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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장례식은 안녕하십니까?

2019년 12월호(12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1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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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문화]

여러분의 장례식은 안녕하십니까?

지인의 장례식을 많이 다녀보아도 직접 상주가 되어보기 전까진 장례식장 안에서 벌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죠. 얼마 전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장례식은 안녕하신가요?

 


장례식 요지경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곳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많은 수고와 노력이 동원되다보니 이제는 집보다 장례식장에서 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버렸습니다.
처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제일 먼저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장례식장 담당자였습니다. 다짜고짜 체크리스트를 내밀고 고민할 잠시의 시간도 주지 않으며 선택을 강요합니다. 체크리스트를 받자마자 갑자기 빚쟁이가 된 느낌입니다. 한마디로 이러 이러한 곳에 돈이 들어가니 동의하고 사인하라는 겁니다. 생전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 가운데 뭘 선택해야할지, 왜 선택해야할지 대략 난감할 지경입니다. 부고의 슬픔을 간신히 달래가며 달려왔는데, 차가운 현실은 감상을 걷어내고 돈 앞에 저를 세웁니다. 잠시 정신이 혼미한 상황을 틈타 남들 다하는 기본 메뉴라며 살살 달래기까지 합니다. 
‘장례식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갔던가? 이건 또 무슨 항목이야? 아니 그럼 장례식장과는 별개로 상조회사에서 하는 건 뭐지?’ 등 온갖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별다른 선택 옵션이 없으니 일단 기본메뉴에 사인하고 찬찬히 내역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버지가 2구좌 완납한 상조회사에 부고소식을 알리니 장례지도사라는 분이 곧 오시겠다 하네요. ‘이분이 오면 이런 고민에서 해결될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지만 저의 기대를 산산조각내며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체크리스트를 제시합니다. 이러이러해서 추가로 돈이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상조회사 광고를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조회사에서 다 알아 해주는 것처럼 얘기하면서 이건 또 뭐냐”고 따져 물으니, 아버지가 드신 상조프로그램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 이런 옵션은 빠져있다는 겁니다. 
순간 상조회사의 상술에 낚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상복도 기본 몇 벌만 지원되고, 그 이상은 추가 주문해야 하고, 상복 안에 입는 흰색 셔츠 -옷감 재질도 전혀 알 수 없는 한눈에 보기에도 1회용으로 입다 버릴 정도- 벨트, 양말도 별도입니다. 이런 경험이 전무하고, 또 정신없이 달려오는 통에 하나하나 챙길 여유도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 현실 앞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듣도보도 못한 전문용어까지 써가며 아버지의 시신에 여러 단계의 염을 해야 한다며 우기기까지 합니다. 만약 필요없다라고 할참이면 마치 내가 아버지에게 불효를 하는 사람인양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항목을 하나하나 따지려드니 옆에 있는 여동생과 형이 아버지 가시는 마당에 효도 한 번 하자며 오히려 그 분과 한 편이 됩니다. 이런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기에 장례식장, 외주업체, 그리고, 상조회사는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모양으로 장례식이란 이름하에 나눠 먹기식 역학구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정작 위로받고 도움을 받아야 할 상주와 가족들은 봉이 되어서 얼떨결에 거금의 장례비용을 치러야 하지요.


죽음 앞에 평등함을 가르치는 유대 장례전통
‘사람의 죽음으로 돈 벌 생각하지 말라’라는 유대전통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전통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 평등함을 가르칩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죽으면 다 똑같은 수의를 입고 묻히도록 규정하고, 간단하고 조촐한 관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값비싼 장례식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전통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장례비용이 사람의 임종보다 더 부담이 되어 도망치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도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표현이나 진부한 것으로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손님은 애도자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애도 기간의 목적인 애도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제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요? 


장례식은 과거를 장례하고, 장래를 준비하는 시간
한국과 같은 인맥사회에서 장례식은 평소 잊고 지냈던 인맥의 끈들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각종 동문회와 직장,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몰려올 때 비로소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들의 방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의 장부에 갚아야 할 빚으로 남아서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올 때면 의무감이 되어 돌아옵니다.
며칠을 밤낮으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조문객을 받다보면 상주도 가족도 모두 기진합니다. 가족과 함께 ‘아버지’와의 과거를 추억하고, 감사하고, 정리하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각자가 돌아보아야 할 정말 중요한 시간이지만 정작 찾아온 손님을 맞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버리게 됩니다. 장례식이 끝나면 모였던 가족들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요. 철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오늘날 우리의 삶은 비즈니스(일)이지만, 당시(중세)의 삶은 존재였다’라고 얘기합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됨의 하나가 바로 죽음 앞에 선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시간인 장례식을 일이나 이벤트가 아닌 의미를 추구하는 시간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요즘처럼 바쁜 사회에 이렇게 온 가족이 며칠간 모여서 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렇기에 조문은 일과시간에만 받고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가족들과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나누고, 또 용서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으로 가져보면 어떨까요? 가족마다 그 속에 산재하는 풀지 않은 매듭들을 이 시간에 꺼내놓고 푸는 거지요. 또한, 각자의 미래와 가족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격려하고 세우는 시간으로 가져보면 어떨까요? 부조금으로 들어온 돈은 장례비용을 정산한 후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저축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죽음을 숨길게 아니라 죽음과 삶의 의미, 그리고 부모와 부모의 윗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역사성을 생생하게 가르칠 수 있는 산교육 기회로 삼는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우리의 장례문화는 유대인의 전통보다 나은 문화가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장례식은 안녕하신가요?

 

군포시 재궁동 최명길
iryatyahweh@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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