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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3)

2018년 2월호(제10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2. 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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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으로서의 연구]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3)


  지난해 봄, 일본 큐슈를 돌아본 우리는 일본의 역사, 종교, 정신을 향한 상상에서의 여행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2018년 1월호에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역사인 메이지유신에서 근원적 역할을 했던 종교, 즉 전형적 일본종교인 신도를 다음과 같은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

  A. 메이지유신 신도의 정의

  B. 일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정치와 종교의 다양한 관계들 

  C. 고대일본에 나타난 종교의 정치지배[외적]-정치의 종교지배[내적]의 모습

  이어 이번 2월호에서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D. 중세와 근세에 신도가 다른 종교(불교)와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간 자기 정체성

E. 메이지유신이 고대신도를 이용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종교인 국가신도의 전개과정

  F. 절대종교적 성격을 지닌 국가신도와 절대종교 기독교와의 세 번의 대결

  G.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질문 :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에 피의 광풍을 몰아치는 

  역사를 재현할까?(2018년 3월호)


E. 메이지유신이 고대신도를 이용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종교인 국가신도의 전개과정


  드디어 막부 말기가 되자 메이지유신기의 정권찬탈자들은 점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신도적 경향을 극도로 발전시켜 이세신궁을 천황제국가의 종묘로 세우면서 전혀 새로운 출발을 하는 천황교인 국가신도를 창조해 내었습니다.

  이 기획의 기안자는 메이지유신의 모사였으며, 기발난 착상을 잘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를 비롯한 조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막부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천황편에 선 군대(사실은 조슈와 사쓰마 등의 서남쪽 번의 군대)에게 ‘천황폐하의 군대’라는 금빛 휘장을 다는 창조적이고 기발난 발상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대적해 싸우는 막부군이 이 휘장을 볼 때 자신이 국가에 대하여 배신하는 것이 되며 자신의 가족이 처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약아빠진 꾀를 내었지요. 또 그는 메이지유신 직후 도쿄로 천도할 때에 15세 밖에 되지 않는 소년인 메이지 천황을 이세신궁에 방문하여 친배하도록 요구했습니다(1869.3.12). 천황이 이렇게 ‘신에스’親謁(見)친알(현)한 것은 상고시대의 지토천황 이래 거의 천년 이상 만에 처음 있는 일로서, 천황이 신의 후예이자 동시에 현인신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 점을 의도적으로 일반인들 앞에 드러낸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천황 뒤에 바짝 숨어서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천황을 조작하며 정권을 철저히 장악하려한 검은 손을 가진 사람들이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이었지요.


  이렇게까지 무서울 정도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인 이들은 천황이 그 전까지는 ‘권위의 원천’이긴 했지만 한번도 ‘권력의 중심’인 적은 없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 전의 두 막부(가마쿠라, 무로마치)와 같이 일단 천황을 높여놓고 자신은 천황을 가장 잘 섬기는 신하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섬기도록 하는 정치 전략을 취했습니다. 물론 막부는 실제로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고, 일반인들이 직접 천황을 볼 일은 전무하도록 조치하였지요. 그런데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은 이것을 뒤집습니다. ‘존왕양이’(천황을 높이며 외부의 적을 물리치자)는 슬로건을 순식간에 ‘존왕토막’(천황을 높이며 막부를 타도하자)로 바꾼 후에 오히려 천황을 사람들의 눈앞에 바로 내세운 겁니다. 이렇게 권력의 중심에 천황을 내세운 후에 그 뒤에서 보이지 않은 그림자 같은 실체로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본을 뒤흔들 계획을 이루어낸 겁니다. 말씀드렸듯이 메이지유신의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인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으로는 천황을 그렇게 가까이 모시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천황을 조롱해 왔기 때문에, 이들은 결코 천황이나 천황직 자체에는 일체의 존경심을 가지지 않던 자들이었으며, 종교(천황교)를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일반 일본인들의 어리석은 정서를 이용하여 종교(국가신도)를 이용한 신정정치체제를 수립한 겁니다.


