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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의 겨울 이야기

2021년 1월호(13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2. 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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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 요트 이야기 13]

 

마리나의 겨울 이야기

 

마리나에 스산한 겨울이 찾아왔다. 한 낮의 온도는 3~5도, 김장을 하는 철이 되면 배들은 하나 둘씩 선내에 물을 빼고(윈터 라이징) 겨울을 준비한다. 서울의 겨울은 한국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춥다. 유라시아 대륙을 따라 시베리아의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오면 찬 기운을 막아줄 산맥이나 온도를 보존해 줄 만한 깊은 바다가 없어 그 바람을 그대로 맞는다. 태백산맥이 찬 기운을 막아주는 영서와 영동의 겨울 기온차는 4~5도, 남도와 서울의 온도는 6~7도 차이가 난다. 몇몇 선장들은 배를 꽁꽁 싸매고 육상으로 배를 올리던지 남도의 어느 따뜻한 마리나로 이미 배를 옮겼다. 


이 계절 남도의 여수, 통영의 마리나에 가면 외국 사진에 등장하는 크고 멋진 요트들을 구경할 수 있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항(凍港)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온 러시아 부자들의 70피트급 카타마란을 비롯해, 50미터 이상의 큰 요트들이 얼지 않는 한국의 남쪽 마리나에 정박하며 겨울을 난다. 겨울의 남도 여행을 마리나로 가보시길 권한다. 커다란 요트들 앞에서 사진 한 장만 찍어도 ‘플랙스’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전국의 여러 선장님들의 요트 라이프를 듣다보면 가장 부러운 삶을 사시는 분들이 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찾아오면 따뜻한 남쪽으로 항해를 떠난다. 남해, 제주, 오키나와 정도가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까지 요트를 타고 내려가 동남아의 섬들을 떠돌며 겨울을 보내다가 봄이 오는 계절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날이 좋은 가을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 노마드의 삶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사는, 말 그대로 팔자 좋은 선장님들이다. 하지만 겨울이 되어 더 큰 기승을 부리고 있는 코로나19는 여행에 있어서도 세계 평등을 만들었다. 코로나19로 다른 국가들의 국경이 닫혀 그런 시간 부자들도 올 겨울은 꼼짝없이 한국에 붙어 있어야 할 판이다.


인적 없이 스산한 마리나에는 철새인 검둥오리들이 무리지어 놀고 수도 동파 방지를 위해 3월이 되기 전까지 물도 끊어진다. 요트 세일링을 처음 배우던 해, 물이 흐르지 않는 한강은 마리나 구석부터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에는 세일링을 하지 않나요?” 세일링을 처음 배우던 선장에게 물었을 때 “추워서 못한다”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 세일링에 푹 빠져 바람만 있으면 춥건 덥건 나가고 싶어하던 내게 그 말은 몹시 불편했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보게 된 외국 세일러들의 동영상 속에서 나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북유럽, 그린란드 쯤으로 보이는 바다 위에 세일링 요트들이 눈이 쌓인 하얀 산과 빙하와 얼음 바다 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겨울 세일링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구나! 

 

 

여수에 있던 러시아 70피트(25미터) 카타마란 앞에서 한 컷


요트를 산 첫 해 겨울, 나는 부러 살얼음 낀 마리나에 나와 살얼음을 깨며 배를 전진시켜 보았다. 바사삭 부서지며 살얼음 위에 길을 만드는 세일링은 그 자체로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낮 기온이 영하 1도까지 떨어졌던 혹한에도 요트를 몰고 한강을 나갔다. 손끝, 발끝이 차가웠지만 견딜만 했다. 겨울에 배를 올리는 한국의 세일링 문화 속에서 몇 도 정도까지 안정적으로 나갈 수 있는지, 핫팩이 있으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알려줄만한 사람이 없었고 나는 직접 이를 실험해 보며 여러 기후들 속에서 경험을 쌓아 나갔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이 지났고, 추위 속에서 대략적인 실험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체험들 속에서 나는 겨울 세일링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다. 바람은 오히려 겨울이 더 시원하게 불고, 북서풍이 불 때는 하늘이 무척 맑고 깨끗해 이를 반사하는 물빛까지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비싸게 주고 구입하는 겨울 파카들은 그 성능이 무척 대단하다는 것, 그래서 햇볕이라는 열원이 있으면 온도에 관계없이 그리 춥지 않게 세일링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겨울에 때를 못 만나 해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어 올 겨울에는 꼭 그것을 해보려 한다. 바로 함박눈 세일링. 눈이 내릴 때 구름 낀 낮은 하늘 아래 세일을 펴고 한강을 전진하는 이벤트다. 세일링을 상징하는 여름, 바다, 수영 등의 흔한 클리셰 위에 함박눈 세일링이라는 서울의 독특한 세일링 모습을 전 세계 세일러들이 공유하는 SNS에 소개해 보고 싶다. 글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다음 주 일기 예보에 한파와 함께 함박눈이 온단다. 때를 기다렸으니 눈 쌓인 서울 한강 세일링의 멋진 사진 한 장 남겨보자.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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