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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K-Drama, K-Movie, K-Food, K-Dress, K-Culture…What next? K-Religion, K-종교!

2023년 4월호(16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2. 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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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비평 ]

 

K-Pop, K-Drama, K-Movie, K-Food, K-Dress, K-Culture…
What next? K-Religion, K-종교!
  “한국인들아, 내가 너희를 보니 모든 일에서‘종교성’이 많도다”
(사도행전 17:22)

 

 

전 세계에 널리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는 한국적 삶, 한국인의 문화 
2020년에 시작되어 지금은 끝나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전후로, 한국은 ‘정치적’으로,‘문화적’으로 전 세계에 선진국으로, 고급문화 생산국으로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먼저‘정치적’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일제에 의해 많은 것이 수탈되고, 한국동란으로 모든 것이 철저히 붕괴되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백년이나 걸릴 거라고 맥아더 장군까지 말한 나라였습니다. 바로 그 나라가 전 세계에서 원조 받던 데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한 유일한 경우가 되었으며, 이제는 명백하게 선진국으로 여겨져서 장차 G-8에 포함될 것이 예상되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고래의 분쟁가운데 끼인 작은 새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정할 결정적 키를 쥐고 있는, ‘새우에서 고래로 변한 나라’(Shrimp to Whale)로 묘사되기도 합니다.1) 실례로 초강대국 미국이 IRA나 반도체법(ChipAct)으로 중국을 잡으면서 동시에 한국도 잡으려는 전략으로 미국에 제조업을 가져가겠다고 억지를 부리지만, 삼성은 300조를 미국이 아닌 한국의 용인 근처에 투자한다고 발표하여, 미국이 플라자 합의로 기고만장했던 일본을 잡아 잃어버린 30년을 시작하게 만든 것처럼, 한국은 당하고 있지 않을 묘수를 계속 찾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우리는 아무리 바로 위에서 중국과 북한이 위협해도 지난 수 천년동안 중국을 다루어온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지방에서 1억 채 이상의 (‘산 사람은 많으나 사는 사람이 없는!’)부동산 거품과, 엄청난 돈을 약한 나라들에게 빌려주었으나 상환이 거의 불가능한 일대일로 정책을 전 세계에 수행하여 봉착한 재정위기를 타개하려고 대만을 침공해 동북아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그것을 이길 지혜를 우리는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이어서‘문화적’으로는 무엇이든지 앞에 K-자만 붙이면 전 세계적 유행이 되어버리는 현실입니다: K-Pop, K-Drama, K-Movie, K-Food, K-Dress, K-Weapon(방산)… K-Culture. 그래서 앞으로 그 어떤 것 새로운 것 앞에 K를 붙여도, 새로울 것이 없어 심드렁해지기도 할 겁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속으로는 우리 문화가 과연 그렇게 세계적인 것이 될까를 생각하며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나, 쉽게 찾는 유행은 그만큼 거품처럼 쉽게 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조지프 나이 부자(父子)를 따라서, 한 국가가 가지는 힘 중에서, 국토가 크지 않고 자원도 별로 없으며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가 배양할 수 있는 힘은‘문화의 무형적 힘’인 소프트파워이며, 그것으로‘문화의 유형적 힘’인 하드파워(군사력,경제력 등)를 가진 나라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여기며 우리에 대한 세계적 선호를 정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2) 그렇지만 문화, 특히 대중문화와 같이 즉각 감각되는 문화(명)의 유행성,효용성이 단 3년인 것을 감안하면, 결국 우리는 과연 인간 삶의 총체로서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나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쉽게 창작되고 쉽게 소비되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온돌,한옥,한식 같은 매우 오랫동안 누적되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자랑할 만한 문화적 결과물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북에서 38선을 넘어 남한에 와서 다시 미국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도 세계최강이 되는 나라- 이민가기로 작정한 나의 부모와 친척들과는 다르게, 지정학적으로 살아남기 최고로 힘든 이 한반도에서 후손들과 오래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과연 총체적이고 오래갈 가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나라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마저 가졌던 정치적,경제적,문화적,산업적 패권이 오래가지 못하여,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 아수라장이 벌어질 위험이 느껴지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역설적으로 적어도 한 번은 세상이 돌아가는 역사적 방향타를 쥘 매우 중요한 기회가 바로 이 작은 땅에 주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이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이 땅에 꾹 눌러앉아서 온갖 어려움이라도 헤쳐 나갈 것을 각오하는 분들이라면, 우리는 인간 삶의 총체로서의 문화를 전혀 새롭게 정의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려고 애쓰시는 분들이라고 예상하고 이 글을 씁니다. 물론 외국의 유수한 대학에 겨우 1년을 교환교수로 있으면서도 데리고 온 자녀들에게 온갖 재정적 준비들을 해 주어 자녀를 그 곳 중·고등학교에 남겨 그 나라의 최고 대학에 진학시키거나 외국 생활 특전을 받아서 한국의 최고로 좋은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노리는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어떤 분처럼 10여 년 유학생활 후에 부모와 함께 한국어에 어눌한 아들 3형제를 귀국 후의 생활환경을 따라서 수도권의 똥통 동네로 의연하고 과감하게 밀어 넣기로 작정한 분들이 이 땅에 많다면, 이 땅에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확신,기대, 위에서 주시는 일종의 문화적 사명감 같은 것이 퍼져나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서양문화(명)의 수납에서 실패한 중국과 일본을 우리는 뛰어넘을 수 있을까?