1) 초특급으로 ‘국가신도’를 창조해나간 일지

  이제 구체적으로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이 막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전인 메이지유신 초기부터 국가종교로서의 신도를 초특급으로 신속하게 창조한 일지를 살펴봅시다.


  1868년 4월 5일(메이지 3.13) ‘왕정복고와 신무(神武,천황)창업’을 표방하며 이를 종교적으로 주관하는 ‘신기관’(神祇官)을 5백여 년 만에 부활.

  1868년 4월 9일(3.17)/4월 20일/5월 25일 신사에 부속된 중들을 환속시키고 불교와 관련된 모든 물품들을 신사에서 제거하는 신불분리를 명한 ‘신불판연령’ 포고.

  1868년 5월 16일(4.24) 신도에서 ‘하치만대보살’이라는 신불습합적 용어를 버리고 ‘하치만대신’(大神)으로 바꾸도록 함. 

  1868년 9월 24일 메이지천황이 3종 신기를 받들고 순행하던 중 ‘이세에서 요배’

  1869년 6월 29일 ‘도쿄초혼사’(후대 야스쿠니 신사)를 설립하고 초혼식 거행.

  1870년 ‘대교(大敎, 천황교)선포의 칙’을 내림.

  1871년 ‘신기관’을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 아래인 ‘신기성’(神祇省)으로 격하.

  1871년 5월 5일 ‘사사령 상지령’(社寺領 上知令)발표.

  1871년 5월 14일 ‘신사비종교론’(신사는 종교가 아닌 국가행사)을 공식적 정책으로 채택. 

  1871년 이세신궁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신궁어개정’(법)으로 그것을 단지 ‘신궁’으로 명명함.

  1871년 부,현의 청소재지와 개항장에 ‘신궁요배소’ 설치.

  1873년 1월 29일 신무(神武)천황 즉위를 축하하는 ‘기원절’을 거행함.


  메이지유신 초기에 이런 국가신도적 기초를 확실하게 세운 노력을 어느 정도 성공한 후에는 비로소 정치, 교육, 사법(헌법), 군대 등의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모두 천황교 아래에 두는 통일적인 사회체제를 만들어갔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천양무궁의 신칙’‘아마테라스의 자손인 천황에 의해 일본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2) 현인신인 천황을 시각화하는 작업수행

  이런 천황교를 국가신도로 기초놓음과 동시에 보통사람들에게 ‘현인신인 천황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이 수행했습니다.


  1868년 4월 16개의 잎이 달린 ‘국화문양’을 천황의 독점적 표상으로 삼음.

  1868년 7월 17일 에도로 ‘천도’를 계획하고 이름을 도쿄로 개칭.

  1868년 8월 27일 ‘즉위식’을 올림.

  1868년 9월 27일 ‘메이지’(明治)로 연호를 고침.

  1868년 10월 13일 천황이 에도(도쿄)로 순행하여 그것을 ‘황거’(황궁)로 삼음.

  1869년 3월 1일 메이지천황은 전통조복을 입고 이세신궁에 정식으로 ‘참배’

  1871년 12월 28일 새 수도인 도쿄의 황거에서 전통적인 천황의 즉위의례인 ‘대상제’ 거행.

  1872~1889년 천년 이상 주변 너머에만 있던 천황을 국민에 선보이기 위해 메이지 5년(1872)에서 메이지 18년(1885)에 걸쳐 메이지 천황이 전국 각지 ‘장기 순행’


3) 초대 천황인 신무(神武)천황의 창업을 시각화하여 신화의 역사화 조작

  이어서 초대의 천황인 ‘신무천황의 창업을 시각화’하기 위해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신무천황릉을 조성’한 후에 그 곳에 새로이 ‘가시하라 신궁’을 지었습니다(김후련). 이 신무천황의 발상지인 큐슈 지역의 휴가에 있던 미야자키 신사를 관폐대사로 승격한 후에 ‘미야자키 신궁’으로 개칭합니다. 이어서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된 직후(1889)에 본격적인 정비를 거친 역대 천황릉들을 고대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고고학적 조사도 없이 산재해 있던 고분에 천황릉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어서 국가신도의 신인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섬기는 수많은 신사들을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차근차근히 세우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메이지유신 당시에 사망한 관군을 위령하기 위해 세운 것이 도쿄 초혼사(1871)인데, 이것은 곧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야스쿠니 신사’(1879)로 개칭되어 그 이후의 모든 군인 전사자들을 합사하는 종교적 공간과 성지로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신화의 역사화 혹은 역사적 조작’의 한 장면입니다. 정권창출을 위해서라면 진리와 역사적 사실 여부에는 어떤 관심도 없는 가운데 과감하게 신화를 조작해서 역사화시키는, 일본입장에서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세계인들의 입장에서는 파렴치한 행위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국의 근본역사를 조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타자에게 행한 악을 부인하지 않겠습니까?


