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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보다’의 주인공, 최소리를 만나다!!

2019년 10월호(12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0. 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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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소리를 보다’의 주인공, 최소리를 만나다!!

 

타악기 연주자겸 화가, 지리산에 ‘아트인 청학’을 열다 
‘아트인 청학’을 열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입니다. 첫째는 저의 작업 공간을 갖고, 둘째는 다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시너지를 얻고, 셋째는 예술작가들이 집세와 먹는 것 등 외적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본인의 예술(음악, 그림, 문학 등)작품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겁니다. 타악기를 연주하며 예전에 ‘백두산’이란 그룹에서 활동하며 잘 나갈 때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지하방에서 생활하면서 집세, 음식 등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음악에만 몰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리라고 결심했는데 바로 이 꿈을 올해에 이루었다고 봐야 되겠죠. 하지만 웬만한 준비는 제 손으로 다 하다 보니, 몸이 감당치 못해 며칠을 꼬박 앓아 누워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이런저런 착잡한 생각들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트인 청학’을 다 갖추고 출발하기보다, 난관들을 하나하나 뚫어가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야 제 자신에게도 더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아트인 청학’은 이렇게 운영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500m고지에 있는 지리산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 레지던시(거주)하면서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1년 이상 혹은 평생 머물고 싶다고 할 때에도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그렇게 하려 합니다. 만약 방 하나의 주인이었던 작가가 1년을 머물고 나갈 때는, 그 방에 제가 아는 다른 사람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의 주인이 후임 작가를 지명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대 방주인은 그동안 모든 것을 후원받았으니, 나갈 때는 단돈 1만원이라도 본인이 지명한 2대 방주인에게 후원할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사용한 방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책임을 나누려는 취지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대에 걸쳐 서로 연결되고 그 방의 역사도 쌓여 가겠지요.
또‘아트인 청학’을 갤러리로 만들어 운영하고, 서울에 있는 뜻이 맞는 갤러리와 비즈니스 차원에서 관계를 가지고자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 골짜기 청학동에 관람객이 얼마나 오겠느냐며 반문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 돈을 들여 1주일 정도 그림을 전시해도 100명 정도 오는 것도 힘든데, 저희 갤러리에 1년에 한 번 전시를 해서 1000명 정도 온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하고요.
‘아트인 청학’ 갤러리의 특별한 점은 그림만 달랑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작업실을 방문해 작가와 직접 만나 대화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 상시 전시회를 갖고, 1년에 한 달 동안은 규모 있는 아트 페스티벌을 열어 그림도 전시하고, 연극과 영화까지 상영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또 이곳에 오셔서 쉬려는 분들에게는 방도 대여해드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일을 하다 배가 고파 먹은 단팥빵 세 개가 너무 맛있었다.’는 글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본 팬들이 단팥빵 1000개를 보내주셔서, 주변 분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는데, 무엇보다 팬들이 이 공간을 신명나게 후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장터에서 만난 드럼에 마음이 사로잡히다
어렸을 때 제가 살고 있는 시골 동네에 약장수가 들어왔는데, 밴드 악단을 조직하여 드럼과 색소폰 연주를 하며 약을 팔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그 장소에 못 들어오게 막았지만, 저는 엄청나게 맞아가며 끝까지 구경을 했지요(웃음). 그런데 제 눈에 ‘드럼’이 확 들어 온 겁니다. 특히 등에 북을 맨 아저씨가 발로 북을 치고, 손으로는 드럼을 치는데 어린 저의 눈에 너무 황홀했죠. ‘아! 나 저거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찌그러진 냄비와 솥뚜껑 등을 마구 두드렸어요. 덕분에 귀한 스텐 망가뜨린다고 할머니께 엄청 혼났습니다. 1년 이상을 젓가락이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으로 리듬을 타며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장구를 치고 있는데, 풍물 놀이하던 할아버지께서 “너 장구를 어디서 배웠냐?” 물으셨어요. 시치미를 떼고 “처음인데요.” 하니, “소리가 너무 좋다.” 하셨죠.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서는 곧장 드럼 치는 사람을 소개해 주신다며 저를 교회 지하실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눈은 휘둥그레졌죠. 바로 그곳에 드럼이 있었으니까요! 그길로 교회에서 먹고 자며 드럼을 배웠습니다. 사실 배웠다기보다 스스로 익혀간 거였죠.

