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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의 당신의 향기

2019년 12월호(12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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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미술 인문학 비평 8] 

김영목의 당신의 향기

 

당신의 향기 65.1x53.0cm 캔버스, 철사, 돌가루 위에 아크릴채색 2016 

 

아무렇게나 뒤틀어놓은 철사줄이 예술이라고? 이 작품을 흘깃 보면 바로 드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예술 작품들 속에서 잘 볼 수 있었던 분명한 형체와 진한 색채처리가 없으니 성의 없이 늘어놓기만 한 것처럼, 심지어 아이들이 놀다간 다음 남겨진 놀이터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바로 이 점에서 역발상을 시도했습니다.

“무심코 걷던 어느 날, 흔하게 보이던 철사 조각이 물음표로 만들어져 있는 겁니다. ‘어라?’ 무엇인가 확하고 머릿속을 지나치더군요. 아무 가치 없던 그것에서 내가 꿈꾸던 무엇인가를 발견한 느낌이었지요. 물음표처럼 생긴 철사조각을 들고 한걸음에 작업실로 향했습니다. 곧바로 캔버스로 옮겼습니다. 미래가 불분명한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오더군요. 물음표를 옮겨 그리며 과거의 일들이 지나갔고, 그것을 구체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다양한 철사들을 구부려서 젊은 날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헤어진 소녀 혹은 연인과 함께 해변을 걸으며 감상했던 풍경이나 분위기 등을 연상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철사는 아무렇게나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여인의 실루엣을 형상화하여 아주 탁월하게 표현해 냅니다. 정교하게 선택된 단 두 가지, 대단히 여성적 색깔들로 엉키어진 철사 조각들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실체인 철사 아래에 아크릴로 배경처럼 칠해진 것은 파도가 오고 가는 황톳빛 해안의 흔적을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구부러진 철사가 없다면 밋밋하거나 의미 없는 패턴의 벽지 같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정교하게 구부려진 그 실루엣을 가진 여성주인공이 그 위에 떡 배치되니, 배경의 의미조차 아주 풍성하게 살아나는군요. 더 자세히 보면 철사를 완전히 납작하게 면 위에 놓아서 아무 그림자가 없도록 하지 않고, 다양한 깊이를 드러내는 입체감을 조성하여 평면성의 한계를 극복한 점이 바로 우리가 감탄할 셋째 창조성입니다.

한국현대미술이 고전적 한국미술을 닮은 점은 바로 사상성(목적성)의 결여입니다. 모든 예술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일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위한 예술일 것인가의 양극단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동양 예술가들이 그 선배들과 닮은 점은 언제든지 그 중간에 서려고하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어둠침침하고 시커멓고 흐린 날씨의 독일은 신학, 철학에서는 이원론(이것이나 저것이냐), 표현에서는 시간예술(음악)이 잘 발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맑고 쾌청한 프랑스는 신학, 철학에서는 일원론(신학의 칼빈주의), 표현에서는 공간예술(미술)이 발달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프랑스는 미술에서 선도적입니다. 그런데 극단적 광기로 얼룩진 양차대전(1차대전은 인류발전에 대한 거짓확신, 2차대전은 악한 두 가지 이데올로기)때문에, 승전국 프랑스의 철학은 주로 비판적(부정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경향이 예술(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다보니 긍정적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이런 가짜 이데올로기 대신 인간이 가져야 하고 지닐 수밖에 없는 영원한 가치를 확신하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예술 경향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일상 행복의 추구, 단순한 감정, 감각 추구, 아름다운 과거 황금기(아르카디아)의 회상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가진 창조적 아름다움에 우리는 크게 감탄합니다. 하지만 작가나 우리가 전통적 동양의 허무한 세계나, 혹은 현대서양에서 배우며 그들조차 부딪힌 한계 안에만 머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아르카디아)에 잠기는 그 여인이 실은 커다란 위선 혹은 악의 화신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어떤 내적 혼돈이 생기지 않을까요? 또 귀족문화의 서민화를 꾸준히 추구해나갔던 근·현대 서양인들이 거실을 귀족의 집처럼 아름답게 꾸며놓아 정작 그 안락한 소파에 앉지만, 나른한 위선적 허무의 아름다움이 주는 썩은 냄새를 견디지 못해, 그것을 뒤집으려고 혁명에 혁명을 이어갔던 그 잔인한 현대역사를 우리까지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반대로 미술이 시대, 삶, 문화의 반영이 아닌 골방에 틀어박힌 혼자만의 표현의 반복이라면, 또 다시 동양의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변화 없는 허무한 삶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요?

 

 

경기도 군포시 서인성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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