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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국가장례예식(2022.9.19)에 사용된 음악(찬송) 속에 나타난 해양문화의 저력

2022년 11월호(15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2. 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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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절대종교의 저력]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국가장례예식(2022.9.19)에 사용된 
음악(찬송) 속에 나타난 해양문화의 저력

 

 ‘잔치집 축하보다 장례식 조문이 훨씬 지혜롭다’
  문화의 저력은 생명의 시작보다는 생명의 끝에서 더 선명히 드러납니다. 생명의 탄생은 누구나 환하게 반기기 때문에, 문화가 발휘하는 능력의 차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종말에서는 문화 간의 차이가 너무나 밝히 드러나는데, 그 중요한 사례가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에 대한 국가장례예식(2022.9.19)에서였습니다. 이 예식 이후에 열린 유엔총회의 참석보다도 각국의 정상들은 이 장례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기를 쓰고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불량국가(러시아, 중공)는 조문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을 정도였으며, (영국의 제국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여 극혐하던) 한국의 좌파들은 자신들이 종교처럼 숭상하는 이데올로기보다 현실 세계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조문(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윤대통령을 향해 나라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고 타박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엄위롭게 생각하는 순간은 역시 탄생보다는 죽음이기 때문에 ‘잔치집 축하보다 상가집 조문이 훨씬 지혜롭다’는 보편 인간과 만국공통의 진리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따르는 것이겠지요. 현재의 영국은, 새로운 부자감세라는 헛발질로 실각한 트러스 수상으로 우리가 수치스럽게 겪었던 IMF에 빠질 지도 모른다고 판단해서,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은 역사도 너무 얕으며, 서로 섞이지 않는 민족들이 모인 가운데 국민정체성도 중구난방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 (America is not a fact but a phenomenon)처럼 보일 정도로 허황됩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세계질서를 갈구하는 우리를 비롯한 수많은 작은 나라와 국민들은,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명성을 유지한, 역사적 유구함, 문화적 힘, 정치경제적 위상 등을 가진 영국과 같은 안정적이고 문화통일적이고 역동적인 가운데 세계 패권을 장악한 나라가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특히 전형적인 대륙문화적 행동인 땅따먹기에 그렇게 몰입하며 세계를 위협하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두 국가(러시아, 중공)가 현재 21세기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적 패권과 종교와의 깊은 상관관계
  이렇게 
  a) 두 깡패국가(러시아,중공)가 패권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고 설령 잡았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 
  b) 미국의 패권이 결코 안정적이지 못하고 늘 흔들흔들하는 이유,
  c) 정반대로 영국의 국제정치적 패권이 오래갔던 이유가, 특이하게도 이번 장례식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패권의 강인함은 그 나라의 종교적 기초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1) 러시아의 정치는 처음부터 종교가 철저히 정치의 시녀였던 동로마교회적 전통을 이어받았고, 로마노프 왕조에는 그것을 더욱 강화시켜 완전히 교회를 정치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 점은 모스끄바 대주교가 최근에 우-러전쟁의 전투에서 사망한 러시아 군인을 순교자로 칭할 정도로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2) 중공의 경우는 인류가 동쪽으로 이동하며 절대신을 상실해 가고 만물이 신이 되는 만신교(브라만교,힌두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신이 되는 불교에 이어 더 동쪽으로 이동한 중국 대륙에 이르러서는 아예 절대신은 상실되어 귀신,조상신 정도로 퇴화하며 조상 혹은 왕,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전통 위에, 또 하나의 대륙문화적 흐름인 절대신 대신 이데올로기나 그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고 해석하는 자가 절대적 지배권을 가지는 공산(사회)주의가 덧붙여졌습니다. 스딸린의 일국사회주의에 이어 북한의 주체사상에 의한 북한식 왕조공산주의를 그대로 본뜬 중국식 사회주의인 황제공산주의 자체가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3) 미국은 위의 두 나라와는 정반대로, 일천한 역사 속에서 너무나 다양한 전통과 인종들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정(치)종(교)분리원칙을 강조하다 보니 종교의 정치를 향한 순기능 자체를 막아버렸습니다. 이런 원칙을 취하게 된 이유는 미국의 출발점이었던 영국의 헨리8세가 자신의 결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당시 일기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왕 스스로가 종교의 수장이 되었다고 선포한 수장령(1534)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교회적 관습은 구교(로마교)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교리는 개신교의 것을 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차츰 명예혁명(1688)이후, 정치적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소위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어갔고, 종교적으로는 다양한 주장들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수용해 갔습니다. 미국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청교도들(1620)은 영국국교회의 미진한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자신만의 나라인 미국을 시작했을 때 자연스럽게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쪽으로 가게 된 겁니다.
  이렇게 1) 정치의 철저한 종교 지배(러시아), 2) 종교 자체로 변질된 정치(중공), 3)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미국)라는 세 길 외에 전혀 색다르고 건강한 길을 걸어간 나라들은 없을까요? 세계 패권을 장악한 영국이 그러하고, 그 전에 패권을 잠시 장악했던 네덜란드가 그러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수장령 때문에 왕이 종교를 지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용성,현실성을 추구하는 영국의 전통은, 모스끄바 공국-로마노프 왕조-소련-현대 러시아의 종교를 질식시켜 정치마저도 파멸에 이르는 7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룬 러시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영국이 이룬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관계를 이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특히 장례예식에서 불렀던 찬송 속에서라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영국을 통치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의 죽음을 맞이해 전 세계에 방영된 매우 공적인 예배와 찬송을 통해서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난 겁니다.           