4) 일본이 지배하는 전 지역과 영역에 국가신도를 체계화하여 정권을 종교적으로 공고히 함

  이렇게 천황교인 국가신도를 체계화하고 천황의 시각화 작업을 한 후에는 드디어 군대(‘군인칙유’1882), 헌법(‘제국헌법’1889), 교육(‘교육칙어’1890.10.30.)에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천양무궁의 신칙’에 의한 만세일계 천황의 통치를 명문화하여 ‘신도 신화에 입각한 종교적 국체개념’이 설정되었습니다. 이런 목적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전쟁인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5)을 계기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공유되기 시작했습니다(박규태). 천황교인 국가신도는 이런 법적 조처들을 통해 일본인의 삶에 전면적인 종교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신도 없이는 그 어떤 구체적 법적 조치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창출한 겁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조회시간에 교육칙어를 낭독할 때에 천황 내외의 사진인 ‘어진영’(御眞影)을 향해 요배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종교적 예배행위였으며, 천황을 위한 절대봉사를 어릴 적부터 하도록 강요한 것은 바로 절대종교적인 모습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의 국가행사라고 강변한 겁니다. 이런 거짓에 대항해 2차대전 전에 조선의 기독교에서 일어난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그 결과로서의 순교를 다음호에서 다루겠습니다.


  천황교로서의 국가신도라는 조작적으로 창조해낸 절대종교는 일본 내에서만 아니라 일본 밖의 식민지(대만, 류큐, 조선, 만주 등)로 확대해 나갈 때에도 그 민족들에게 강요되었습니다. 이것의 사상적 기초가 바로 ‘팔굉일우’(八紘一宇)입니다. 온 천지사방의 나라들을 통합해 도읍을 열고 천하를 덮어 내 집으로 만든다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무천황의 신화에서 나오는 표현인데 메이지 유신 때에 재활용된 겁니다. 이런 모습은 다시 만주국을 가짜로 만들 때(1931)에 제시하였던 ‘오족협화’(五族協和)사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만주족, 몽골족, 한족, 일본족, 조선족이 합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자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미 만주족, 몽골족, 한족, 조선족을 합쳐 하나를 이루자는 이상을 사용하던 것에, 일본족을 그 중심에 놓은 후 재활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5) ‘천황기관설’‘국체명징운동’

  메이지 시대에 국가신도가 이렇게 전개되던 과정이 더 발전하여 쇼와 시대에 일어난 전형적인 천황교인 종교로서의 국가신도적 경향이 광분한 가운데 나타난 두 사건이 ‘천황기관설 사건’(1935)과 ‘국체명징운동’(1935)입니다. 그 결과 일본이 더욱 더 천황교로 몰입해 들어가는 종교적 교과서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국체의 본의’(1937)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토대로 전국의 교과서가 완전히 개정(1941)되어 학생들을 전쟁의 광란으로 밀어 넣을 준비를 마무리한 겁니다. 