점점 좁아져 하나가 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언제든지 부딪히고 해결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겁니다. 여러 분과로 세분화된 첨단 서양식 병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방의원들 역시 사라지지 않는 한국의 현실은, 아직까지 이 둘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동양의 끝자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쇄국했던 우리보다, 더 일찍 서양문화(명)를, 동도서기(東道西技),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의 기술(문명)이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받아들였던 중국과 일본은 과연 성공했을까요? 지난 100여년 이 두 나라의 역사는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먼저 일본은 당시 메이지유신 정부요원의 거의 반 정도가 서양을 1년 이상 유람했을 정도로 서양문화(명) 흡수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일본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외형만 서양의 것으로 뒤집어 쓰려다보니, 정치사회학적으로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일본인의 탁월성과 다른 동양인의 열등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복과 지배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80여년 가까이 아주 당연한 듯이 일으킨 세계사의 원흉이 되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문화(명)의 쓰레기이며 21세기까지 온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된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서, 중국 자체 속에 오랜 역사를 통해 내재화된 현세중심적,물질주의적 정신성 황제숭배에 익숙한 정치적 자의식 위에 일본처럼 덧씌워, 14억의 인구가 시진핑 1인 천하의 공산당황제주의를 섬기는 괴물국가가 된지 벌써 100년(1921~2023)을 넘었습니다. 이 두 나라 일본,중국 역사의 공통핵심은 지난 150여 년 동안 인간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중심사상이며 종교화된 신념 같은 것을 정상적으로 형성하는데 철저히 실패했다는 겁니다. 즉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를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간행동에 근본적 동기를 부여하는 종교적 신념,확신을 제시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런 두 나라의 처절한 실패를 보면서, 지금 K-Culture가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번 현상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또 단순히 우리만 생존하고 탁월하게 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민족이 전 세계를 이롭게 하도록 우리 손에 역사의 수레바퀴의 손잡이를 잡을 기회가 온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국뽕일까요? 그렇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중국,일본이 실패하였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 즉 인간 행동의 근본적 행동 동인인 종교적 신념에 있어서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의 일체화가 아닐까요? 즉 세상을 이롭게 하는 K-Culture의 본질로서의 K-Religion을 정립하여 세상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ChatGPT시대에서 한국인은 K-Culture로 무엇을 제시할건가?  K-Religion!


