 역사적’으로 일본 자체와 특히 한반도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일본내 에서는 14세기 중엽에 형성된 무가정권인 무로마치 막부 때에 오랫동안 조정이 남조(서남쪽)와 북조(동북쪽)로 갈라진 이후 다시 합쳐져서 지금 현재의 천황도 북조에서 나온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 때 남조는 결국 역사에서 소외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신라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당한 억울함이 지금도 전라도 사람들에게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것에 비교할 수 있겠지요. 일본에서 그 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8)입니다. 이 전쟁이 실패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家)의 멸망을 결정 지은 사건이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家)를 이긴 승리입니다. 그 때에 도쿠가와 쪽에 붙었던 다이묘(大名)들은 우대하여 많은 영지를 주며 에도(동경) 주위에 포진하도록 했지만, 도요토미 쪽에 섰던 (우리에게 악명을 떨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다이묘들은 그 중심을 벗어난 곳(북동이나 서남)에 작은 영지를 주고 그곳으로 쫓아내어서 봉건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쫓겨난 곳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1년 간격으로 번주가 가신을 이끌고 에도를 규칙적으로 방문해야 하며 가족들은 에도에 인질로 남겨두어야 하는 ‘참근교대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강제여행에 들어가는 만만찮은 비용은 모두 각 번주가 감당해야 했으니, 멀리 있는 번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고 번자체의 통치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 이후 메이지유신(1868)까지 서남쪽에 가장 멀리 위치한 번들은 이렇게 하시당하였기 때문에 그 불만이 점차로 쌓여가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셋째, 이들 서남쪽의 번들은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한반도와 역사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전남에서 배를 타고 조수를 그냥 따라 흘러가면 큐슈 북단에 자동적으로 도착하며, 그 해안에서 발견하는 쓰레기들에 한글이 많이 적혀져 있다고 합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진무황후의 삼한 정복설’(나중에 ‘임나일본부설’)이나, 백제를 구하기 위해서 2만7천의 병력으로 출병한 곳이 서남에 위치한 큐슈였습니다. 이들은 결국 ‘백촌강 전투’(663)에서 나당연합군에 패배한 역사가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큐슈 북쪽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 ‘다자이후’는 원래 당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한 일본 전체를 방어하고 지휘하기 위한 시설로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 쿠빌라이의 독촉에 못이겨 고려가 일본정벌에 동참하였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가미가제(神風)에 의하여 패배했던 역사도 대부분 서남쪽에서 일어난 일(1274, 1281)이었고, 원나라와 고려를 향한 이때의 원한을 이곳 사람들은 계속 가져왔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3백여년이 흐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큐슈 북쪽 해안인 ‘나고야’에 전국의 무사들을 모아서 진을 치고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에 가장 많이 동원된 무사들은 대부분 서남에 위치한 큐슈 지역에 속한 번들에서 데려온 무사들이었습니다. 한반도를 점령하려 했지만 실패했거나 공격을 받았던 역사들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들 번들의 후예들 속에 계속 쌓여가면서 전수되며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의 3백년 후인 메이지유신기에 정말 뜬금없이 ‘정한론’(征韓論)논쟁(1873)이 일어나게 된 근본 이유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큐슈의 후예 가운데 한 사람이 21세기 현재 극우쪽으로 달려가는 일본 총리 아베 신조라는 사실은 우연한 일일까요? 메이지유신 이전에 사립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연 요시다 쇼인이나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일본이 자랑하는 선각자들이 사실 아시아의 국가들을 점령해서 일본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소리를 내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고 일본 자체의 개혁도 급하고 중요할 것인데, 왜 갑자기 이 엉뚱한 논쟁이 일어나서 정부가 반으로 쪼개질 정도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외부인, 특히 중국과 조선의 후예들인 우리들의 입장에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지유신을 일으킨지 10년도 안되는 시간에 자기들이 이룬 얼마 되지 않는 업적(?)에 대한 헛된 자부심도 있었고 또 급하게 결정하는 사무라이적인 기질도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역사적으로 깊이 내재한 원한도 한 몫을 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

 

▲ 당시 4개의 현 위치

 

넷째, 서남쪽의 번들이 지리적으로 에도(동경)와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경제적/무역적으로 자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이들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킬 사상적 행동의 근거를 난학’, ‘신도학, 국학’, ‘미토학’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새로 일어난 학문 경향들이 일본 전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길쭉하게 뻗어나간 일본 중에서 외국과 접촉하기에는 가장 쉬운 지역이 바로 서남쪽의 번들이었습니다. 유명한 시모노세키(조슈번)나 나가사키, 사꾸라지마(사쓰마번)와 같은 곳으로, 일본의 동쪽에 치우친 에도의 막부가 정치적, 군사적 힘이 떨어질 후반에 이르면 더욱 독자적인 길을 가기에 안성맞춤인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겁니다. 로마교의 신부들이 침투해서 전도하여 수십만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서 일어난 종교의 난으로 수 많은 사람이 죽은 시마바라 지역도 바로 큐슈 중부의 해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를 엔도 슈샤쿠가 ‘침묵’silence에서 사용하였고 올해 영화화했지요.

