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대욱  피아니스트를  만나다

예술/음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2. 1. 17:53

본문

[예술인 이야기]

이대욱 피아니스트를 만나다



이대욱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프로필

■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줄리어드 음악학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

■ 피바디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지휘 공부, 

   박사학위취득

■ 뉴욕카네기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 볼티모어 슈리버홀 시리즈, 미시간주립대학교 등 

   다수의 무대에서 독주회 가짐

■ 1993년 중부 미시간 오페라 컴퍼니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피가로의결혼>, <카르멘>, 

   <호프만이야기>등 작품 지휘

■ 울산시행 제7대 상임지휘자 역임, 

   현 한양대학교 대우교수로 재직중


  12월호, 이대욱 피아니스트 인터뷰를 준비하며 한국의 피아니스트 1세대로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했고, 이런 분들을 청소년기 때 직접 만나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으며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려는 교육의 일환으로 청소년 학생기자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질문 할 특권을 이 청소년에게 주면서 말이죠. 자! 그러면 이대욱 피아니스트를 통해 우리나라 서양음악이 초창기에 어떻게 정착되었는지의 생생한 스토리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들어보도록 할까요?  


한국의 현대사회 초기에 음악가가 되기 쉽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나요? 

  한국에 서양음악이 들어오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입니다. 일본이 서양 문명을 일찍 받아들여 음악 활동이 꽤 활발했지요. 초기 홍난파 선생님은 특별히 음악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셔서 서양음악을 익히셨어요. 현재 95세로 살아계신 저희 어머님(‘김성복’)도 이화여전에 다니시며 피아노를 공부했고, 그 이후 이화여대 초대 피아노과 교수로 활동하셨지요. 제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한국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저의 어머님이자 최초의 은사이신 분과 시간을 함께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가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 제가집을 떠나서 말이죠.


  저희 친가와 외가 양쪽 할아버지 모두 다 초창기 기독교 신자이셨어요. 그래서 교회 가면 오르간이 있었고 서양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지요. 저의 어머님이 함흥에서 서울로 ‘유학’한 이후 음악을 전공하셨는데, 제가 음악, 그것도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직접적 이유도 어머님이 먼저 하면서 자연스럽게 제가 따라 하게 된 것이겠지요.


  한국동란이 끝나고 50년대 중반에 환도해서 어머님은 피아노 레슨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학생 중에 제일 특출하신 분은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한동일’씨였죠. 이 분의 고향도 저희와 같은 함흥이고 집도 가까워 한국동란 피난 때 같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한동일씨 아버님이 초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팀파니스트였으며, 저의 어머님이 이 집의 자녀 4명 모두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셨죠. 그 당시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한동일씨가 미국 장군에게 발굴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이라, 이 분의 스토리가 신문에 거의 매일 장식되었죠. 지금 사람들은 한동일씨가 그 때에 얼마나 유명했는지 잘 알 수가 없을 겁니다. 바로 이 ‘동일이형’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죠. 또 음악하는 집안끼리 가깝게 지내다 보니, 일반사람들보다 서로를 훨씬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 ‘음악을 잘 하면 저렇게 성공하는구나’라는, 한동일씨가 보인 본을 따라 가신 분들이 정경화, 김영욱 등이었습니다.


< 앞서 유학을 떠났던 한동일 피아니스트 >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명동에 ‘국립극장’이 된 ‘시공간’이라는 연주회장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음악회와 오페라는 다 여기서 했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음악회에 부지런히 다니며 실연되는 음악을 아주 많이 접하게 되었지요. 또 아버님은 의사셨지만 음악에 취미가 굉장히 많으셨던 점도 제가 음악을 전공하게 된 배경이었던 것 같아요.


음악가로서 어머님의 모습

  과수원을 크게 하시며 생활이 윤택했던 외할아버지께서는 서양문명에 관심이 많아 그 당시 사진기로 사진을 찍으며 집에서 현상도 하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자녀교육에 열성을 보이셔서 함흥에서 서울로 딸들을 모두 다 유학 보내셨죠.

