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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위해 잘 살거라!

2019년 10월호(12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2. 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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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위해 잘 살거라!

 

누구에게나 죽음은 불청객인가 봅니다. 
한 달 전 평소 연락이 없던 형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걸려오고, 뒤이어 급하게 울려대는 여동생의 전화. 웬일일까 잠시 생각하다 몇 번의 벨 소리가 울리고서야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습니다. 울먹이는 여동생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두 달 전 동맥경화와 숨 가쁨, 그리고 폐에 물이 차는 것 때문에 3주가 넘도록 중환자실에서 입원하셨지요. 평소 벼락같은 음성으로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시던 아버지는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실 즈음에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왜소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집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폐렴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곧 회복되실 거라 해서 다들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신장 투석 중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자식들 얼굴도 보지 못하시고 그렇게 급히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말이 없는 전형적인 부산 사람이었습니다. 대화는 단답식, 전화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지만 술을 의지하실 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그동안 가슴속에 욱여넣었던 감정과 울분을 끝도 없이 쏟아내셨지요. 초등학교 때 6.25를 경험한 세대이니 어릴 적 부모 잃은 설움과 아픔이 오죽이나 했을까요. 3남매를 둔 아버지는 시내버스 운전으로 가족을 부양했고,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대학까지 보내셨습니다. 무겁디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술과 담배로 위로하며 사셨지요. 퇴근하시고는 동네 술집에서 거나하게 드신 아버지가 동네방네 고성을 지르시며 대문에 들어서면, 어린 우리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쥐 죽은 듯 자 는 시늉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한바탕 훈계나 감정 섞인 말씀을 술에 지쳐 주무실 때까지 들어야 했으니까요. 집에 들어오면 2부가 시작됩니다. 또다시 소주 한 잔에 ‘가요 반세기’를 들으며 모든 시름을 잊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어요. 그러다 평소 불쾌한 감정과 기억들을 되뇌며, 상을 엎으시는 날도 많았지요. 술김에 쏟아내는 말은 때론 슬픔, 때론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두고두고 아픈 기억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우리 형제들과는 달리 새 가족이 된 형수는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낯설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수는 한동안 아버지와 등을 돌리며 지냈지요.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계실 때 등 돌리며 지내던 형수가 갑자기 보고 싶다며 넌지시 속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형수를 용서하시겠냐?’는 질문에, ‘그렇게 하겠다’하셔서, 형을 설득해 아버지와의 깊은 매듭을 풀도록 형수와의 재회의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형수가 방문했을 때는 아버지의 의식이 흐려져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하셨지만,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형수의 손끝으로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는지 과거를 하나씩 정리해 가셨습니다. 퇴원해서도 평생 잘 표현하지 않던 분이 작은 아들인 저에게 그동안 선물한 게 없다며 자식에게서 매월 받은 용돈을 아껴서 수 십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를 사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평소 같으면 다시 환불받으라며 왜 이런 걸 사셨냐고 했을 터인데, 작은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애써 표현하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에 눈물이 울컥해서 고개를 떨군 채 “잘 쓰겠습니다. 너무 좋아요, 아버지!”라는 말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당신과 엄마의 장례식 비용을 위해 상조회사에 두 구좌를 완납하고 가셨습니다. 꽃을 유독 좋아하신 아버지, 산본의 철쭉 축제 때 오셔서는 별천지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지요. 장례 화환 속에서 웃고 계신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며 어머니는 그때 기억을 다시 떠올리십니다. 

장례지도사가 굳어버린 아버지의 몸에 마지막 공을 들이는 염 의식을 지켜보는데, 굳게 다문 아버지의 입술은 제게 말씀하셨어요. “난 이제 기회가 더 없어. 내 삶을 돌이킬 기회 말이야. 하지만, 너희는 아직 남았잖니. 내가 살았던 부끄러운 모습을 잘 기억하렴. 그래서 나보다는 더 나은 삶을,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거라. 나처럼 술의 힘을 빌려 꾹꾹 눌러놓은 감정으로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잘못했으면 용서 구할 줄도 알고, 용서하며 살아라. 불의를 보면 지나치거나 비겁하게 살지 말고,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목숨이잖니. 사람답게 살다 죽는 게 더 아름답지 않겠니? 네가 보았듯이 죽음은 이렇게 불현듯 오는 거야. 그러니 죽기 위해 어떻게 살지 고민하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상갓집에 있다는 교훈을 잘 새기거라”

 

 

군포시 재궁동 최명길
iryatyahweh@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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