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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남한산성 답사

2022년 11월호(15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2. 1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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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남한산성 답사

남한산성 남문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정조 3년(1779) 8월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 동안 답사(?)를 떠났다. 답사를 떠나는 첫째 이유는 여주의 한 곳을 특별히 들릴 목적이었다. 정조는 여주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세종릉[英陵, 영릉], 효종릉[寧陵 영릉], 보은사[신륵사], 청심루[송시열] 등에 관한 말을 나눴다. 이 가운데 어느 곳이 답사의 첫째 이유였을까.

지금은 여주하면 세종대왕릉과 신륵사가 대표적인 명소이지만 정조의 나들이 목적은 효종릉 참배였다. 1779년은 효종이 서거한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지금은 1백 주년, 2백 주년이 큰 기념일이지만 예전에는 60년, 120년 등 60주기가 의미 있는 기념일이었다. 정조가 효종릉을 찾은 것은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당성과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었던 사대주의 ‘존명배청’ (尊明排淸)의 확인 작업이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봉림대군[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나중에 돌아와 소현세자 대신 조선의 왕이 된 효종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러 며칠을 묵었다. 정조는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흥인문을 거쳐 남한산성의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숭례문을 통해 강화도로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흥인문이 아닌 광희문으로 도망치듯 한양 도성을 떠났고 남한산성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남한산성 동문을 통해 들어갔다. 동문 앞에서 융복[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정조가 광진 나루를 거쳐 한강을 건널 때 사방에는 백성들이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정조는 “임금은 배와 같고 물은 백성과 같다. (군유주야 민유수야 君猶舟也, 民猶水也)” 라고 말하였다. 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 하는 것은 임금의 행차가 백성에게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임금에게 첫째도 백성, 둘째도 백성이 소중한 존재임을 천명했다.   

여주 가는 길의 중간에 남한산성이 있기 때문에 남한산성에 들르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정조는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남한산성의 역사와 나라를 지키는 방도에 대하여 신하와 수많은 문답을 주고받았다. 정조는 남한산성에 대한 공부를 미리 했었고 문답의 주인공도 자신이었다.

정조는 서장대 [수어장대]에 올라 병자호란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곳에 올라 온 청병을 백제 온조왕 덕분에 물리친 일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하루는 인조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적들이 서쪽 성벽을 올라온다고 전해주어, 깨어 군사를 보내어 적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일로 남한산성에는 숭절사라는 온조왕의 사당이 들어서 있다. 정조는 남한산성 행궁의 외행전에서 이곳이 병자호란 때 한봉에서 쏘아올린 청군의 대포를 맞은 곳이냐고도 물어보았다. 이처럼 정조는 남한산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병자호란 때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남한산성 객사에서 숙소로 쓰인 건물의 당호는 인화관(人和館)이다. 정조는 남한산성이 난공불락의 천험(天險)의 산성이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화가 부족해서였다고 하였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천시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인화만 같지 못하다’ 란 뜻이다. 아무리 천험의 요새라도 그곳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니 사람이 화합하지 못하면 천험의 요새도 쓸모없다는 뜻이다. 새로 왕이 된 정조는 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인화를 강조한 것이다.

동문에서 융복을 갈아입은 정조는 동문 근처 지수당(地水堂)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누가 언제 세운 것인가? 험한 산성에는 물이 귀한 법인데 사방이 연못물로 둘러싸여 있어 군인들의 식수로 쓰고도 남겠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당호의 이름 지수당은 산성에 있어서 군사와 관련된 이름으로 지은 것인가? 지수당의 ‘지수’란 이름은 주역의 지수사(地水師)괘에서 취했고 장인(丈人, 인솔자)이 잘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주역의 사괘(師卦)는 군사에 관한 괘이다. 아래는 감괘[물], 위는 곤괘[땅]로 이루어졌다. 노련한 인솔자가 바르게 군사를 이끌어야 길한 괘라고 한다. 용맹이 아니라 바름[貞=正]이 군사를 다루는 요체인 것이다. 나중에 지수당 옆에는 관어정(觀魚亭)이란 정자가 들어섰다. 관어는 제갈량이 물고기들의 유연한 몸놀림을 보면서 군대진영을 보았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 지수사괘인 지수당과 잘 어울린다.

정조는 병자호란 때 천한 신분이면서 목숨을 내놓고 성 밖을 오가며 구원군과 연락을 취했던‘서흔남’이란 사람도 언급했다. 지수당 옆에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서흔남의 묘비가 세워져있다. 정조가 한강을 건너며“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라고 말했던 물이 바로 서흔남이 아니겠는가. 

정조의 남한산성 답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7년 뒤 정조는 백성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였다. 수원화성의 원대한 포부도 그 출발은 남한산성 답사가 아니었을까.

 

 

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소장
naraname2014@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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