  제 기억 속의 어머니는 음악가로서의 모습도 있지만 무엇보다 후학양성에 더 주력하신 분이십니다. 보통 집들은 아버지가 늦게 오고 어머니가 집에 있는데, 저희 집은 바꾸어졌지요. 어머님은 신촌에 있는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계시면서 저녁 8시 이전에 돈암동에 있는 집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소위 ‘신여성’으로 무척 바쁘셨고, 어린 저 역시 그런 생활이 당연하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학교에 보통 부모님들이 방문하기도 하는데, 저의 어머님은 한 번도 오실 수가 없었지요!^^ 제게 남아있는 어머님의 모습은 주로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분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또 제가 피아노를 어머니에게 배우려고 한 것도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으신 분이니 내가 피아노를 어머니께 배우면서 개인적으로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피아니스트로 독립하기까지 만난 스승들에 대한 기억 

  어머님 친구 분들은 유학도 가셨는데 저희 어머님은 개인사정상 가시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님께서 프랑스에 1년 정도 갈 기회가 되어 아버님과 함께 가셨지요. 저는 1년 정도를 어머님과 떨어져 지내며 어머님의 은사께 직접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애내(愛內)’교수님이셨죠. 1920년도에 베를린에 유학을 가셔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 당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음악의 장르를 불문하고 한국 최초였지요. 베를린에 유학가신 경로는 제가 잘 모르지만, 그분 남편은 ‘안병소’ 바이올리니스트로 굉장하신 분이셨죠. 바로 이 두 분이 한분은 피아노로, 한분은 바이올린으로 한국의 다음 세대를 거의 다 가르치셨습니다. 이애내 교수님께서는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독일에서 피아노를 훨씬 엄격하게 훈련받았기 때문에 저도 이런 스승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을 때도 음악적, 인성적 기초는 확실히 마련되었던 것 같습니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지 않으면 쇠퇴하듯이, 피아노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 이후 지금 나이가 70이 다 되어서도 계속 연습하고 연주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세 번째 스승으로는 러시아에서 1살 때 미국에 이민 오신 줄리어드 음대 교수였던 ‘사샤 고로드니츠키’(Sasha Gorodnitzki)입니다. 이 분 또한 기본에 충실할 것을 매번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 자신이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

다. 유명한 사람 옆에 가면 그 사람을 의존해서 내가 마치 다 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요. 독자적 생각과 판단력을 가지고 누가 하라는 게 아닌 본인이 알아서 책임을 지며 완성도를 높여가야 하는 겁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랜들’(Alfred Brendel)은 “15세가 지나서도 선생이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음악을 안하는 게 낫다”라고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아버님의 역할

  친할아버지도 의사고, 저희 아버님도 의사여서 친척들 사이에 의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인 제가 음악을 한다고 일반교육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며, 음악을을 하면 할수록 일반공부도 더 잘해야 한다고 독려 받았지요. 음악과 일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기고를 졸업한 후,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하지만 음악하는 사람치고 비교적 일반 공부도 빠지지 않게 했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제일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칸디아비아계 미국인으로 고3의 나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친구가, 영어 외에 3개의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뿐 아니라, 중요한 고전문헌은 읽지 않은 게 없고, 음악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니 얼마나 제게 충격이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1주일 7일이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은데 어떻게 했길래 그렇지?’ 정말 게임이 안 되었지요. 이것을 마음으로 뼈저리게 느끼며 ‘그래! 뒤늦게라도 보강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책도 읽고 그 녀석을 쫓아 다니며 배우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미국에 한 둘이 아니라는 거지요. 미국의 교육제도는 거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공을 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줄리어드가 아닌 하버드에서 학부과정으로 음악이나 의학이나 무엇을 전공한다 해도 실력이 다 똑같은 거죠. 물론 아버님 덕분에 그래도 잘 준비했다 싶었는데, 미국에 오니 한참 뒤진 것을 알았습니다. 