  상대종교적 문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한민족이 매우 특이한 이유는 상대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가 출발한 본산지보다 더 그 종교를 절대적으로 섬겼다는 겁니다. 이런 오랜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불교적 죽음과 유교적 죽음, 그리고 그 예식이 주는 매우 침울하고 무겁고 음산한 분위기를 몸으로 잘 압니다.
  먼저 불교적 죽음은 불교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불교는 아리안족이 서쪽에서 인도를 휩쓸며 지배한 후, 그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만든 브라만교를 반대하며 형성되었지만, 그 윤회관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정치적 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는 정치적으로 고정된 수많은 카스트(제사장→최고통치계층→전사→농부→기술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태어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허무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카스트와 관계없이 평등하지만, 생명체의 현재 상태는 전생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정도와 관계된다고 보는데, 이런 윤회의 고리를 끊고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원리를 여러 가지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1) 여덟 가지 의로운 행동인 팔정도(八正道)를 행함, 2) 고행, 수행함, 3) 경전을 열심히 연구함(고려의 팔만대장경 제조), 4) 참선 행함, 5) 남무-아미타불(아미타불에 귀의함)을 수없이 읊조림(원효), 6) 남무-묘법연화경을 읊조림(일본-남묘호렌게쿄), 7) 모든 인간은 결국 부처임(일본). 이 중 하나를 열심히 행한 내가 죽었을 때 과연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 앞에 처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불교적 예식은 매우 불투명하며 아무 것도 보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교적 죽음 역시 유교적 원리와 깊게 연관됩니다. 공자 자신이 사람의 일을 모르는데 귀신의 일은 어떻게 알겠는가 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중국에서 발전해 간 주례→유학→유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사회에서의 현세적 삶을 말하는 것이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직 조상의 혈통을 이어가는 현재적 가족만이 중요합니다. 설과 추석 때에 전 국민이 기를 쓰며 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조상에게 차례 드리는 것이 습관화된 유교의 제사는, 오직 공자가 확증하지 아니한 조상의 원혼이 떠돌다가 후손을 방해하지 않고 축복해주기 바라는 의식일 뿐입니다. 이런 1) 궁극적으로 현재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추구한 공자에 덧붙여서, 2) 맹자와 장자가 인간의 본성으로 유학의 원리를 확장하였고, 3) 한대의 동중서는 유학의 보수성(부모에게 효도하고 왕에게 충성)을 황제를 섬기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삼아 유교라는 국가종교를 만들었으며, 4) 송대의 주희는 인간까지 넘어선 만물의 본성을 기와 이의 두 갈래로 설명하려 했고, 5) 명대의 왕양명은 인간의 마음에 집중하였다가, 6) 청대에 이르러 고증학은 결국 모든 해석을 뒤로 하고 다시 공자에 집중한 후에 중국의 유교는 소멸한 것입니다. 즉 죽음 이후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단지 이 생애가 끝나는 것에 대한 슬픔과 공포만이 짓누를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예식에서 사용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절대종교적 기초에 의한 찬송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절대종교 기독교의 기초 
  일단 이번 여왕의 장례식에서 직계가족들의 슬픔은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대체적으로 상대종교적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암울함, 어두움, 비관적임, 허무함, 무기력함 등의 감정은 찾거나 느껴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절대종교 기독교의 기초가 바로 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자신이 인간의 손에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했다는 증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십자가 죽음을 선언한 빌라도를 향해 ‘(언도하는) 너의 책임도 있지만, 너에게 나를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라고 엄위롭게 선언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순간에 이런 인간들이 자기에게 행한 행위를 대인이나 위인처럼 넘긴 것이 종교의 기초였다면, 기독교는 별 볼일 없는 종교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1)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죽음 자체가 모든 인간이 행한 행위에 대한 자비롭고 공의로운 심판으로서의 영원한 죽음을 대신한다는 것이 보편적 진리이며,
  2) 심지어 그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정복하는 행위가 예수의 죽음이며,
  3) 더 나아가 그 죽음의 원인자 되는, 온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사탄에 대한 궁극적 승리가 되며,
  4) 그 죽음에서 예수가 처음으로 부활하여 모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사례이며,
  5) 아무 값을 치르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이런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반대로 이런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원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 이 여왕의 장례식에 나타난 절대종교적 기초였습니다. 