그것을 다루기 전에 우리 민족이 매우 뚜렷한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전 국민이 참여하여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일어선 민족으로 근현대 역사 속에서 세상의 칭찬을 받은 세 가지 빛나는 사례를 생각해 볼까요? 일제시대의 국채보상운동(1907), IMF시절의 금모으기 운동(1997), 1년 만에 서해안(태안)을 원상복구한 원유유출청소(2007)입니다. 세계인들에게 민족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귀감을 보인 일들이며, 앞으로 유사한 어려움이 일어나더라도 비슷하거나 혹은 더 놀랍게 행동할 것입니다. 또 온 세상에 고통을 안긴 일본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원리적,(정치)철학적으로 이길 길을 제시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1910)은 동양을 섬길 능력이 우리 역사에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온 세상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라의 존재이유로 제시한 단군의 홍익인간사상은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나라의 국조(國祖)가 온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그 민족의 윤리적 존재 이유를 선명하게 선포한 경우가 있었던가요? 단군이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지정학적 위치에 부동산투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난 70년 동안 자원부족, 땅 부족, 인구밀집이라는 삼대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다시 그 반 쪼가리인 남한에 남은 후손들이 일군 역사는 찬란했습니다. 이 결과는 최고로 넓은 땅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우크라이나 땅을 욕심내어 전쟁을 일으킨 뿌틴이나, 서북공정,동북공정,서남공정으로 신장,위구르,대만 뿐 아니라 한반도와 아시아 전체까지 탐내는 중국공산당과 시진핑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땅 한마지기 탐내지 않아도 그 속에 사는 사람만 탁월하면 얼마든지 탁월한 문화(명)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보인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의 삶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넘어서 아주 오랫동안 좋은 것을 나누어주는 탁월한 민족이 되려면, 민족(주의)적 한계마저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뿌띤과 시진핑,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미국의 현재의 정치가,사업가들이 벌여놓은 혼돈만 문제가 아닙니다. 온 세상이 ChatGPT와 같은 생성generativeAI를 통해 세상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급격하게 변하여 모두가 우왕좌왕할 특이점Singularity, 원래 커즈와일(The Singularity is Near: When Humans Transcend Biology 2005)이 예상하던 2049년 혹은 2035년이 아니라 심지어 2030년 이전까지도 당겨질 수 있음을 걱정해야 될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올해 2023년 3월 한국 국회에서도 ChatGPT가 일으킬 수 있는 ‘환각현상’hallucination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토의했으며,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ChatGPT를 ‘표절’basically high-tech Plagiarism로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2년 전인 2021년 3월 구글의 연구위원들이 GPT-4와 같은 LLM(Large language Model, 대형언어모델)이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없는 확률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와 같다는 사실을 경고했다가 해고된 사실이 현재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또 최근 ChatGPT를 가진 OpenAI의 CEO인 샘 엘트만조차 ‘AI가 내뱉는 헛소리가 두렵다’고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도 철학자 한병철(정보의 지배, 2013)은 이런 정보 위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정보(를 산출하는) 가축’으로 간주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들 개개인은 과거에 만들어진 정보를 주도적으로 사용한다고 여기지만, 기업가들은 개개인을 돈벌이에 필요한 정보를 산출하는 가축처럼 취급할 위험은, 2023년의 ChatGPT시대에는 훨씬 더 커졌습니다 :“강력한 정보 도취가 존재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 감시당하고 가축이 되는 과정이 너무나 매끄러워 너도나도‘좋아요!’(라는) 디지털 아멘만 외치고 있다.”인류는 개인,사회,제도,체제,교육 등에서 아무런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첨예하게 전개된 기술에 허를 찔린 셈입니다. Kaist의 AI에 대한 첨단 학자인 김대식조차 허둥거리는 모습을 Youtube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기술 자체는 늘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지만, 인간은 그 기술을 선과 악에 있어서 양극단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21세기 이후는 지금까지 세상이 경험한 것보다 더 극단적인 선과 악의 역사 중에 어느 한쪽으로는 전개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시점에 역사의 수레바퀴의 키를 쥐게 될 21세기의 한국인들은 다음과 같은 칭찬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정복전쟁으로 땅과 재물을 탈취한 역사가 전무함, 2) 약속과 신의를 생명처럼 지킴, 3) 받은 도움을 몇 배로 갚아주는 나라.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의 중심점이요 근거를 제대로 형성하는 것인 동양과 서양의 문화(명)의 종교적 근거 자체를 초월하는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는 ChatGPT와 같은 생성AI가 지금 21세기 전반부에 아무리 막강해 보여도, 그 기술적,학문적 한계 외에 세 가지 명확한 근본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
1) 과거적일뿐, (한 번도 없었던) 미래적이지 않다,
2) 반복적일뿐, (전혀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이지 않다,
3) 물리적,물질적일뿐 전혀 정신적,윤리적,영(속)적,종교적이지 않다.
인간 존재의 탁월성은 이 세 가지 때문인데, 첫째(미래)와 둘째(창조)는 사실 모두 셋째(종교)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서 파생한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즉 ChatGPT가 아무리 탁월해도,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모인, 변화무쌍한 미래에 적용가능하며, 심원하고 창조적이고 영적인 이 종교적 인간성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겁니다. 물론 ChatGPT가 신부님,목사님,스님처럼 나서서 상담을 할 수는 있어도, 이미 있던 과거의 종교적 정보에 기초한 것에 불과하며, 우주만큼 다양한 각 사람의 영적 역량에 맞출 수 없는 환각(hallucination)혹은 표절(plagiarism)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전 세계의 상황 가운데 한국인들이 그 종교적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세운다면, 그야말로 그 어떤 시대가 앞으로 다가오던 상관없이 세계역사의 수레바퀴의 키를 오랫동안 잡고 세상을 섬길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K-Religion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
                                                       ‘해야 할 것 한 가지’ 


