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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그 릇    

2021년 1월호(13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2. 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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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그 릇

- 정호승 -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같이 음미해 볼까요? 
*진한 글씨체는 이해를 돕기 위해 표시했을 뿐입니다

2021년을 시작하는 시간에 이런 시는 껄끄럽고 너무 과격한 것이라고 여겨지나요? 오히려 치열하기도 하고, 새해도 그 고통을 이어가야 할 우한폐렴(코로나19)과 같은 냉혹하기도 한, 삶의 현장으로 직접 초대하니, 정말 적절하지 않나요? 이런 험난한 시절에 달콤한 거짓 위안보다는 살벌한 진실이 더 낫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선 어떤 구조로 시 전체를 구성했는지를 봅시다. 시인은 흔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범상한 현상을 관찰하는 첫 단계(1)에서 더 깊은 세 단계(2,3,4)의 삶의 실제로 나아갑니다. 단순히 개는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만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관찰하니 마치 구멍을 낼 요량으로 이미 비어버린 밥그릇을 처절하게 핥아대는 겁니다(6줄까지-1단계). 이어서 그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 인생 밥그릇을 그렇게 핥아본 적이 있었던가를 반성합니다(9줄까지-2단계). 개가 나보다 나은 존재였다는 데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 생각을 획기적으로 전환해 짐승인 개와 좀 더 우월한 존재로 스스로 여기는 인간인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 봅니다(13줄까지-3단계). 나에게 교훈을 주는 개이기에 내가 남긴 밥을 개가 먹듯이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내가 개처럼 그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를 자문해 본 겁니다. 이윽고 이 시의 절정이자 가장 깊은 실재에 도달하려는 용기를 발휘합니다. 개의 빈 밥그릇을 직접 핥아보기로 작정한 겁니다(마지막 줄까지-4단계). 피상적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면, 이미 감정이 찌뿌려져 가슴이 뜨끔해지며 시를 그만 읽고 시집을 덮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용기를 내어서 자신의 생애에 결정적 전환을 해 본 겁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거기서 환상적 체험을 하고 밑바닥을 치며 승화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릇에도 맛이 배어있으며, 심지어는 이미 비어버린 그 그릇에 비치는 햇살, 또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스민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무엇이든 그 밑바닥에 닿아보지 않고는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안도현)


그런데 실상은 개가, 개미가, 꽃이, 우주가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인생의 진실을 주위의 존재를 통해서라도 스스로 자각해야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화들짝 놀랄만한 진실을 깨닫더라도, 그것이 꼭 가치있는 진리로 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나의 놀라운 자각과 그 자각에 따라 엄청나게 변화된 행동조차, 내 죽고 나서도 영원히 남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 인간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도 창조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먼저 말을 거시고 먼저 행동해 주시는 분만이 우리 행동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궁극적 질문으로 정직하게 옮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늙어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에게서라도 기꺼이 배우는 분’에서, ‘개 같은 사람’을 거쳐, ‘개보다 못한 놈’으로 타락할지 모릅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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