연주자, 지휘자로서의 삶의 여정

  예를 들어 플롯을 전공했을 때 갈 수 있는 직장으로는 전 세계에 있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고, 미국에 있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생활은 보장됩니다. 물론 플롯은 2~3명이고, 바이올린은 30명 정도니 들어가기는 하늘에 별따기죠. 그렇다면 피아노로 유일하게 재정적 안정을 얻는 길은 교수가 되는 것 밖에 없다는 현실이 엄존합니다. 제가 줄리어드 음대 다니며 3~4년 동안은 낭만적인 꿈에 젖어 있었죠. ‘내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면 최소한 시작은 되겠다’고 말이죠. 하지만, 학비도 여의치가 않았으며, 더 열심히 해서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것은 더 힘들다라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더구나 1975년 결혼하고 2년 뒤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첫아이도 태어나니 제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든, 무얼 하든 가정을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지휘 공부’입니다. 고3 때부터 지휘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가 하도 수줍어해 얼굴도 빨개지고, 남들 앞에서 말도 잘 못 해서 몇 번 해보고 ‘난 체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했었지요. 그 후 30세 정도 되니 말도 크게 하고 배짱도 생겨 ‘다시 한 번 해보자’ 결심하였고 그때 다니던 ‘피바디 음악학교’의 선생님을 찾아가 당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지휘를 한 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지휘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니 지휘를 훈련하게 해주십시오!” 선생님은 속으로 웃긴다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수업에 한번 와보라”고 하더군요. 그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 “해야겠습니다”고 하니, 그러면 레슨 준비해오라고. 저는 바로 곡을 하나 준비해 가상적으로 제 앞에 사람들이 있다 간주하며 지휘를 했습니다. 제 지휘봉 흔드는 것을 보시더니 훈련해보자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지휘공부까지 마치게 되었답니다.


  그 이후 크리스마스시즌, 교회성가대, 음악회 등을 재미있게 지휘했습니다. 그러면서 피아니스트로 여기저기 지원서를 제출했는데 99%의 반응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라는, 이미 인쇄된 편지를 받기 일쑤였죠. 그래서 제가 살고 있었던 볼티모어에 있는 초급대학에서 가르치며, 이미 이곳은 아는 사람도 많고 이젠 생활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으니 머무르려했지요. 그런데 ‘미시간주립대학’(Michigan State University) 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이 연락이 4년 전에 왔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정하고 미국 북쪽에 있는 미시간주립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P.I.Tchaikovsky l Romeo and Juliet_Fantasy Overture 지휘 이대욱 연주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미시간주립대학에서의 20년의 삶을 정리하면

  미시간주립대학에서는 피아노연주 뿐 아니라 지휘도 했습니다. 성악과에서 오페라 공연에 저에게 지휘를 부탁하게 되었는데, 사실 오페라는 지휘공부에 아주 이상적입니다. 단 1초라도 눈을 깜빡하면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에 완전히 집중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오페라는 무대 위의 성악가들이 무대 밑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기가 힘들고, 연기와 연출에 바빠 음악앙상블을 지휘자에게 완전히 맡기지 않을 수 없지요.  

