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곤혹스러운 한국인의 자화상

인문학/황혼과 여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2. 26. 14:46

본문

[서양문화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화의 여명으로 17]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곤혹스러운 한국인의 자화상


개인주의적인 서양사회 vs. 전체주의적인 동양사회 

  서양선수들이 테니스 경기에서 실수했을 때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신 적이 있나요? 그들 중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감정을 과도할 정도로 표현하며 마치 상대편 선수나 잘못 판정한 심판을 향해서 욕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서양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양선수들은 그럴 경우는 십중팔구 상대방 선수나 심판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자신을 향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이 단지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서양 사람들에게는 17세기 이후로 개인주의가 서서히 발전하면서 21세기의 지금에는 그것이 아주 높은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여전히 사회나 공동체 전체 가운데 자기 개인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편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내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인 ‘우리’를 배려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우리’ 속에 ‘나’를 숨기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런 두 종류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태도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또 사회나 공동체가 건강할 때에는 이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사회가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나 윤리적으로 건강하면, 서양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중요한 사회적 경향이라도 각자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는 전체적으로 발전합니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경우라면 개인주의 사회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발전하게 되어 결국 그 사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동양사회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가 건강하다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사회나 그 속의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회 전체에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잘나가는 지도자 뒤에 숨어서 그 뒤만 졸졸 따르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 결과 사회와 문화 전체에 전제나 독재가 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질서와 그 근본인 절대종교와 상대종교의 문제 

  여기에 매우 중요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두 사회가 모든 사회의 근간이 되는 ‘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들의 주장은 강하지만, 그것이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이 자신의 주장과 삶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야 자신이 이익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에게서 배우기는 하지만 스승의 견해보다 나의 생각이 중요하게 되고, 전통의 유지보다는 새로운 발견이나 혁명을 선호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고 관철하여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최소치로서는 ‘합리적’이어야 하며, 최대치로서는 ‘절대적/항구적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서양 문화적 흐름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오랫동안 서양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던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절대종교’와 그 종교가 가지는 ‘절대법’ 개념입니다. 그래서 신이 아닌 사람이 최고의 권위에 있거나 그런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전통을 가지게 된 겁니다. 따라서 21세기 세속사회의 팽배로 서양에서 절대종교 개념은 희미해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서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절대법’ 개념이고 그래서 ‘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동양사회에서는 전체주의적인 혹은 공동체주의적인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개진하기보다 전체와의 조화를 위해서 나보다 높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찾아야 하고 거기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나’의 생각을 드러내기보다 ‘우리’의 생각을 찾아서 내가 수동적으로 따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학생의 사명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 어떤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법을 생각할 수 없으며, 법이란 최고의 권위에 오르는 사람이 만들면 되는, 일종의 왕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동양이 가진 이런 ‘권위자(왕, 대통령) 아래에 있는 법’이라는 경향을 원천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동양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던 ‘4대 상대종교’와 그런 종교에서 만드는 ‘상대법’입니다. 절대신이 없는 가운데 만물이 신이 된다든지(만신론, 힌두교), 인간이 신이 된다든지(불교), 신보다도 사회의 질서가 중요하다든지(유교), 인간을 초월한 이상향을 추구한다든지(도교) 하는 경향은 오랫동안 동양사회의 근간이었고, 여기에 ‘법개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인 겁니다. 어떤 생각이 합리적/합법적이고 옳으냐, 혹은 그것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느냐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 누구를 따르느냐가 중요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서양에서 아무리 법치주의, 법지상주의, 법 앞에서 만민의 평등이라는, 서양법 개념을 교과서적으로 학습해 침이 마르도록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더라도, 수천 년에 걸쳐서 우리의 피와 뼈와 DNA속에 누적된 ‘법보다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돌이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서양문화 주도 하에서 살아가는 동양사회 

  동양과 서양이 어느 정도 분리되어 살았던 18세기 후반까지는 이런 차이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하면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나’ 중심이며 절대법적인 기초를 가진 서양문화가 ‘우리’ 중심이며 상대법적인 기초를 가진 동양과 거의 온 세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럴 경우는 최소치로 서양문화가 말하는 ‘합리성’이 무엇인지, 최대치로 ‘절대법적 사고’와 그것이 기원했던 ‘절대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역사가 거꾸로 진행되어 동양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상황이라면 법이 상대적이 되고 내가 누구를 따르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 않게 되었고,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동양사회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한국인의 자화상은 매우 혼돈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즉 서양인들처럼 ‘나’, 혹은 나의 주장을 제대로 드러낼 능력과 자신감도 없을 뿐 아니라, 동양인으로서 이전에 조상들이 가졌던 개념인 ‘우리’를 주장하기도 어렵게 된 겁니다. 이런 가운데 서양사회를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이기주의 사회라고 욕은 할 수 있겠지만, 정작 ‘나’를 내세우며 공동체를 위하여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은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면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우리’만을 내세울 뿐입니다.

  물론 이론적인 정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자신이 100%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전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를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피와 뼈와 DNA는 절대 그렇게 하려하지 않고, ‘나’의 책임은 지지 않는 반면 ‘우리’를 의존하고 그 뒤와 그 안에서만 머물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합니다. 바로 서양문화와 서양 사람들에게 끌려 다녔던, 지난 19~20세기 동안의 비참한 역사가 21세기에도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첫째로 궁극적 의미를 말하는 ‘절대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절대종교로서 기독교가 들어온 지 백년이 넘었지만 사실상 절대종교의 모습을 보이기보다 현세적이고 기복적이며 상대 종교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한국인들은 유대교가 그 지독한 서양세계의 핍박을 견디고 이스라엘로, 미국의 유대인으로 재기한 것, 그리고 세계를 누비며 철저한 선교와 의료, 교육으로 섬긴 기독교의 열정과 십자군 운동이라는 전무후무한 악, 기독교국가적 정체성을 가졌던 나라들의 제국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무시무시한 IS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속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절대종교들을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먼저 이런 절대종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상대종교의 지평을 확실히 떠나 절대종교에 제대로 심취해보고 나서 이 종교들이 왜 서양에서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그렇게 주도적인 문화를 만들었나를 그들의 입장에서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적인 인간 지도자(왕, 대통령)로 포장된 ‘우리’ 뒤에 비겁하게 숨은 ‘나’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절대자 앞에 서면 ‘나’의 무능함과 약함이 드러나서 고통스럽지만, 그 절대자의 자비와 사랑을 통해서 절대자의 자녀 된 ‘나’를 주장하는 개인주의의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 권위자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상대법을 버리고, 일단 ‘절대법’이 무엇인지를, 절대법적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적 일생에서 전반부의 말과 후반부의 말이 일치되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만약 말과 행동에 차이가 있다면 공적으로 사과나 사죄 혹은 그 어떤 설명을 해야 하는 삶이 왜 중요한지를 배워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개개인은 절대법적 삶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을 했을 때 어떤 수와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빠져나오려 하지 말고 법적 제재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는 전통을 수립해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범죄한 아들의 멱살을 잡고 경찰서에 신고하여 처벌을 받도록 함으로 법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법을 상대적으로 만들어서 생긴 피해는 결국 사회나 공동체를 돌고 돌아 고스란히 ‘나’에게 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88호 >에 실려 있습니다.

 

<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 바로가기 >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8]

제 89호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1편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9]

제 91호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2편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9]

제 91호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3편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