‘종교’라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져 수많은 오해와 불신을 받았던 단어,개념,실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에 대해 ‘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해야 할 한 가지’를 명확하게 하는 겁니다. 

  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는 :
1) 단순히 동·서양의 종교의 종합은 안된다. 
우리는 중국,일본이 했던 동도서기라는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에 대한 단순한 종합이 얼마나 처절한 실패를 만들었고 그 피해가 얼마나 큰 지를 보았습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문화(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 자체만 해도 앞으로 수세대가 걸릴지도 모르는 중요한 과제인데 이에 비해 우리가 깊이 경험하고 연구한 서양문화(명)는 고작 한두 세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동양인인 우리는 과연 동양문화(명)를 깊이 잘 알고 평가하느냐의 과제가 더 중요합니다. 중국,일본의 심각한‘역사 비틀기’,‘사건 조작’은 그 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정도는 약하지만 한국의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동양 삼국이 모두 그런 이유는 절대종교,절대신이 오랫동안 없는 가운데, 절대 진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동양에서 사실 비틀기와 역사 조작은 아주 만연한 하나의 문화나 관습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2) 한국인은 동양인이니, 동양의 종교를 우선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서양문화(명)를 접하면서 그들이 만든 왜곡된 인간상들이나 잘못한 역사적 과거나 처절한 종교전쟁 등으로 그것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동양인이니 동양의 종교들을 우선적으로 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이 서양의 지배를 받았으며 지금 동양인들 모두 서양문화(명)의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의 총체성의 관점에서 동양문화(명)의 후진성과 그 결과로서의 서양문화(명)에 대한 패배를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또 지금 세계를 서양문화(명)가 주도하게 된 것은 단지 그 물질성 때문이기에 이것은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큰 착각입니다. 문화의 핵이 종교라면, 서양문화(명)의 핵인 기독교,유대교는 결코 물질주의적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한국에 현존하는 동양종교는 사실 외부에서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서양문화(명)에서 온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것이며, 불교와 유교는 기독교보다 조금 더 일찍 들어왔을 뿐입니다. 불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와 더불어, 유교,도교가 발생한 중국 역시 매우 특수한 사회역사적 환경을 지녔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한국의 그것과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3) 서양문화(명)가 가지는 종교(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에 대한 심각한 적대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한국이 서양문화(명)에 많이 노출되고 깊이 알아갈수록, 그 근본이었던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대로 알고 파악하기도 전에, 서양문화(명)가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향해 점점 더 크게 가져왔던 적대감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는 큰 손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중세기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종교인 기독교의 타락에 있다고 낙인찍었으며, 또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가 지속적으로 강하게 전개될수록 그 적대감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자체 속에서도 종교개혁(16세기)을 전후로 한 개혁운동들과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서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아주 다양한 개혁이 시대마다 시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또 그것이 교회의 변화와 함께 사회,문화에 건강한 충격을 지속적으로 주었습니다. 청교도운동(17세기), 대각성운동(18세기), 노예해방운동과 사회개혁운동(19세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의 문화운동(교육,의료)과 선교운동(20세기)이 그것입니다. 16세기 이후 지금까지의 서양문화(명)의 역사는 종교에 저항하여 철학이 스스로 창조주가 되고, 다시 그 철학에서 저항하여 과학이 그 지위를 탈취하고, 과학에서 반항하여 기술이 다시 창조주의 자리에 올라 그 기술의 최극점인 ChatGPT의 위협 아래 인류가 지금 노출되어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서양사상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  
