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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만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2)

인문학/황혼과 여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1.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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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큐슈를 통한 일본사후여행공부]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만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2)


  일본인들이 그들 역사에서 가장 자랑하는 것이 ‘메이지유신’입니다. 지난 10월호에서는 우리가 여행했던 큐슈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메이지유신이라는 정권찬탈이 가능했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11월호에는 이 글의 핵심인 메이지유신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과 메이지유신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12월 호에는 ‘메이지유신의 목표이며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서구따라잡기에 과연 성공했는가?’ 또 역사상의 가정으로서의 ‘만약 도쿠가와 막부가 개혁을 계속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이 한국과 중국과 함께 가야할 길’을 살펴볼 것입니다. 

   A.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주도하여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다양한 
      원 인들 (2017년 10월호)
  B.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로서의 메이지유신  
  C. 메이지유신의 한계 비판 (2017년 11월호) 
   D. 배우고 따라잡아야 할 그 서구란 과연 무엇이며 과연 따라잡았나?
   E. 막부가 개혁을 계속했다면? 
   F. 아직도 가야할 길 - 일본이 중국과 한국과 함께(2017년 12월호)

B.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로서의 메이지유신
  이런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이들 하급 사무라이들이 성주들이 사는 성 밖의 도시인 조카마치에 모여 살면서 그 인구의 40% 정도 차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한 모임들을 만들고 모종의 운동을 일으킨 거지요. 이 때가 바로 일본 ‘내적’으로는 막부의 장악력이 점점 약해져 가던 막부 후기와 말기였고, ‘외적’으로는 때마침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을 타고 위협하면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던 일본 역사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밀물처럼 벌어지는 시절(1854)이었습니다. 

  첫째, 하급 사무라이들의 자기들 ‘정체성’ 확보입니다. 이들 하급 사무라이들은 스스로를 ‘지사’志士라 부르며 ‘영웅화’시키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지사’는 ‘뛰어난 인물’, ‘광포한 무사’, ‘영웅호걸’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번의 정치나 전국정치에 자신들이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금지된 사항인 번을 떠나는 일(‘탈번’)도 감행하였으며 천황이나 번주에게 직접 건의하며(‘헌책’), 막부에 대한 충성에서 벗어나 천황에게 직접 충성하는 ‘일군만인론’(一君萬人論)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킵니다. 이들은 각 번의 가신단의 80%를 장악하였고 서서히 번의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는데, 이 점에 가장 활발했으며 가장 빠른 진보를 보였던 번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나온 ‘조슈번’이었습니다. 이런 부글부글 끓는 조슈번을 향한 막부의 공격으로 조슈번은 항복을 했고 그 때 요시다 쇼인같은 급진파가 죽임(1859)을 당하고 막부를 지원하는 보수파가 등장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곧 급진파가 다시 번의 정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먼저 비밀리에 사쓰마와 연합한 세력에 기초하여(삿초동맹 1866) 막부의 공격을 이겨내고, 또 다른 번들을 눈덩이처럼 굴려 합치면서 결국 천황이 있는 교토를 장악한 후에 쇼군의 오랜 터인 에도를 점령하기에 이릅니다(1867).
  하지만 이들 하급 사무라이들이 내걸은 정체성을 가만히 드려다 보면, 그 속에는 자신들이 휘두르는 두 자루의 칼(적을 베는 칼과 베어진 적의 목을 자르거나 할복하는 칼)로 신속하게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치우지만, 자기 망상 속에서 깊고 멀리 내다보는 것이 없으며 심리적으로 ‘동시에 열등감과 우월감’을 가지며 표출하는 존재들인 것이 드러납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이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일본의 정책적 차원에 공적으로 반영된 이데올로기가 열등감이 반영된 ‘탈아론’(脫亞論 아시아를 떠나서 유럽열강과 같이 된다)과 우월감이 반영된 ‘흥아론’(興亞論 아시아를 흥하게 하는데 일본이 지도한다는)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이 두 사이를 오가면서 국내 정치에 있어서 폭력적 테러리즘을 만연시켰을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전쟁들에 몰입했습니다. 그 결과 주위 민족에게 엄청나게 많은 생명을 희생하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칼과 총에 의해 무너지며 일본 전체의 총체적 파멸을 가져온 겁니다(1945).