  또 제 나이 30대 즈음 현대음악가 ‘쇤베르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미시간주립대학에 임용된 지 얼마 안 되어 그 대학 교수들과 앙상블을 만들어 연주하고, 추후 1996년 제가 창설한 ‘미시간 챔버 심포니’(Michigan Chamber Symphony)를 통해 작곡가 쇤베르그를 연주하자고 하며 모두를 달달 볶아 연습하곤 했는데, 그때는 젊은 기운으로 밀어 붙여서 1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쉽지는 않았지요. 다들 자기 계획들이 있는 가운데 시간을 조율해야 하는 거니까요. 연습도 3~4번 해서는 안 되니 열심히 모여 연주훈련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주하고, 지휘하며 20년의 시간을 보냈지요. 하지만 10년 정도 더 할 수 있는 교수직을 일찍 관두고, 55세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라진 한국 모습도 궁금하기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뒤에 홀로 남으신 어머님이 한국에 계시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서울대에 1년간 초청교수로, 또 울산시향 제7대 상임지휘자로 4년을 보낸 후에 2007년부터는 한양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19세기 쇼팽의 곡과 20세기 음악가 쇤베르그 곡을 연주하셨는데 (박창수 선생의 하우스 콘서트에서 2017년 10월 23일 연주) 저는 개인적으로 전통적인 음계가 아닌 12음계로 된 쇤베르그 음악을 처음 들으면서 음악에 있어서의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는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쇤베르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19세기 말부터 일반청중과 전문음악과의 세계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지요. 그전까지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굉장한 음악적 지식과 섬세한 예술적 감각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음악을 공부하고 심지어 베토벤의 소나타 신작 발표이면 지난번 연주와 어떤 점이 다르다는 사실들을 알아차릴 정도니까요. 이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토론’도 중요한 관심사였지요. 브람스, 말러, 특히 음악을 ‘토탈예술’로 승화시킨 바그너의 음악은 점점 더 크고 전문화되어갔습니다. 즉 음악, 문학, 건축, 미술, 디자인이 하나로 되며 내용이 더 복잡해졌지만 반면에 음악을 듣는 청중과 거리는 더 벌어지게 되었죠. 또 사회적으로 음악을 듣는 청중이 여유가 있는 귀족에서 점차 여유가 없고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중산층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19세기 초중반은 유럽에 전쟁도 없고 세월이 좋았는데, 19세기말부터 점차 전쟁으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음악도 그런 사회적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낙관적 음악이 아닌 불길하고 걱정스럽고 음울한 음악 스타일로 변형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쇤베르그도 사실상 청중과 음악을 분리하는데 일조한 음악가인 셈입니다. 하지만 제가 쇤베르그를 연주를 하는 것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쇤베르그 음악은 복잡하고 어렵고 듣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도대체 이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음악을 만들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이 나타났을 때도 베토벤 이상하다, 정신병자인 것 같다라는 평을 듣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베토벤처럼 그가 활동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명하지 않은 적이 없는 음악가는 없었죠. 물론 쇤베르그 초기 작품은 어렵지 않고 낭만적이고 웅장한 요소도 많지만,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을 뒤집어 전혀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 제 낀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쇤베르그가 세상을 진지하게 살았던 사람인데 이 사람 생애 전체를 잘 들여다보는 가운데 음악을 이해하고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또 어느 정도는 근본을 파헤치는 저의 기질도 작용해 보다 학구적으로 깊게 들어가서 쇤베르그를 좀 더 잘 알고 연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현재 쇤베르그에 대해서 음악적 토론은 하는 편이지만 연주하는 음악회는 별로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제584회 하우스콘서트 - 이대욱(Piano)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Polonaise-fantaisie No.7 in A-flat Major, Op.61 Arnold Schönberg - 5 Klavierstücke, Op.23 : 5. Walzer


영향 받은 연주자들은?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죠. 먼저 ‘브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는 역사적인 아주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화려하고 기교적이며 청중을 용광로에 몰아넣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학구적인 피아니스트를 연구하게 되고 도리어 그런 사람에게 더 끌리긴 했습니다. 그래도 이분의 연주를 들으려고 하루 전에 티켓을 예매하기 위해 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 ‘루돌프 써킨’(Rudolf Serkin)의 연주도 굉장했지요. 전 이분에게 공부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제가 존경하는 연주자이며 저의 우상이기도 합니다. 보통 연주자들이 잘 알려져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가면, 연주의 질이 조금씩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연주자여서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이분은 전혀 그렇지 않고 초지일관 창조적으로 연구해서 새롭게 연주했습니다. 그 외에도 러시아의 리히터,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첼리스트로는 로스트로포비치 등등 많지요. 