근대철학은 종교의 적이자 동시에 상속자로서, 자신을 모호하게 과학과 동일시하고, 잠정적으로 자신을 과학체계 편에 두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제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18세기 이후 그렇게 크게 목소리를 높이던 철학인 계몽주의는 종교의 변질된 형태인 신화들,다신론,다신교로 변질됩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다신론들이 점점 강화되어 비인격적 힘들이라는 특징을 띠어 주관적 이성들에 의해 진행되는 신들의 싸움의 난장판이 서양문화의 정수인 학문의 이름으로 계속 자행되어온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서양문화(명)는 이렇게 세상의 배꼽의 종교 근처에 머물면서도 지속적으로 반항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절대종교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채 실질적으로는 반항한 ‘집안에 머문 탕자’와 같은 첫째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배꼽에서 (에덴의) 동쪽으로만 향해 내달리면서 자신만의 (상대)종교들을 만들며 숭배했던 동양문화(명)는 ‘집나간 탕자’인 둘째 아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한 가지는
그 대신 종교를 상대종교와 절대종교로 명확히 구분해서 발생,파생의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이 과제는 아주 혼란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기가 불가능합니다. 먼저 19세기의 서양역사에서는 모든 종교는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비교종교학’이 등장하면서, 일단‘종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면 좋든 나쁘던 관계없이 민주적으로(?) 한 표씩의 종교적 가치를 얻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서양문화(명) 자체가 기독교에 대해 가진 심각한 반발의식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종교’의 정의를 매우 폭넓게 확대해서, 인간이 믿고 의지하며 그것에 의해서 세계관을 형성하여 모든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가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도킨스의 전투적)무신론,불가지론을 비롯한 모든 철학은, 그 상위에 그 어떤 기원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역시 하나의 종교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자체가 사실 또 하나의 종교적 태도이거나 사실상의 종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비판하는 자신과 비판받는 기독교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뿐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종교를 절대종교와 상대종교로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의 배꼽 주위와 주로 서쪽으로 인류가 퍼져나가면서 유지한 절대종교는 형태적으로는 세 가지인 기독교(로마교,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로 나타났지만, 본질은 하나에서 연원한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합니다. 앞으로 그 어떤 다른 절대종교가 나올 수는 없으며,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모두 이전 것의 응용과 변종에 불과할 겁니다.
둘째로, 인류가 길게 이어진 동쪽을 따라 이동하면서 스스로 발명해 낸 상대종교들은, 세상의 배꼽에서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성격이 다양하게 변해간 모습을 명확하게 규명해낼 수 있습니다. 먼저 세상의 배꼽에서 근거리로 떨어져 나간 곳에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다양한 영역을 통치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개념을 가진 다신교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어서 조금 더 동쪽인 인도의 북서쪽으로 아리안족이 침투해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항구화하기 위해 만든 브라만교를 비롯하여, 만유재신 즉 만신교가 발생했습니다. 거기서 인도 내부를 관통하여 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지배민족의 종교인 브라만교와 정반대인 평민의 종교이면서 동시에 신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무신론의 불교가 발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다시 거기서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에 이르러서는 신 개념은 아예‘하늘(天)’로 대체되어 몽골족(요,원),만주족(북위,금,청)과 같은 북쪽의 유목민들이나, 더 동쪽으로 베링해협을 건너간 아메리카 인디안들이 믿었던 천신에 이르렀습니다. 혹은 한족 자체 속에서는 아예 신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며 인간사회와 정권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유학에서 그것을 종교화한 유교로, 혹은 인간사 자체를 초탈하여 신선이 되려하는 도교가 발생한 겁니다. 다시 인류가 발자국을 더 멀리 더 나갈 곳이 없는 일본에 이르면 아예 불교,유교 자체도 소멸될 뿐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을 천황을 섬기는 삶으로 귀결되는 국가신도나 바람이나 느낌도 신이 되는 신도로 타락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상대종교의 그 발생의 역사는 인류가 세상의 배꼽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과 함께 매우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상대종교의 진화과정을 예상하며 추론할 수 있고 인류는 그대로 밟아간 것일 뿐입니다. 

K-Religion을 세상에 내놓을 만큼 한국인은 종교성이 있는 민족인가? 