  둘째, 이들 하급사무라이들은 먼저 ‘자신이 속한 번의 정치 속에서 개혁의 시동을 연습했고 그것이 장차 기회를 만들어 전국에서의 통치로 발전’시켰습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사례들이 모범이 되어 다른 동쪽의 번들에게 퍼져나갔는데, 조슈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 ‘안세이 번정개혁’(1858)을 이루어 ‘서양식 군제’를 채용하여 ‘서양식 진법’을 훈련해 전투에 임하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산발적으로 형성되었던 부대들을 합쳐서 사무라이와 농민을 구분하지 않고, 단 6개월만 훈련하면 사무라이 이상으로 전투력을 발휘하는, 일체화되고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상비군이라는 혁신적 제도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상인과 농부의 첫째 아들을 빼놓고는 누구나 이 군대에 들어오고 싶어할 정도였습니다.
  2) ‘최신의 서양식무기’로 무장하였습니다. 육군은 그 당시 서양에서 최신식으로 만들어진 흐베르geweer총, 영러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한 마니에총, 최신의 스나이더총, 당시에 천하무적인 암스트롱 포로 무장했습니다. 그리고 해군은 25미터 길이 정도의 헤이신마루와 같은 작은 배에서 출발하여 훨씬 큰 범선들을 구매하거나 만들면서 무장해 나갔습니다. 
  3) 경제적으로 막부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독자무역’을 개시하고 대규모 ‘식신흥업’植新興業을 시도해 ‘번 자체 절대주의’를 추구하여 번의 독자적인 재정적 기초를 쌓아갔습니다.
  4) 또 번에서 번주를 옹립하는 ‘위로부터 움직이는 정치체제로서의 어전회의’에 다양하고 실무적 관료로 참여하여 실력을 길러서 나중에 메이지유신 이후에 의회와 관계없이 일본 전체 정국을 장악하는 것을 확실하게 연습했습니다. 이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행정기구 간소화’를 추구했습니다.
  5) 더 놀라운 개혁은 ‘항해원략론’(1861)을 통하여 장차 일본이 먼 외국까지 항해할 능력을 기르는 ‘해양국’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그것을 따라서 번 자체의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6) 조슈번의 특산물인 밀랍의 가공공장, 또 제철소, 군항국, 제지국(종이), 제유국(기름)을 설립하고 그것을 운영하다가 나중에 민간에 불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시켰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능력을 육성하는 군국주의적인 일본군과 마쓰이와 마츠시다의 유착과 같은 전형적인 ‘일본식 정경유착’의 패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셋째, 더 놀라운 것은 사쓰마, 조슈, 도사번이 각 번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인 ‘강병부국 개명파들이 횡적인 연합’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되어 결국 전국을 경영하였습니다.
  1) 무엇보다도 일본 전체에 불고 있는 서양을 배우고 따라잡기 열풍을 따라서 이들 하급사무라이들도 값이 비싸게 드는 ‘해외유학생들’을 많이 보내었다는 겁니다. 이 유학생들 중에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모리 이로노리와 같은 메이지유신 정부의 핵심인물들이 있었습니다.
  2) 이들은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이후 국내개혁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매이지 않고 메이지유신의 핵심인물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규모의 ‘이와쿠라 사절단’을 편성하여 근 2년에 걸쳐서 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두루 다니며, 그들의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정도로 ‘서양배우고 따라잡기’에 목을 맬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3) 그래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서양에서 모셔온 무려 500명이나 되는 각 분야의 최고전문가들’이 일본에 상주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최고의 봉급을 주었지만 일본인이 따라잡으면 바로 이들을 해고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넷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난 뒤에 그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이룬 업적 자체만을 보아도 ‘너무나 혁신적인 것이 많고 또 그것을 매우 짧은 시간에 성취’했다는 겁니다. 년도별로 그들이 실현한 실제들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어 내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또 천지가 개벽하듯이 일을 해치운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것은 후대에 사는 우리뿐 아니라 당대의 일본인들과 일본을 방문하여 오래 살게 된 외국인들이 동일하게 가지는 생각입니다.
 