출처-애틀랜타 중앙일보


  물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개인의 매우 오랜 생애는 공과 과가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다윗왕조차도 남의 아내를 탐내어 그 남편을 비겁하게 죽이는 죄악을 범했지만, 철저히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고 왕조의 연속성이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자비와 공의에 절대적으로 의탁했느냐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지 개별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는 겁니다. 죽어서 이 관 안에 놓여 부스러져가는 여왕은 한 때 통치를 했지만, 이 예식에서는 일개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선 자일 뿐이며,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가 죄지은 인간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죽어 지옥까지 내려간 공로를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다는 사실은 절대종교적 장례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보인 것입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총장의 선언에도 그녀는 단지 이 자비를 받는 한 개인이기에, 우리 이 자매’(this our sister)로 매우 담백하게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장례예식에 사용된 음악(찬송)에서 나타난 절대종교의 하나인 영국국교회의 역사회고적 모습

  이번 장례의식의 여러 절차 중 우리는 예식에 사용된 찬송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성가대의 찬송, 오르간 연주, 회중의 찬송의 곡과 가사에 절대종교의 일부인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다양하고 갈등하면서 풍성해진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처음에는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정치에 있어서 선출직 국회의원에게 총리를 맡기는 입헌군주제(1688)를 시행하면서 종교에 대해서도 상징적인 군주로만 역할해 갔습니다. 17세기 청교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국교회의 핍박을 받은 청교도 중 일부는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교의 관습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주요 쟁점이었기 때문에 청교도인들도 점차로 영국교회의 일부가 되어갔습니다. 또 18세기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며 형식을 초월한 야외선포 등으로 이전의 전통에 배치되었으나 이 또한 거대한 영국교회의 전통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세기의 선교운동, 성서공회운동, 사회(윤리)개혁운동, 금주운동, 노예해방운동, 정치질서개혁운동 등이 영국 전역에서 일어날 때, 이제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이 흐름을 타며 영국의 전체적,종교적,사회적,윤리적 수준을 대폭 높였습니다. 20세기에는 영국의 정치적 중요성이 미국에 비해서 서서히 낮아지며 패권까지 상실해 갔으나, 1~2차대전에서 연합국 중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여 국가/공산 사회주의의 두 나라(독일,소련)의 세계 패권의 장악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절대종교 기독교가 영국사회와 역사에 밀접한 관련을 맺어가면서 지낸 지난 5백여 년의 역사는 그 어떤 나라도 흉내낼 수 없는 역사적 유산이 되었는데, 우리는 그 자취의 극히 적은 일부만을 여왕의 장례예식의 찬송에서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장례예식에 사용된 찬양들을 현재에서 역사를 거꾸로 소급해가면서 살펴보고 지금의 21세기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20세기 : 랄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1872~1958)가 작곡한 찬송인 “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난처를 찾은 이는 복되도다”(시편 34:7)가 사용되었습니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2006,2007)의 주제곡인 ‘날아오르는 종달새’ (The Lark Ascending)라는 지극히 영국적 가락을 작곡한 본 윌리암스는, 스승인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로부터 자기에게 배운 제자 중에서 가장 자신을 닮지 않은 독창적인 작곡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대륙인들의 전형적 패턴인 하나의 이데올로기(그 때는 (후기)낭만주의)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종교적으로 숭상하면서 따라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했으며, 대신에 영국적 전통(종교와 민속)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채집했습니다. 이 곡은 원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1953.6.2)에 사용하기 위해서 시편 34:7을 따라 작곡하도록 지정 청탁되어 만들어진 곡인데, 여왕의 장례식에 다시 사용된 겁니다. 