 

“아테네인(한국인)들아, 
내가 보니 너희는 모든 일에 종교성(deisi-daimoon)이 많도다”
(사도행전 17:22)

이것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개인주의이면서 쾌락주의인 에피큐러스학파, 그리고 정반대로 엄격주의이자 그리스,로마 문화(명) 자체 안에서의 철학적 체계를 유지하려는 스토아학파와 토론하면서, 이런 종교적 토론에 몰입하는 그리스인들을 보고‘종교(성)이 많은 아테네인’이라고 선언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철학의 기원을 이룰 정도로 그리스인만이 가진 엄청나고 놀라운 특성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즉 동양철학에서는 없고 서양철학만이 가진 존재론,인식론,윤리론,비판이론 같은 이론들이 그리스에서 기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인들이 사물의 원리를 끝까지 추구하며 따지며 분석하고 토론하는 근성 때문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따지는 그리스 철학은 명백하게 종교와 관련된 점을 바울은 이미 잘 알았으므로, 그들에게 종교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칭찬한 후에 진정한 절대종교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했던 이 말이 2천년 후에 지구 정반대편에 사는 한국인에게 아주 적당하다는 사실은 이제는 누구에게나 잘 드러난 다음의 사실들 때문입니다. 
1) 과거에 상대종교(불교,유교)를 국가종교로 수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매우 열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특히 종교의 본질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한반도 국가들의 역사의 오랜 세월동안 불교(신라와 고려 8백년)와 유교(조선 5백년)는 각각 국가종교였습니다. 불교는 부처의 다양한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따르려는 정신이 원효와 의상을 통해서, 경전연구와 참선수행(하안거,동안거) 등의 정통과정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는 처절하게 변형,왜곡, 타락해서 결국 신도에 삼키워진 일본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고려가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팔만대장경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종교적 집중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유교가 조선의 국가종교가 된 이후라도, 유교정권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불교는 소멸되지 않고 그 종교적 확신을 지켜 조선시대를 견딘 후에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유교의 경우,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동중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을 따라서 철저히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체제인‘유학’으로만 사실상 기능했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의 유교는 그야말로 지나칠 정도로 주희의 신유학에만 몰입하여서 그 유교철학, 유교세계관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긴 오백년 역사 동안에 지속적으로 결정할 정도로 종교적 집중성이 뛰어났습니다. 중국에서는 깊이 토론되지 못했던 이(理)와 기(氣)에 대한 토론은 정작 한반도에서 서경덕,기대승,이황,이이,조식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탁월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본인의 육신의 조상인 송시열이 벌인‘예송논쟁’은 지금 보면 너무나 터무니없지만, 거꾸로 놓고 생각하면 상대종교에 불과한 유교에 이럴 정도로 처절하게 몰입한 것에서 한국인들의‘종교적 몰입도’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근대에 절대종교(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두 모습이 특히 종교에서 본질적입니다. 대원군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의 지속적인 방해로 순교를 관통했던 한국의 로마교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또 개신교가 한반도에 들어올 당시에도, 선교사가 미처 발자국을 디디기 전에 성경이 먼저 번역되어 한반도 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성경(계시록, 신천지)을 배우기 원하십니까’라는 이단들의 상투적 수단이 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신교가 전파된 지 수십 년도 채 되기 전인 일제 초기에 이미 백만 명 구령운동이 일어났으며, 삼일운동 서명자의 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으며, 세기가 넘어갈 때 전인구의 30~40%가 개신교 신자였고,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낸 국가가 한국이 될 정도입니다.   
3) 절대종교 기독교의 이단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성이 얼마나 큰가를 나타냅니다. 과거의‘박태선의 천부교’나‘문선명의 통일교’를 비롯해서, 21세기에 들어와서 코로나 시기에 전국을 들썩였던‘신천지’나, 이제 코로나가 끝날 즈음에 문제로 크게 비화되는‘JMS’등의 기독교의 사이비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한국인의 절대종교에 대한 커다란 갈망’과 관련됩니다.   