 

  1) ‘난학’, 즉 ‘네델란드학’은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와 종교를 제외한 교역을 하기로 조약을 맺은 후에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통해서만 허용한 가운데 일본에서 발전한 학문경향입니다.

  조선에는 ‘박연’이나 ‘하멜’(하멜표류기)을 통해서 네덜란드와 교섭할 아주 작은 기회가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의도적으로 네덜란드와 조선과의 접촉을 끊었지요. 이에 비해서 일본에서의 난학의 열풍은 막부의 힘이 약해지는 후반부에 갈수록 더 커져갔습니다. 스기타 겐바꾸가 만든 해부학 책인 ‘해체신서’(解體新書, 1774)는 네덜란드에서 당시에 최신의 의학서적을 일본어로 바로 번역한 것이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스기타는 단순히 서양의학을 바로 들여오는 정도가 아니라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중국의학 뿐 아니라 중국 자체도 비판하여 중국中國은 중간中間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상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는 나라’라고 비판할 정도였습니다.[각주:2] 난학이 일본의 서남에 위치한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펴져나갔으니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나오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나중에 이들은 영국의 영향으로 ‘영학’, 프랑스의 영향으로 ‘불학’,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양학’으로 발전했지요.

 

▲ 보신전쟁의 사쓰마 사무라이 (펠리체 베아토 촬영)

 

  2) 전형적인 일본적 학문 경향이 국학, 신도학, 미토학’등 이었습니다.

  일본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에도 처음에는 불교의 막강한 위상 때문에 불교를 신도보다 우위에 놓은 ‘신불습합’(불본신적)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곧 이세신궁의 신이 바로 ‘본지불’(현지에 있는 부처)이라고 여기는 ‘본지수적설’로 발전했습니다. 나중에는 신도가 불교보다 우위에 놓은 ‘신불습합’(신본불적)으로 나갈 정도로 자기들만의 종교로 만들어나갔습니다. 물론 이렇게 발전한 것은 어떤 차원에서는 독창적이라고 할 수있겠지만, 정작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이라도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만 취하거나 변용해서 해석하고 나머지는 내어 버리는 일본적 섬사람의 습관이 종교에도 적용된 것입니다.

  도쿠가와 후반부에 나타나기 시작한 ‘국학, 신도학, 미토학’에서는 점차로 후대의 일본 군국주의가 근거한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의 발단이 되는 원형적 민족주의’proto-nationalism의 경향을 띄게 되었습니다.[각주:3] 국학’은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만민들을 연결시키며 충성을 강조하는 학문입니다. 신도’는 점차로 불교와는 분리된 길을 걷다가 나중에 메이지정권 하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뭉치게 하는 도구적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또 미토학’의 경우 대표적 미토학자인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新論)(1825)에는 이미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지요. 이 주장들이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대일본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만세일계’(萬世一界)를 이루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입헌군주를 표방하는 헌법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일군만인론’(一君萬人論)의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로 나가게 한 겁니다.
  이런 기초 하에서 요시다 쇼인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막부 말기와 유신기에 그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등의 정신적 스승이 되어 일본사회의 방향설정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중심이 되어야 할 천황을 문화와 정신적 중심이 아니라 인격적 중심으로 강조하여 ‘한 사람의 절대화한 인격으로서의 천황’을 주장했지요. 또 일본 지폐의 최고 단위인 만엔 권에 그 얼굴이 보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장도 유사합니다. ‘전쟁은 나라를 독립국의 권익을 신장하는 계책’이며 ‘무역은 나라를 빛나게 하는 징후’라고 외치며 아시아주의를 주장했지만 사실상 일본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각주:4] 이것은 나중에 2차대전 당시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아시아를 발아래 두기 위하여 제시되어 아시아인들의 피를 말렸던 대동아공영권’의 형태로 구체화됩니다.