  1) 1868 - ‘메이지유신’明治惟新
  2) 1869 - ‘판적봉환’板籍封還 : 모든 번의 영토를 천황에게 다시 돌리는 것
  3) 1871 - ‘폐번치현’ 폐번 : 봉건적인 번정치를 종료하고 천황이 파송하는 관리에 의해서 현통치
  4) 1872 - ‘철도사업’시작 
  5) 1873 - 모든 남자에 대한 ‘징병령’(3년 복무 4년 예비역, 평시군사력 3만명)
  6) 1873 - ‘지조개정조례’(토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조세)
  7) 1875 - ‘장교훈련학교’(육군사관학교), ‘언론법’, ‘지방관회의’, ‘원로원’설치
  8) 1878 - ‘헌법초안’ 제출 / ‘부현회’ (지방정부에 선거요소 도입)
  9) 1883 - ‘육군참모대학’ 개설, ‘징병령’ 개정 (평시 9만3천, 전시 20만명)
  10) 1885 - ‘군인칙유’軍人勅諭 발표
  11) 1888 - 천황과 직접 만나서 조언하는 ‘추밀원’ 개설
  12) 1890 - 전국민 교육체계 형성과 ‘교육칙어’敎育勅語 발표(비교 한국의 교육헌장)
  13) 1894 - 청일전쟁 직전까지 현대식 선박 5만 7천톤(28척), 수뢰정 24척, 국가예산 1/3이 육군과 해군에 배당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은 외부를 향한 첫째 전쟁인 청일전쟁을 수행할 실질적 준비를 최선을 다해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해 나간 사실은 일본 이외에는 잘 몰랐고 더더구나 동양인 청나라나 조선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가 서남의 번들이 주도한 하급사무라이들이 이룬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개혁, 혁명은 시기적으로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을 막부가 했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것들 모두를 메이지유신에서 정권 찬탈자들의 공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서히 군불을 때듯이 하는 정치적 행보의 전통을 가진 막부가 했더라면 일본 자체에도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반세기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동안 잠깐씩 메이지유신의 한계와 비판점들을 소개했지만,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다루어봅시다.

< 대일본제국헌법 1889년(명치22년) >



C. 메이지유신의 한계 비판
  메이지유신에 대한 정당하고 제대로 된 평가는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1868년을 전후한 ‘단기간’의 관점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할 수 있습니다.
  즉 ‘장기적’이라는 것은 메이지유신이 있기까지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가 포괄하는 범위까지의 일본이 기억하는 먼 과거의 역사까지와, 메이지유신 이후 2차대전까지와 심지어 21세기의 지금까지를 같이 고려하는 태도입니다. 또 ‘전체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메이지유신을 정치적 변혁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과 일본의 모든 것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도 있습니다.
  1) 일본의 동북과 서남으로 길게 뻗어 있는 ‘통합이 어려운 지리정치적 모습’
  2) 섬을 벗어나서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도 없이 그 안에만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인구조밀한 섬나라’ 
  3) 서세동점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일본 사회 전체와 주위의 나라들에게 가한 행동들’
  4) 종교든 뭐든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일본적 관점에서만 받아들이는 관습’
  5) 화산활동으로 지반이 늘 불안한 곳에 살아야 하는 ‘불안한 일본인’
  6)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고 단지 ‘현재중심적인 삶만이 절대적 가치를 발휘하는 일본적 가치관’