4)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왜곡,변형된 형태인 주체사상으로 매우 독특한 종교체제인 왕조공산주의를 형성한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중국으로 역수출해서 중국식 사회주의인 황제공산주의를 만들도록 한 북한 역시 ‘한민족의 깊은 종교적 본성’을 역설적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북한 정권이 지독한 것에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상이나 그 정치적 체제에 있어서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종교적 사상과 종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낸 점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처절히 종교적인지를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386속에 깊이 퍼져있는 ‘개(혁의)딸(들)’들에서 볼 수 있는 ‘남한 좌파의 극단성’은 못 말릴 정도이며, 북한(체제)을 사모하는 이들이 남한 곳곳에 포진한 사실 역시 한국인의 종교적 철저성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 방향만 정반대로 틀어서, 인간을 섬기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예수를 닮은 존재가 되는, 진정한 절대종교에 원대 복귀한다면, 한국인은 정말 천하무적인 민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5) 한국사회 속에 이제는 종교적 관용이 뿌리내려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더 나아가 (서슬 푸르고 무자비한 일신론적 경향을 가져 모든 (공식)종교를 박멸하려고 설치는 전투적 무신론과 남한 좌파를 제외한) (공식)종교 간에는 어떤 종교가 사회와 문화에 건강한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로 건강하게 경쟁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서구에서 얼마나 종교 간의 분쟁이 심했으며 오래갔던 지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이 서구가 근본적으로 절대종교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임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칼로 순교를 강요하던 로마를 첫째 기독교가 이긴 것은 칼로 맞상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내어 놓으라는 극단적인 절대종교의 원리를 실천했기 때문임을 서구기독교는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종교 간에 칼을 든 전쟁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종교성에 탁월한 것으로 증명된 한국인이, 그 종교성을 완성하여 세상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상대종교는 상대종교답게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절대종교는 절대종교답게 예수처럼 그 탁월하게 사는 모습을 보임으로 그 진리성을 증명하는 일을 한국인들이 하는 것입니다.‘불교’는 종교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철학이기 때문에 그 상대종교적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만약 절대성을 주장한다면 반드시 무리가 생깁니다.‘유교’도 사회적 관계를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좋은 전통을 유지하는 보수성을 지키는 면에 집중한다면, 그 사회윤리적 가치가 빛날 것이지만, 절대적 가치와 위상을 조선시대처럼 추구한다면 반드시 무리를 동반할 것입니다. 정반대로 절대종교는 절대종교로서의 총체적 문화와 삶의 체계를 선보일 뿐 아니라 예수처럼 완전한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종교임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둘째, 역사가 진행될수록 상대종교는 그 한계 안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구약성경 시절에 원래는 하나였지만 셋으로 나누어져서, 오랫동안 처절하게 투쟁하는 모습을 지닌 절대종교들이 다시 원래이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의 종교임을 한국인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유대교는 구약성경의 종교의 끝자락에서 타락하여 간 경전주의적 종교인 바리새적, 탈무드적 종교의 후신에 불과합니다. 또 과거와 현재의 이슬람교는 일관되게 물질주의적이며 획일적이며 숙명론적(인살라)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종교는 모두 일신론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신(들)이 보여줄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첫째 기독교 외에 중세,근세,현대의 서방(라틴)기독교를 비롯해,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는 모조리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에 유혹당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원적으로 나누어서 현실세계에는 그 어떤 섬김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종교의 본질이 문화,역사,우주로 신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만 한정하여 역사의 무자비한 현실에 대해 철저히 위선적,세속적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동안 처절하게 세속화된 서방교회, 황제와 뿌틴의 시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향을 피우며 오래 진행되는 신비적인 종교행사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첨병 역할을 했던 영국,네덜란드가 자행한 근세의 제국주의와 그것을 통한 수탈의 역사는 모두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이원론적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개신교는 결국 한국동란의 어려움이 지나는 동안은 부흥했지만, 그 후 풍요한 한국 사회,문화와 그 미래에 그 어떤 종교적 능력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 가지를 한국인들이 다시 시작한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 
1) 신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가 지상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음을 통과했던 그 길을 정확하게 따라하며,
2) 봉우리만 있었던 구약성경에서 시작되어 진정한 꽃으로 피기 시작한 신약성경까지의 진전된 계시를 진실로 신뢰하며,
3) 첫째 기독교가 로마를 사랑으로 이긴 역사적 승리를 계승하여, 교리라는 체제와 교단이라는 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밝게 만들었던 예수를 그대로 닮아 행하려던 수많은 진실 된 공동체를 이룬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K-Religion!이 될 것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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