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4)

2018년 3월호(제 10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3. 19. 09:30

본문

[큐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으로서의 연구]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4)


  지난 해 봄, 일본 현지여행을 한 후에, 일본에 대한 사후여행의 차원에서 일본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말입니다. 첫째 본질은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역사인 ‘메이지유신’이었으며, 둘째는 메이지유신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으로 바로 지금 3회째로 다루는 일본의 신도, 그 중에서도 메이지유신에서 2차대전 종말(1868~1945)까지 일본 정국을 주도한 강력한 도구였던 국가종교인 ‘종교로서의 국가신도’였습니다. 


  이번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3~4월호에서는 한반도가 속한 동아시아와 관련되는 차원에서 일본의 신도를 깊게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는 ‘과거’, 또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F. 절대종교적 성격을 지닌 국가신도와 절대종교 기독교와의 세 번의 대결(‘과거’) - I

   절대종교적 성격을 지닌 국가신도와 절대종교 기독교와의 세 번의 대결(‘과거’) - II

G.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질문: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와 세계에 피의 광풍을 몰아칠까?(‘미래’) (2018년 4월호)


F. 절대종교적 성격을 가진 국가신도와 절대종교 기독교와의 세 번의 만남 - I 

  우리는 일본의 신도가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상대)종교와 만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하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세워나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중에 상대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 자체가 일본식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 매우 중요한 현상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실은 바로 일본불교가 ‘계율의 강을 건너버린 종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불교는 현세중심적이며 이 생애와 그 속에서 발견되는 ‘미(美)’를 가슴 설레도록 추구하는 일본인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대신 누구나 불교의 본질이라고 알려진 중요한 ‘계율’과 그 계율을 위한 까다로운 ‘경전연구’를 포기한 겁니다(나까무라 하지메). 실제로 ‘호넨의 정토종’이나 ‘신란의 정토진종’이 모두 어려운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손쉬운 ‘염불’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부처의 마지막 설법이 담긴 법화경 절대주의를 외치는 ‘니치렌의 일련종’은 현대까지 영향을 미쳐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 수입된 ‘남무묘법연화경’(법화경에 귀의한다)을 염불하는 ‘창가학회’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일본에서 변형된 이유는 일본인들의 현실적 욕망을 긍정해 주는 종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일본적 열망에 불교가 부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대종교들과는 다르게 세속주의적이고 가치상대주의적이며 폐쇄된 섬나라적 삶을 절대적으로 붙드는 일본과 정면으로 부딪친 절대종교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역사상에 있었던 일본인 혹은 일본의 국가신도와 절대종교인 기독교와의 세 번의 만남을 다루려고 하는데 이 만남이 격렬한 충돌로 결론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섬기는 ‘호국불교’나 ‘호국유교’는 개념상으로 가능하며 또 역사적으로 실재했습니다. 하지만 ‘호국기독교’란 개념은 아예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상대적 가치를 가진 민족이나 국가의 요구에 절대신을 섬기는 종교가 복종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번의 만남 중에서 첫째와 셋째는 그야말로 피를 튀기며 생명을 내어놓아야 하는 ‘격렬한 대결’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만남은 일본인 한 개인이 기독교를 만난 것이어서 피 튀기는 결과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개인은 영원한 일본인으로 남았으며 반면에 일시적 혹은 부분적 기독교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개인은 바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일어난 첫째와 셋째의 격렬한 충돌은 큐슈 나가사키 근처의 시마바라성 사건과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의 신사참배사건입니다. 3월호는 첫째와 둘째만 다룹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의 만남 혹은 대결은 어떻게 결판이 났을까요? 기독교가 ‘거의’ 참패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의’라고 말한 이유는 유일하게 한 사례의 일부만이 절대종교 기독교의 본질을 제대로 나타내었고 결과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유일한 한 사례’는 앞으로 기독교가 이 유일한 길을 계속 걸어간다면, 일본이 외부를 변조시키지 외부가 일본을 변화시키거나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일본인들의 자부심을 근본적으로 없앨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맞다면 이것은 4월호에서 다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이 다시 한 번 피의 광풍을 몰아칠 것인가?” 저의 잠정적 결론은 반드시 그럴 것이다이며, 이 내용도 다음호에 다루고자 합니다. 이런 일본의 미래의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에 다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과 같은 것을 터트리는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칼과 폭탄을 쓰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 유일한 한 사례’를 제시하고 자신의 삶을 바친 우리 조상이 걸어간 방식이 그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우리의 선배들이 몸을 바쳐서 싸워 결국에는 이겼던 그 길(1938~1945)입니다. 이 선배들이 걸어간 길은 주기철을 비롯한 ‘죽은 순교자들’(1944.4.21. 순교)과 주남선, 한상동과 같은 ‘살아남은 순교자’(1945.8.17. 처형이 예정되었으나 이틀 사이를 두고 해방을 얻어 자유 얻음)를 배출했던 원시기독교의 본질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증거하는 더 근본적인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시기독교가 300년간의 로마의 간헐적 혹은 집중적 박해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로마 자체를 정복해버린 것은 칼과 창으로 이룬 것이 아닌 모든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각오했고 또 실제로 순교하면서 ‘사랑의 폭력’(쟈크 엘룰)으로 싸우는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일본의 현실과 역사 속에서 패배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다는 역사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증명된 절대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에 돌아가지 않고 대신에 ‘희석되고 세속화된 기독교’, 심하게 혹은 정직하게 말하면 ‘가짜 기독교’가 일본과 대결하겠다고 일본에 들어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첫째 만남 : 16~17세기의 로마교와 일본(정신)과의 대결에서의 패배  