미국에 계시면서 유대인 음악가들과 접촉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유대인이 많은 동네에 살았고 유대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음악영역에 있으면서 많이 접했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 ‘유대인은 이렇다’라고 일률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음악가들만이 가지는 특징 같은 것이 있나요?) 20세기 초반부터 2차대전 당시까지 미국에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들어온 이후로, 인간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분야인 경제, 경영, 학문,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 계통에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유대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유럽의 유대인들이 편견 속에서 탄압을 많이 받으며 그 사회적 위치가 매우 불리했지만, 예를 들어 히틀러 치하에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있으면서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오케스트라를 결성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점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매우 차이가 나지요.


  가장 초대 유대인 음악가는 19세기 중엽에 독일에서 활동한 멘델스존을 들 수 있는데, 아버지가 은행가의 대부였을 정도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20세기가 되면서 말러도 미국에 잠시 머물며 일을 했고, 쇤베르그는 미국에 정착했는데 그 당시에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유럽 출신의 유대인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 음악세계를 새롭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요. 이미 금융, 법, 비즈니스에 유대인들이 매우 능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죠. 더 나아가 미국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그 영역에 성공하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생각이 퍼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 출신의 유명한 지휘자 ‘쥬빈메타’도 적극적으로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오케스트라를 30년이나 지휘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현주소

  우리나라는 전문음악교육이 도입되어 청소년기 때부터 아예 예중·예고에 입학하죠. 예를 들어‘피아노만 해라! 다른 것은 시간낭비다’라고 닥달하면서 음악 기능인만을 배출하는 것 같은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음악영역은 물론 넓지만, 기악은 그 중의 하나이고 피아노는 또 그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이것은 음악 전체가 10이라면 피아노는 기껏해야 10분의 1정도의 좁은 세계입니다. 김치찌개 하나 끓일 줄 안다고 해서 큰 레스토랑 주방장이 되겠다고 할 수 있나요? 노래와 음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철학, 그리고 역사와 문학 등도 알아야 깊이 있는 음악을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음악과 관련될 수 있는 일반적인 영역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지요. 

  요즘의 학생들과 대화하기가 힘든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음악뿐입니다.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오로지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피아노를 틀리지 않고 기교있게 치는 데에만 집중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들에게“더 해라!”라는 말이 안 나오더군요. 사실 틀리지 않게 치는 것도 맞습니다만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직업음악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것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게 우리 음악교육의 현실입니다.


  미국유학을 하면서 수줍어해 말도 잘 못하고 표현을 안하니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아! 이러면 안 되겠다’며 하루아침에 의식적으로 본인을 바꾸기로 했던 이대욱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래서 목소리 두 배로 크게, 또 말이 되든 안 되든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이제 그만! 하기로 작정하고 행동했더니, 사람들이 영어 발음 잘못된 것도 고쳐주더라고 하시며, 동행한 청소년 기자에게 눈길을 주며 영어훈련과 배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수에 대해 겁이 너무 많은데, 이런 겁에 휩 쌓여 있다면 발전할 수 없다는 거지요. 당신의 자녀 셋도 다른 것을 전공한 후 뒤늦게 음악가가 되었다며, 이제는 부인인 문용희 피아니스트를 포함한 온 가족이 음악으로 먹고 산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노년의 피아니스트의 모습에서 인생 후반에 오는 여유로움과 겸손함이 진하게 묻어났습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편집부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8호 >에 실려 있습니다.

  

< 예술인(음악) 이야기 바로가기 >


[제 96호 예술인 이야기]

음악의 본질을 추구하는 콘트라베이시스트 조영호


[제 95호 예술인 이야기]

국악과 유럽 감성이 결합된 재즈 아티스트 이지혜를 만나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