시34편 전체는, 고통을 겪은 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경험한 시인의 찬송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도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대영제국의 세계 재패의 서슬 푸른 전통이 여전히 강하던 시절에 통치를 시작하는 여왕을 향해서 그런 간절함을 하나님을 향해 가지라고 권고하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제는 그 통치의 권좌를 모두 내려놓고 하나의 자연인으로 돌아가, 죽음과 그 이후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하나의 인간으로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19세기 : 헨리 본(Henry Vaughan, 1621~1695)의 시인 내영혼아, 별들이 미치지 못하는 한 땅이 있도다(My soul, there is a country, Far beyond the stars)허버리 파리(Hubert Parry, 1848~1918)가 작곡한 것을 성가대가 찬양하였습니다. 이곡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순수한 사랑으로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신 자비로운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에 대한절대적인 의탁을 권면하는 찬양입니다. 또 세인트 클리멘트 존 엘러톤(St Clement John Ellerton, 1826~1893) 클리멘트 스콜러필드(Clement Scholefield, 1839~1904)의 회중 찬양인 주여, 당신이 (나에게) 주신 날이 끝났나이다(The Day Thou gaves, Lord, is ended)의 찬양입니다. 이 곡은 여왕의 할머니이며, 영국의 최전성기를 다스렸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통치는 1837~1901)의 60주년 통치기념식(Diamond Jubilee,1897)에서 불렸던 찬양이기도 합니다. 1절의 첫 소절부터 즉각 어떤 마감,죽음 같은 것에 마주치는데, 할머니와 손녀의 장기 통치의 마지막을 모두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 끝났음으로 솔직담백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왕,황제 통치를 절대적으로 높여 찬양하는 동양의 국장 내용과는 정반대이며, 아무리 강력하게 최장기로 통치해도, 한 소박한 인간에게 허용된 시간이 지나갔을 뿐임을 회상한 겁니다. 특히 4절의 가사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다음과 같기를 기원하나이다! 주여, 당신의 보좌는 스러져버리고 말 이 땅의 교만한 제국과 절대적으로 다르며, 당신의 왕국은 모든 당신의 피조물들이 지나갈 때까지도, 우뚝 서서 영원히 성장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런데 이 찬송과 관계된 매우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곡은 홍콩을 중국공산당에게 반환할 때(1997)의 예식에서도 불러진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이 불의한 목적으로 강압하여 일으켰던 아편전쟁(1842)의 결과 100년 동안 조차한 홍콩 통치의 과거가 끝남을 회한을 담아 안쓰러이 조망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훨씬 더 악한 공산당에 의해서 홍콩, 그리고 그 중국 자체가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을 바라보는 고통도 이 가사에 담아내고 싶었을 겁니다.  

  18세기:수많은 찬송을 작사 및 작곡한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1707~ 1788)의 ‘신적인 사랑이시여!’(Love Divine)는 영국의 모든 교파와 교단이 사랑하는 국민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는 형인 존 웨슬리와 조지 휘필드와 함께 영국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핵심 주역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으로 떠난 청교도는 새로운 국가를 이루었지만 남아있던 청교도는 소멸되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낸 가운데 일어난, 영국의 사회와 교회에 벼락같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현재 사용되는 곡 자체도 탁월하지만, 가사가 신학적으로 점진적 발전을 이루며 매우 깊고 풍성한 내용을 지녔습니다. 이런 가사와 곡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깊고도 겸손한 영성, 또 섬세하고도 풍성한 감성을 지닌 절대종교가 배출한 위대한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17세기: ‘랄프 본 윌리엄스’가 20세기에 작곡하여 이번 장례예식 시작 전에 오르간으로 연주된 곡이 교향곡 5번 D의 3악장 Romanza입니다. 이 교향곡은 2차대전 중에 수많은 고통 가운데 희생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작곡가는 젊었을 때 교회안의 불의와 신학적 무지로 불가지론자가 되었으나 점차로 절대종교 그 자체의 중요성을 알아가면서 특히 17세기의 가장 유명한 문학가인 존 번연(John Bunyan,1628~1688)의 작품에 몰입하였습니다. 그는 이 곡의 핵심을 표현한 3악장을 위한 가사 존 번연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1678)에서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당신 자신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도다.” 그 어떤 고통과 죽음이라도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미리 직접 경험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때, 인간에게 밀려오는 회한,증오,미움,안타까움 등의 감정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깨닫는 필그림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실제로 청교도는 여왕이 형식적 통수권을 가진 영국국교회의 핍박을 받았고,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존 번연 자신입니다. 이제는 청교도인 그도 영국교회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되어서 여왕의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찬송으로 변화되는 역설이 일어난 겁니다. 