 

  ‘경제적/무역적’으로 서남쪽의 번들은 자립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았습니다. 아무리 막부가 막아도 큐슈의 수많은 해안선과 섬을 따라서 동양의 중국, 그리고 서양의 수많은 국가들과 교역을 하기가 매우 쉬운 지리적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이들 번들이 다른 번들에 비해서 번영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사쓰마번은 막부의 허용 하에 류큐(오끼나와)국을 점령하고 거기서 나오는 사탕수수로 설탕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것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것으로 일본 전체의 번 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를 구축하고 최신 무기들이나 선박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막부 말기에 하급 사무라이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인구과밀한 국가로 알려졌지만, 19세기 당시 일본 인구는 3500만 정도였고 에도는 거의 100만으로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의 하나였습니다. 이 중에서 사무라이들은 25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6~8%였습니다.[각주:5] 이 비율은 중국의 청나라의 중간 지배층으로서의 ‘신사’(紳士)가 0.3%, 프랑스 혁명 당시의 귀족이 0.5%인 것에 비하면, 지배계층으로서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놀랍게도 서남번의 핵심인 사쓰마번의 경우는 사무라이들이 무려 20%에 달하였습니다. 오래 계속된 전쟁없는 시절에 이들은 하는 일이 없어서 손으로 문서를 쓰며 번의 공무를 보거나 책과 공부에 빠지는 독서광과 연구광이 되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몇몇은 이렇게 전환하지만 칼에 익숙한 근질거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일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1873)을 주장할 때에 사무라이 정신이 사라질까 염려해서 전쟁을 획책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잘 반영합니다.
  또 손으로 일하지 않는 이들의 입을 채워야 하는 데 막부 말기에 갈수록 늘어나는 인구에 먹을 것을 제대로 공급하는 것을 감당하기 점차로 어려워져 갔던 겁니다. 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은 땅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사무라이들은 땅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단지 번주가 주는 계속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봉급(일년에 쌀 100석이하 10석까지)으로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번주의 성 밖에 놓인 도시인 조카마치에 상인들인 ‘조닌’과 함께 살면서 상인들이 사는 부유한 삶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며 박탈감, 적개심, 질투심을 가지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돈이 궁하여 그들에게서 돈을 빌리고서 갚지 못해 절절 매는 등의 그들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상이 만성적으로 이어진 겁니다. 어떤 면에서 이때에 받았던 서러움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하급 사무라이들의 상인 죽이기’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덜하다고 하지만 2차대전 전의 일본경제는 모두 정치에 종노릇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6호 >에 실려 있습니다.

 

황혼과 여명 - 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을 위한 연구 바로가기


<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시리즈 >

제 96호 시리즈 (1)

 제 97호 시리즈 (2)


제 98호 시리즈 (3)


<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시리즈 >

제 99호 시리즈 (1)

제 100호 시리즈 (2)


제 100호 시리즈 (3)

제 101호 시리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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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앤드루 고든, 현대 일본의 역사 : 도쿠가와 시대에서 2001년까지, 김우영 역, 이산, 2005; p129-p155; 사회주의적 영향을 가진 소련과 중국 연구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철저하지 못한(미완성의)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하나의 계층으로서 이해하는 면과 일치할 수 있다. 이골 라티시에프‘, 명치유신 -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 지원석자‘, 국제관계에서 본 일본의 근대화’, in 나가이 미치오/M.우르타이 ed. 세계사의 흐름으로 본 명치유신 - 유럽화를 꿈 꾼 섬나라 일본, 교문사, 1994, pp. p74-p93, p94-p106. [본문으로]
  2. 장인성, 메이지 유신, 현대 일본의 출발점, 살림, 2007. 2007, p29. [본문으로]
  3. 장인성, 메이지 유신, 현대 일본의 출발점, 살림, 2007. 2007, p20. [본문으로]
  4. 야스카와 주노스케,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 2015. 마루야마 마사오는 제1고등학교 시절 (현재의 군국주의)국체를 부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기숙사 화장실에 천황제 타도 라는 낙서를 보자‘ 생리적이라 할 정도의 반감’을 가졌다고 했다. 그가 1940년 6월 26일 약관의 나이로 도교제국대학 법학부 교수가 되었고, 1943년부터 그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들고 나온 것은 후쿠자와가 개인주의자이면서 국가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즉 개인이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역설하였다. 이런 역설을 들은 제자들은 학도병으로 가미가제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는데, 전후에 마루야마는 이런 사실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패전으로 굴러들어온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향으로 결사적으로 매어달렸다. 이 때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가진 일본이 아시아를 침공해서 그 패권을 차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결코 말하지 않고, 인민이 자발성을 가진 것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자였다는 점만을 드러내려고 했고, 마루야마가 가진 학문적 위업 때문에 일본 사회나 밖에서도 그런 견해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본질인 것처럼 왜곡되게 했다. [본문으로]
  5.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2015, p3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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