  이런 관점들을 가지고 메이지유신을 다시 바라본다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한계와 약점들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첫째, ‘전체’가 아닌 ‘부분’에만 집중한다는 겁니다.
  일본인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를 잘하고 거기에 집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밀하고 정교한 장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고, 20세기 내내 이들이 만든 상품과 기계제품의 탁월성에 세계가 늘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점이 전체, 큰 관점, 그리고 장기적 안목은 가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일본인들은 더더욱 이렇게 ‘부분에 몰입’합니다. 세상은 ‘나/우리의 안’과 함께 존재하는 ‘나/우리의 밖’을 포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둘 사이의 경계가 폐쇄되었을 정도로 선명하게 갈라져 있고, ‘안’인 내가 ‘밖’을 완전히 밀어내어 버립니다. 그래서 ‘나/우리의 안’과 나/우리의 밖‘을 모두 포함한 ‘전체’가 아닌 나/우리만인 ‘부분’에 집중합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부분’에 집중해서 얻으려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사실상 모조리 세속적,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의 삼대욕망인 ‘권력과 물질과 성’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것을 현재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좋은 문화를 만든 겁니다. 

  둘째, ‘단기적’인 것이 정치적으로는 ‘사무라이적’이며 ‘테러리즘을 지향’했다는 겁니다.
  가장 먼저 메이지유신은 모든 것을 ‘단기적 관점’에서 이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적 단점입니다. 이것은 일본문화 자체가 ‘지금-여기’에 집중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단기적 관점에서 형성된 일본정치의 나쁜 전통이 바로 ‘테러리즘에 의한 정권유지’입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청일전쟁(1894)의 주전파였으며, 무력사용을 의지해서 그런지 거의 대부분 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한 두 세대가 지나서 이들 칼을 휘두르는 전통을 이어받은 급진적 청년장교들이나 통제파 영관장교들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정권 자체가 언제든지 테러리즘에 의해서 바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일본의회와 상관없이 테러리즘을 동원하여 만주를 장악하려는 만주사변(1931)과 중국을 장악하려는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일본의 관동군이었습니다. 특히 이들 청년장교들로 이루어진 극단적인 천황주의를 신봉한 황도파들은 반서양,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순진하지만 단칼에 베는 사무라이적 무력에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동경의 천황이 거주하는 황거를 일시 장악하며 정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였으며(1936.2.26), 천황의 일본 패망칙서 낭독을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1945.8.15.). 또 전후에 천황제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 사건(1970.11.25)도 모두 메이지유신이 남긴 테러리즘을 부추긴 전통에서 비롯된 겁니다.  

