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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방

2021년 3월호(13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3. 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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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방

 

자켓 속에 반팔을 미리 입고 떠난 여장임에도 베트남 떤선녓 국제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땀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초등학생, 유치원생의 두 아들과 이민 가방 두 개, 크로스 가방을 매고 두려움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검색대의 줄은 끝도 없습니다. 아이를 놓칠까 봐 손을 꼭 쥐고 수속을 밟았지요. 이민 가방 속에 잔뜩 싼 물건은 자주 균형을 잃었습니다.


삼십 대 후반에 떠난 타향살이는 사십 대 초반에 끝났습니다. 돌아올 때도 이민 가방 두 개만 갖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도 이젠 중학생,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이 가방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베란다에 쭈그려 놓았는데, 우물에 침 뱉고서 다시 그 물을 마신다고 오 년 전 필리핀으로 떠날 때 다시 그 가방에 여장을 꾸렸습니다. 이번에는 아이 한 명만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가방도 하나로 줄었지요. 


오늘 또다시 이민 가방에 짐을 싸고 있습니다. 큰아들의 독립입니다. 이부자리와 수건, 속옷, 양말을 챙겨 넣고 손톱깎이, 면도기, 샴푸, 세제와 신발, 출근복을 챙기니 삼단 가방이 빵빵합니다. 컴퓨터와 모니터, 드라이기, 냄비, 수저…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하니 끝이 없습니다. 
주말에 돌아올 아이인데도 짐을 빼자 방이 휑하고 내 마음도 뻥 뚫립니다. 검은 가방은 우리와 세월을 함께 하며 호치민으로 마닐라로 옮겨 다니다가 이제 오창산업단지로 갑니다. 돈만 있다면 몸 하나만 달랑 떠나도 되겠지만 집 떠나면 흔하던 물건도 다 아쉽습니다. 심지어 비닐 한 장마저도 꾸역꾸역 가방을 채우고, 무게 때문에 쩔쩔매고, 저의 삶의 호흡과 같은 가방과 함께 한 세월입니다. 


아이는 운전도 안 할 건데 일찍 면허를 따서 뭐하냐고 제 재촉을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지난해 면허를 따고 그 다음은 일사천리입니다. 인턴할 때도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타고 다니면서 동생 기숙사도 곧잘 들러 오곤 했습니다. 이제는 부모 없이도 둘이서 의지하며 잘 지내 걱정을 덜었습니다. 차 안에 짐을 넣어주고 홀로 집안에 앉아 홀가분함 속에서 쓸쓸함을 다스려 봅니다. 제 마음은 아직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훌쩍 커서 뿔뿔이 제 갈 길을 갑니다. 


이민 가방을 바톤 삼아 건네주고 저는 역할을 다한 주자로서 심호흡을 할 뿐입니다.
‘잘 뛰거라! 네가 뛰는 그 길은 갇힌 트랙이 아니다. 손끝에 와닿는 나뭇잎, 뺨을 스치는 바람결, 어느 순간 폭발할 듯 날아갈 것만 같은 짜릿함이 가능한 천변, 그리고 오솔길이다. 부디 엄마가 넘겨주는 이 바톤을 잘 이어받아 차곡차곡 네 삶을 꾸려나가길 빈다.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다.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나, 길 잃을 용기로 기꺼이 떠났던 수많은 여행지에서와 같이 너만의 길을 개척하길!! 사랑한다.’ 

 

의정부시 발곡고등학교 교사
《그 겨울의 한 달》저자 박희정

hwson5@hanmail.net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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