  ‘천황기관설’(1935)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인 ‘인키 기도쿠로’(1867~1944)가 제안한 것으로 그의 제자 ‘미노베 다쓰기치’가 계승한 이론입니다. 일본의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고 천황은 단지 국가의 최고 헌법을 따라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사실 영국식 의회중심주의자나 정당정치주의자들에게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고 모든 일본인들이 그를 섬기듯이 따르도록 해 놓고 실제로는 뒤에서 정권을 모조리 장악한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과 그 후예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천황 자신이 실체적으로 모든 정권을 장악한다고 선언해야 이들은 안심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군 중장이자 귀족원인 ‘기구치 다케오’는 이 이론은 국체에 위반되는 학설이기 때문에 미노베는 학문적 도적(‘학비’學匪)라고 맹비난하였고 이 선동에 군부와 우익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미노베는 불경죄로 고발되었고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대학에서는 천황기관설을 가르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그는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귀족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맙니다. 우익은 더 나아가 그에게 총격테러를 감행하여 부상까지 입힙니다. 심지어 천황조차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다. 기관설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이런 정직한 음성은 천황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정권장악자들에 의해서 묻혀지고 맙니다.


  이어서 ‘국체명징운동’은 미노베 의원에 대한 공격이 더욱 거세어진 이후에 귀족원과 중의원에서 국체명징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일어난 조작된 운동(1935.3)입니다. 이어서 천황기관설을 버리고 국체를 더욱 명징하게 만든다는 것을 선명하게 선언하는 정부성명을 발표합니다(1935.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와 우익이 이것조차 부족하다고 소란을 피우자, 정부는 ‘2차 성명’까지 냅니다(1935.10.15.).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에 있다는 것이 국체의 본의이며 제국신민의 절대부동의 신념’이라는 겁니다. 이런 운동과 움직임을 더욱 구체화시키며 이어서 저술된 교과서가 위에서 말한 ‘국체의 본의’(1937.5)입니다.

 

6) ‘밝은 메이지, 어두운 쇼와’라는 거짓말 / ‘마코도’(誠)와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 / 신화의 역사화 - 헌법화


▲ 미시마 유키오


  이렇게 메이지 시대를 거쳐 짧은 다이쇼 시대를 지나 쇼와 시대로 넘어와서도 국가신도적 천황교적 기조는 계속 유지될 뿐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태평양전쟁의 광란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역사를 이렇게 부정적으로 전개, 발전시킨 것을 2차대전 전후의 일본 역사가들은 ‘밝은 메이지, 어두운 쇼와’라는 거짓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어두운 쇼와’는 적어도 인정해 주겠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밝은 메이지’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들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역사와 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용기가 없는 비겁한 존재임을 나타낼 뿐입니다. ‘병아리’였던 전자(메이지 시대)가 커서 ‘닭’이라는 후자(쇼와 시대)가 된 사실을 어떻게 하든지 부인하며 역사적 진실의 고리를 슬쩍 끊어보려고 한 겁니다. 이것은 현실적 생존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일본인들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문부성이 간행하여 전국의 학교와 관청에 대대적으로 배포된 ‘국체의 본의’란 책의 핵심은 ‘천황에 대한 몰아의 충(忠)과 화(和)의 정신이 신도적인 청명심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바로 이 청명심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더렵혀진 모든 사심을 버린 채, 군민 일체의 건국 이래 도(道)를 사는 마음’이며, ‘몰아귀일의 정화의식’이며, 이것이 바로 일본이 전후에도 강조한 ‘마코도’성(誠)입니다. 일단 천황이 신의 현현이라는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모든 우주와 역사의 중심인 천황에 몰입해서 충성하는 태도인 ‘마코도’가 진정한 일본적 자세라는 거지요.


  이 ‘마코도’는 전후에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주장으로 더 알려졌습니다. 그는 소설가, 영화감독, 연기자(우국, 가면의 고백)로 살면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심지어 노벨문학상 수상후보까지 올랐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이 40을 넘기면서 일상적 가면을 너무 오랫동안 쓰고 살았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극단적 행동에 돌입합니다. 그는 천황만은 가면을 쓰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며 상징천황제가 아닌 실질천황제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그는 일본의 육상자위대 동부지부에 난입하여 그들 앞에서 천황을 위한 ‘마코토’를 강조하는 연설을 한 후, 그 자리에서 부하 1명과 함께 할복자살을 했습니다(1970.11.25).