  셋째, ‘현재(과거나 미래가 아닌), 물질(정신이 아닌)을 종교적 열정으로 추구’했다는 겁니다.
  세계 최강 지성을 만들어내고 기업들을 만들어내는 유대인의 놀라운 특징은 세속성을 종교적 열정으로 추구하여 ‘세속의 종교성’‘종교의 세속성’을 가졌다는 점으로 이들에게 중요한 시간은‘현재’입니다. 이런 점은 일본인들의 본성을 매우 닮았습니다. 일본인들은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고 단지 ’현재‘만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와 사람은 단칼에 베어지며, 봄날에 화려하게 피지만 순간에 져버리는 사꾸라와 같은 관념을 가졌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과거’를 왜 이들이 부인할까?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일 뿐이기 때문에 현재의 편안함을 위해 과거를 모른 척 부인할 뿐입니다. 물론 개별적 일본인을 만날 때에 대단히 양심적이고 역사적이며 전체를 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일본인이 가진 일본적 정신은 바로 ‘현재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현재만을 생각하는 개인에 대해 치매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일본인 개개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일본적 정신 자체인 현재와 물질에 집중하는 특징은 ‘문화적 종교적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현재중심적인 관점을 가진 일본인들은 유대인을 닮아서 대단히 ‘물질적’이며 ‘감각적’입니다. 이 속에서는 정신성 혹은 영성과 같은 추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이 ‘성’(誠)이라는 단어를 써도 모조리 현재적이고 물질적 추구를 열성을 다해서 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또 ‘도’(道)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 속에 인간의 종교적이고 본질적 원리나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인 것을 잘 해내는 능력을 뜻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도(茶道)의 ‘도’(道)나 회칼을 들고 사시미를 뜨는 ‘도’(道) 등 모든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행위를 ‘도’(道)로 표시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물질을 종교적 열정으로 추구하는 문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은 일본문화 전체 속에서 ‘잿빛 허무함’이 진하게 배여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재중심적인 추구 때문에 이들의 모든 행위는 물질적, 세속적 목적인 ‘지배력 장악’(2차대전까지는 팽창적 군국주의로)과 ‘물질추구’(2차대전 이후는 상업국가로)를 위해서 대단히 ‘실용적’이고 동시에 ‘다이세이’大勢(대세)를 매우 유심히 살피면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일본 정치는 계급 없는 사회 실현이나 민주주의의 확산과 같은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 미래 비전을 내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넷째, ‘대일본제국헌법’‘하급사무라이들의 정권욕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일본의 향후 발전의 근간이 될 ‘대일본제국헌법’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으며, 특히 안중근에게 죽은 이토 히로부미의 일생의 핵심 업적이 이 헌법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를 몇 년씩 돌면서 일본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만든 일본의 입헌군주국의 헌법은 그렇게도 따라잡기 원하던 서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에서 후퇴한 것이었습니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의 경우, 왕의 권력은 점차로 제한해가는 것이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정반대로 천황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역주행을 하는 기형적 헌법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서구는 이런 구조 속에서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왕이 되었고, 민중의 의사에 따라서 구성된 의회는 왕과는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내각은 실행하는 건강한 구조를 대헌장(1215)에서 명예혁명(1688)까지 서서히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봉건체제에서 단 몇 년 안에 서양 따라잡기를 할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 속에서 이런 기형적 구조를 만든 겁니다. 이렇게 천황절대주의를 만들어 놓고, 행정을 시행하는 내각은 국회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천황이 임명하는 체재로 되어서, 의회는 단지 재정조절만 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황에게만 책임질 뿐이었습니다. 이런 기형적 헌법구조 뒤에서 실질적으로 정권을 오랫동안 장악할 야심을 누가 가졌겠습니까? 바로 해외유학을 하며 일본의 최고 엘리트가 되었던 이들 조슈와 사쓰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던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황은 사실 허수아비고 그 뒤에서 모든 정권을 장악하는, 이전에 막부가 가졌던 지배형식을 그대로 베낀 것이며, 오래된 일본적 전통을 따른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이토와 그를 이어갔던 최고권력자들은 사실상 ‘또 하나의 쇼군’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쇼군은 육신적 가계로 이어갔고, 메이지유신의 정권자들은 조슈와 사쓰마의 하급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이어갔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정권이 바뀌고 왕권이 바뀌지만 일본의 경우, 천황 가계는 유지되었다고 외적으로 많이 자랑합니다. 하지만 천황을 껍질로 세워놓고 뒤에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막부 이전의 ‘공경’들이나, 가마쿠라와 무로마치의 ‘막부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졌던 ‘간바꾸’(關伯)직을 거쳐서,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쇼군직’ 등은 천년을 이어오며 변하지 않는 오래된 일본적 정치전통인 셈입니다. 이토가 책임지고 만들어서 추밀원의 재가를 통해서 일본의 초대천황인 천무천황의 즉위일(2.11)에 천황이 조용히 반포한 대일본제국 헌법(1889)은 국민이 동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천황이 하사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모든 과정이 전형적인 일본적 정치패턴과 정치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으니 이 얼마나 ‘허무한 행태’인가요?  


< 헌법을 조롱하는 만화 >


  다섯째,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것은 ‘천황만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그것을 위해 죽는 가짜 절대종교인 신도를 창조해 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 일본의 대표적 종교인 ‘신도’(神道)는 대단히 물질주의적이며 현세의 행복을 비는 종교이며, 그것을 위해서 수많은 신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종교입니다. 이런 점에서 더 나아가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은 천황을 숭배하는 종교로 ‘신도’를 창조해 내었습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초국가주의를 형성하기 위하여 ‘종교까지 창조해내는 과감함’을 보인 겁니다. 즉 신도의 이름으로 아예 새로운 ‘절대주의적 종교를 창조’해내어 천황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이 된 겁니다. 이런 천황에 대한 ‘충성’은 전형적으로 일본사회의 관계망의 최상의 위치에 있는 존재(천황)에 관한 것일 뿐이지 국가나 어떤 원리에 대한 것은 결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여섯째, ‘근왕양이’에서 ‘근왕토막’으로 순식간에 ‘이데올로기 바꾸기’를 했다는 겁니다.