악보를 보기위해 시작한 학교 공부
교회에 먼저 있었던 드러머 형이 치는 것을 보며, 그 리듬을 일일이 다 외우고 노트에다 제 나름대로 표시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사 뒤에 ‘두두둥 딱딱’하고 쓰면 2박자고, ‘두두둥 딱딱딱딱’하면 4박자를 의미했죠. 사실 저는 그 때까지 악보를 볼 줄 몰랐습니다. 본능적으로 쳤던 거였죠. 그런데도 ‘항상 열심히! 곧이곧대로!’, 눈에 불을 켜고 제 스스로 배우며 익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어쩜 이렇게 정확히 치냐’고 칭찬도 받고, 나중에는 드러머 형보다 제 드럼소리가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마침 그 형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제가 드럼을 차지하게 되었죠.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서부터 문제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드럼을 치는데 악보에 있는 도돌이표나 영어로 된 RR, LL과 같은 표시들을 몰랐던 겁니다. 제 무지가 탄로 난 거죠.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악기연주를 할 수 없었고, 합주는 더더구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득달같이 찾아가 ‘그동안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고 잘못을 빌고, 학교를 보내 달라고 졸랐습니다. 오로지 악보를 보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한 거였죠. 정말 열심히 공부해 악보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아무리 어려운 곡도 혼자서 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속에‘다 덤벼.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왜 크기가 작품가격의 기준이 되어야 하죠?
음악과 마찬가지로 15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그림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그린 ‘소리로 그린 작품’이 2000점에 달하지만, 한 번도 팔지 않다가 올해 4월‘토포하우스’에 전시하며 처음으로 판매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작품의 가격을 정하는 기준이 뭐냐?’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현재 미술시장에서는 1호는 10만원, 2호는 20만원 하는 식으로, 작품의 크기가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가격 결정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작품은 아주 쉽게 창작할 수 있는 반면에, 어떤 작품은 작가 자신을 전부 쏟아 부어 오랜 시간 만들어진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작품이라면 크기가 작더라도 값있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작가의 양심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소리를 그리다
‘음악과 미술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소리를 본다’라는 개념으로 예술을 접근하는 저에게는 더욱 그렇죠. 20년 전 음반을 낼 때부터 이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자연의 사물에는 소리가 있고 에너지가 있는데, 저는 그 소리를 충실히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게 제 예술 세계의 핵심입니다. 타악기로 사랑을 노래하려고 하면 소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연을 할 때는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거나 노래나 이야기를 같이 합니다. 표현을 극대화시키고 풍성하게 하려는 뜻에서지요. 더 나가서 저는 이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알루미늄, 황동, 동, 종이 등의 재료를 두드리고, 색을 채우고, 문질러 대고, 태우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의 ‘또 다른 나’와 만드는 파토스
저는 작품을 만들거나 공연할 때면, 내 속에 ‘또 다른 나’와 항상 합작하려는 자세를 가집니다. 즉 ‘나’(육체의 최소리)와 ‘또 다른 나’(영혼의 최소리)의 합작을 추구하는 거지요. ‘내 안에 있는 내’가 신명을 일으켜‘영혼의 나’를 의식하게 하는 겁니다. 만약 흥이 나서 해야 하는 동적 작업이라면, 먼저 제 몸 상태가 좋도록 작업실에서 춤도 추고 흥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작업해야 강렬하고 개성 있는 작품이 창조됩니다. 물론 정적으로 차분하게 작업해야 할 때는, 차 한 잔 마시면서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상태를 만든 후에 비로소 작업합니다. 무엇보다 최대한 나를 비워냅니다. ‘마음까지 다 쉬어버린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무의식중에 부드럽고 온화하게 저를 정비하는 것이죠. 이렇게 한 다음 음악이나 미술작품에 들어갑니다.
공연할 때도 삼매(파토스, pathos 열정)에 빠지곤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공연이지만 저에게는 작품 창작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의 나’와 ‘또 다른 나’가 하나 되어 북을 두드리며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죠. 연주하는 시간에 생각을 하면 그 연주는 망칩니다. 테크닉이 아니라 온 정열을 쏟아 부어, 모든 작품에 영혼이 느껴져야 합니다. 작품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작가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타악기 연주자로서 저는 정식으로 배운 것은 없지만, 파토스 상태에서 ‘또 다른 나’와 합작해 연주를 해야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힘없고 작은 나라는 모든 면에서 탁월하지 않으면 외국에 나간다 해도 관심을 받기 쉽지 않고, 마케팅도 잘 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40년 동안의 ‘소리를 보는’역사가 있고, 어디를 가든 ‘또 다른 나’를 끌어내어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가 자체가 예술이 되어 나온 작품은 외국 사람들도 알아보고 즉각 관심을 갖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술가들의 세계는 참으로 영악합니다. 너무 여건이 어려워서인지 서로에 대해 시기와 질투가 심한 편입니다. 아름다운 척, 예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전쟁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은 반드시 작가의 정신, 혼, 철학이 들어간 것입니다. 단순히 예쁜 작품이 아닌 진짜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화가들이 그다지 멋지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 현재 작업실에서 진행중인 작품