  또 독일에서 5년씩이나 유학한 ‘가케이 가쓰히코’(1872~1961)는 도쿄제국대학의 법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신도’와 유사어로 쓰이는 ‘가무나가라노미치’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초월하고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을 초월하면서 가지는 마음의 도’ 혹은 ‘천지와 일치하는 인간, 인간 그대로의 일본인으로서 가지는 이상적 신앙’이 신앙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신도신학’‘헌법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또 ‘시마조노 스스무’(국가신도와 일본인)는 ‘신적계보에 입각한 통치가 신대(神代)로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온 일본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특별하고 뛰어난 신성한 국가의 양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국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또 조선총독(1942.5~1944.7)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는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일본이며 그에게 정권을 바친 바다의 신인 ‘스사노오’는 조선(혹은 단군)이기 때문에 조선이 일본에 복속하는 것은 신화를 따르는 것이라는 엉뚱한 이론까지 조작해 내었습니다(김후란). 이렇게 해서 ‘신화의 역사화’라는 현대사회에서 일본 이외에는 아무도 믿고 따르지 아니할 작업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국가, 소위 ‘상상의공동체’(imagined community, B. Anderson)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런데 이런 천황교와 신국론의 흐름에, 비단 메이지유신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이 국가신도를 제도적으로 세워나가자, 많은 일본인들이 적극 호응하면서 자신들의 이론들을 마구 만들어내었고, 또 그것을 많은 일본인들이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따랐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합니다. 이런 민중적 호응이 바로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이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는 이유이고, 이들 보통사람들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의 희생자들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스스로를 가해한 사람들이기도 한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가운데 진정한 불행은 일본인들이 아시아에서 자행한 80년간의 횡포(1868~1945)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일본인 가운데는 아무도 없는 정신적, 사회적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타인을 만난 적이 없는 폐쇄된 사회에 살던 사람이 타인에 대해 마음대로 행패를 부린 후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그 뒤처리를 자비로운 엄마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정신적으로 유아인 상태에 머문 자와 유사한 모습을 가진 존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7) 기원은폐를 하려는 조작적 심리, 그러나 전후 일본의 과거를 솔직하게 반성하는 소수

  일본이 정치와 종교가 일체화된 유일한 구조, ‘국체’(國體)를 가졌다고 자랑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초보적 발달 단계에만 머물며 고대의 것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형태에 불과한 겁니다. 즉 정신적, 종교적, 사회-역사적으로 다른 모든 나라들은 벌써 우주시대를 향하고 있다면, 일본은 아직 구석기시대를 유지하며 그 시대의 유물인 돌칼을 만지작거리고 일본의 유일성이라고 자랑하며 칼을 휘두를 힘이 넉넉할 때는 그것을 타자를 향해서 강요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전통’일수록 그 기원을 은폐하면서 먼 과거로 소급해 가려는 욕망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근대기 제국주의적 천황제 국가가 기원전 6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기원을 조작’했던 것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박규태). 즉 기원이 천박할수록 조작해낸 거짓 기원을 오히려 강조하며 그것에 매달리는 문명의 후발주자들이 행하는 안타까운 하루살이 몸짓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지만 전후에 이런 과거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정직한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카구치 안고’(타락론, 속타락론)이나 ‘니시다 기타로’(일본문화의 문제)나 ‘가라타니 고진’(일본정신의 분석), ‘나카무라 하지메’(1919~1999 일본인의 사유방법/한국어 번역, 가까운 일본 낮선 일본, 2002)와 같은 사람들인데, 특히 나카무라 하지메의 지적은 통렬합니다(박규태):

 

  “개별적인 사실 또는 특수한 상황만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사유방법은 보편성을 상실함으로써 결국 무이론 내지 반이론의 벽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것은 합리주의적 사유에 대한 부정을 수반하면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직관주의 또는 행동주의로 치닫기 십상이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여러 가지 역사적 과오는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으며 그런 위험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부터라도 개별적인 현상이나 사실을 통해 보편적인 원리를 찾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0호 >에 실려 있습니다.

 

황혼과 여명 - 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을 위한 연구 바로가기


<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시리즈 >

제 99호 시리즈 (1)

제 100호 시리즈 (2)


제 100호 시리즈 (3)

제 101호 시리즈 (4)


<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시리즈 >

제 96호 시리즈 (1)

 제 97호 시리즈 (2)


제 98호 시리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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