  ‘근왕양이’(勤王攘夷‘왕을 옹립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일본의 막부뿐 아니라 중국과 조선에서도 잘 사용되던 것으로 접근해 오는 서양을 향한 초기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이토와 같은 하급사무라이들이 직접 페리 제독의 흑선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하자,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즉각적으로 서양배우기로 돌아섰습니다. 이런 변화는 일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군들이 훗날 카미카제 특공대와 같이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던 일본군이 일단 포로가 되고 항복한 후에는 그렇게 고분고분할 수가 없어서 혼란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투쟁에서 극단적인 순종으로 태도를 돌변하는 행동 이면에는 ‘증명된 권력(칼)에는 절대복종한다’는 매우 세속적 일본인이 가진 기준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현재 나에게 중요하고 절실한 세상적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양의 막강한 힘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며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존재로 드러난 것은 바로 그때까지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였습니다. 이제 서남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은 이번에는 ‘증명된 무력한 권위에 절대적으로 항거한다’는 정반대의 진실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전에는 ‘근왕양이’를 외치면서 그렇게 칼날을 휘두르며 살인(테러리즘)까지 저질렀지만, 이제는 ‘근왕도막’(勤王倒幕‘왕을 옹립하고 막부를 타도하자’)으로 ‘이데올로기를 순식간에 바꾸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근왕도막’이란 사실상 ‘겉으로 내세운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실제적이고 종교적 확신에 가까운 일본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이란 증명된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존재이며, 내(하급사무라이)가 바로 그 절대권력을 갖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근왕도막’의 슬로건은 일본 국민 전체를 위한 것 같지만 사실 자기들이 최고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슬로건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양 배우기와 따라잡기’를 열정적으로 수행한 것이 바로‘메이지유신’입니다.


  일곱째, ‘과장된 위기의식으로 일본을 몰아갔습니다’.

  하급사무라이들은 일본이 그 당시 국제적으로 처한 상황을 ‘과장된 위기의식’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또 그것을 국민들에게 전염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당시 서양국가들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대상은 아편전쟁(1840)에 패하고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홍콩의 조차를 허용한 초거대국가인 ‘중국’이었습니다. 전세계에 식민지를 충분히 가졌고 초거대국가 인도조차 경영하던 영국은, 당시 중국의 영토를 탐할 상황은 아니었고 다만 무역을 원했을 뿐이었으며, 다른 서양 국가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그들이 군침을 흘릴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흑선이 페리제독을 통하여 통상을 요구한 것도 본격적인 일본침투가 아니라 미국의 함선이 먼 태평양을 건너서 올 때에 배의 수리와 물자 공급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향해 가려고 했을 뿐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서양의 일본에 대한 느긋함’은 일본의 관점에서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고, 조선의 관점에서는 역설적으로 큰 불행이었습니다. 또 서양의 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가장 멀리 그리고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과장된 위기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점진적으로 풀어나가도 얼마든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하급 사무라이들은 이런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여러 가지 책들을 펴내면서 ‘해군국이 되어야 한다’, ‘대외개방과 해외진출을 해야 한다’, ‘강력한 군사력 침략을 감행하고 조선과 만주에 이어 중국과 심지어 미국과 인도를 정복하자’라는 자기도취적인 말까지 하는 무리들이 생긴 겁니다. 이런 주장들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급진적인 청년장교들에게 전염되어서 결국 드넓은 중국을 점령하고 20세기의 최강국가가 된 미국과도 싸우려고 달려드는 매우 어리석은 역사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7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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