연주자에서 공연기획자로
지금까지 국가대표 예술감독으로 월드투어를 하는 6년 동안, 50개 나라의 200개 도시를 투어 했습니다. G20 정상회담, 광저우 아시안게임 폐막식 등을 기획 했는데, 공연 제목으로는 ‘탈’, ‘아리랑 파티’등이 있습니다. 공연을 기획할 때는 현장이나 공감 중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지를 명확히 설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양로원에서 공연을 하는데 순수예술을 한다면, 현장을 무시하는 것이 되겠죠. 또 모든 사람과의 공감은 덜해도 10% 광팬인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공연을 기획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해외에서 태권도 시범공연을 할 때는 딱딱하게 걸어 나와 몇 가지 격파 시범만 하고 인사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달력이 약하고 지루했죠. 그래서 저는 태권도에 비보이를 결합하고 때로는 한국무용과 신나는 타악 연주를 함께 무대에 올리는 것을 기획했습니다. 관객들의 환호가 엄청났죠. 그 뒤부터는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제가 한 기획을 따라하더라고요.

요리에 도전하다
아티스트로 음악과 미술을 동시에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지만, 지금은 요리에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를 사물을 통해 전해 들으며 계곡에 예쁜 돌들도 모으고 있지요. 이 돌들은 파티를 위한 그릇으로 쓰려고 합니다. 소리를 보는 것처럼 요리도 보는 것이죠.‘최 쉐프’요리 볼 날이 멀지 않을 겁니다.(웃음) 재료는 지리산 나물, 꽃, 약초 등을 사용하고요. 제가 요리를 하고 싶은 이유는 제대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싶어서입니다. 

앞으로의 계획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가깝게는 올해 횡성, 수원에서의 공연이 있고, 2020년 토포하우스에서 4월과 9월에 그림을 전시합니다. 내후년인 2021년부터 상해와 독일 아트페어 등 본격적으로 외국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처음 최소리 작가를 본 순간 ‘아! 지리산 도사를 만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이 분과 대화가 잘 이어질까, 더 중요한 것은 최소리 작가의 삶을 잘 전달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드리는 소리’를 ‘보는 소리’로 전달하고자 하는 만큼 소통에 대한 열망이 있는 분이었기에, 의외로 자연스럽고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천재성과 예술에 대한 통찰력과 탁월함이 자기 안의 또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될 때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아트인 청학’의 자신의 작업실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이젠 타악기 연주자로서 삶보다 소리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더 집중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안에는 작가의 세계가 투영된 동판이, 두드림의 흔적을 끌어안고 작품으로 탄생되기 전의 생생함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문화예술공간인‘아트인 청학’이 화가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의 온전한 ‘휴흘처’(休迄處- 마음이 다 쉰다)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2359
‘아트인 청학’최소리 작가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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