  17~16세기(종교개혁기):성가대가 찬양한 곡으로 헨리 퍼셀(Henry Purcell,1659~1695)의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짧은 생애만 살 뿐이니, 생명의 중간에도 우리는 죽음 가운데 있도다.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의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Z58)는 영국국교회의 공식예식서인 The Book of Common Prayer(1549)의 가사로 작곡한 것입니다(1672). 살아있는 중에서도 죽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으며, 죽음을 맞이해서도 이미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부활한 생명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중적 지혜로 삶을 바라보는 초월적 삶을 찬송한 겁니다.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뼈저린 절망조차도 자리할 곳이 없으며, 단지 창조주가 허용하였지만 스러지듯 짧디짧게 지나가는 내 인생에서의 자유와 그 자유에 대한 책임있는 삶만이 실존할 뿐입니다.  

  2천 년 전의 성경 자체를 가사로 선택 : 21세기에서 2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신약과 구약성경에서 가사를 택한 찬송들이 소환되어 장례예식에서 회중이 아닌 주로 성가대에 의해 찬양되었습니다. 이 가사들은 모두 절대종교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죽으시고 먼저 부활하심으로 모든 고통의 원인인 죄와 그 결과로서의 죽음을 정복했음을 모든 죽어가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선포하는 본문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제국의 여왕이지만 심판주 되시는 절대자가 자비로 열어놓은 길을 절대적으로 따라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선언하는 본문들입니다.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25~26).
  2)내 구속주가 살아계심을 내가 아노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가 내 두 눈으로 그를 똑똑히 보리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기 11:25~27)
  3)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디모데전서 6:7, 욥기 1:21) (윌리엄 크로프트 William Croft,1678~1727)의 곡
  4) 내가 하늘로부터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도다. 이렇게 쓰라. 지금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도다”(요한계시록 14:13) (윌리엄 크로프트 William Croft,1678~1727)의 곡
  5) 여왕이 평소에 가장 사랑한 10가지 찬송 중의 하나가 회중들에 의해 찬양되었습니다. 다윗왕(King David)의 생애를 요약하며 만든 유명한 시편(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것도 부족함 없네” (The Lord is my shepherd). 한국교회에서의 피상적이고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1~2절은 인생의‘청년기’, 3~4절은‘중장년기’, 5~6절은‘노년기’와 생애의 마지막을 나타내어 인생의 전 과정을 관통하면서 하나님께 올린 찬양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차대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했으며, 그 후 제국이 세계 패권을 상실해 가면서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의 10대 강국으로 서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과 애씀을 회고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께서 (거의 죽을 뻔하였던) 나를 다시 소생시키시고, 당신 이름 때문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이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로잡은 대적을 내 앞에 무릎 꿇게 해놓고 내 머리에는 향기로운 기름으로, 내 잔에는 포도주를 넘치게 부으시나이다.

  21세기 : 이런 장구한 절대종교적 전통 위에서 다시 21세기, 여왕의 장례식 당일로 돌아가 봅시다. 장례식 위원회는 이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을 위해 특별한 작곡을 하도록 생존하는 1954년과 1959년생의 두 음악가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첫째 곡은 쥬디스 와이어(Judith Weir CBE)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오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을 갈망하나이다’(시편 42편)입니다. 작곡가는 여왕과 개인적으로 음악적으로 종교적으로 깊은 친분을 쌓아왔으며, 그녀가 어떤 찬송을 좋아하며 어떤 영성을 추구하였는지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이 시편은 단비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조만간에 차분해지다가 드디어는 ‘네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확고한 믿음을 외부를 향해 선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시편임을 의식하고 작곡에 임했다고 합니다.
  둘째 곡은 제임스 맥믹런 경(Sir James MacMillan)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그 어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 35~39)입니다. 예수 자신이 죽음은 모든 인류를 고통에서 해방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기에, 육신의 죽음조차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절대종교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절규에 가깝도록 선언했습니다. 세계를 호령한 제국의 여왕의 장례식에 가장 걸맞은 표현인 셈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7>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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