1. 시마바라 사건

시마바라 사건과 거기에 전해진 기독교인 로마교의 실제

  시마바라는 16~17세기에 일본에 전해졌던 로마교를 받아들인 큐슈 중부에 속합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심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영주는 가혹한 연공(年貢-해마다 바치던 공물)을 부과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로마교인(‘기리시탄’) 농민들이 폭동(‘잇키’)을 일으켰고, 이제 막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가 잔인하게 진압해 버린 것이 바로 시마바라 사건(1637.12.17.~1638.4.15.)입니다. 3만 7천의 기리시탄 ‘잇키군’을 정복하기 위해 막부가 동원한 병력은 12만5천이었습니다. 이들은 잇키군이 모인 ‘하라성’을 포위하고 간신히 난(亂)을 진압해 몰살시킨 후에 그 시신은 수년간 그대로 방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일으킨 ‘제주이트’(Jesuits, Society of Jesus)선교사들이 일본에 전한 기독교는 사실 교황절대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한 종교일 뿐입니다. ‘제주이트’들은 ‘종교재판제도’(Inquisition)의 재판권을 교황으로부터 넘겨받아 유럽에서 로마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한 세기 이상 고문하고 죽이는 악랄한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이는 최전선에 섰던 전사들이었습니다. 최초로 제주이트회를 만든 인물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로서, 전직 기사출신답게 선교단체를 정신적(영성수련), 물리적(실제 총칼과 대포를 사용하는)으로 전투적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그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아 동양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일본의 큐슈 남부인 가고시마(1549.8.15.)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우리의 기억에 선명한 임진왜란의 원흉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바로 이 로마교 신자였으며 조선을 침략하는 그의 배에 로마교 신부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가 통치하였지만 나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투에서 패해 빼앗긴 지역이 바로 가고시마의 북쪽에 있는 시마바라입니다.


시마바라 사건에서 기리시탄(로마교)이 일본적인 것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유

  시마바라의 기리시탄들이 일본적인 것과의 대결에서 실패한 이유는 앞에서 드린 설명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곳에 전해진 기독교는 순교를 각오하고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던 원시기독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단순한 진리를 제주이트 자신들과 당시의 로마교가 사실은 철저하게 외면했던 겁니다. 그 당시 최고의 로마교 국가로 자처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물질욕, 지배욕에 사로잡혀 지구를 동서로 나누어서 수많은 곳에 식민지를 세웠으며 오랫동안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켰지요. 이런 악행으로 얻은 엄청난 이득을 교황에게 바치거나 거대한 성당을 지어주거나 화려한 미술품을 바친 후에 고해하고 신부로부터 ‘용서’(absolutio)를 얻으며 죄책감에서 자유를 얻곤 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과 유럽의 교회들이 칼을 드는 모습은 칼을 섬기고 칼의 기운을 좋아하던 시마바라의 일본인 기리시탄에게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겁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가 말한 원시복음이 전해졌다고 할지라도 삶의 모본과 실제를 선교사들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마음에 이것이 들어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시마바라의 다이묘가 가혹한 연공을 부여하더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물리적 충돌을 일으키는 혁명이 아닌 ‘사랑의 혁명’으로 이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원인 예수가 죽음으로 죽음과 허무와 무의미를 이긴 그 길 말입니다. 그 당시 막부는 기독교의 교리를 종교적으로 대적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중세의 일본 불교의 경우처럼 무장 세력이나 정치집단이 되어서 정치에 도전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때에 진정한 원시기독교가 일본에 들어갔다면, 막부는 로마(유대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가졌던 것처럼 정치적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섬에서 오랫동안 살아서 일본인 속에 일본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 널리 펴져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섬사람 기질에 속할 뿐이며, 또 그것이 원시기독교가 무너뜨린 로마만큼은 강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시마바라 지역에서 농민군의 거점이 된 하라성 포위


2. 엔도 슈샤쿠의 「침묵」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신들의 미소」

  그런데 17세기에 일어난 이 시마바라 사건을 20세기의 일본인들은 문학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Silence’라는 제목으로 최근 영화화(2017)되었던 엔도 슈샤쿠(1923~1996)의 장편소설 「침묵」(1966)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단편소설 「신들의 미소」「오긴」(1922)입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

  소설가 엔도 슈샤쿠는 가족의 성화에 못 이기어 12세에 로마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가 거부하기도 했지만, 본인의 생애동안 기독교적 고민을 피할 수 없어 경계선에서 왔다갔다 했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겪은 종교적 갈등을 시마바라 사건을 통해 문학적 소재로 삼아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일본 토양에서의 기독교의 토착화문제’를 다룬 작품이 바로 「침묵」입니다. ‘페라이라’ 신부나 나중에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의 입을 통하여, 엔도 슈샤쿠 자신의 종교적 고민을 표출한 겁니다. 1633년에 나가사키에서 배교한 이후, 일본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일본식 이름으로 ‘사와노 츄안’이라고 한 후 로마교신자들 검거에 협력했던 실제 인물이 ‘크리스토판 페라이라’(1580~1650) 신부입니다. 엔도는 페라이라의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들려줍니다: 

  “일본 민족은 인간과 아주 동떨어진 신을 생각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소. 이 민족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장시킨 것을 신이라 부르오. 다시 말해서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라오.”

  그가 배교한 결정적 원인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순간에 침묵하시는가?’하는 실천적 질문(여기서 ‘침묵’이라는 주제가 나옴)에 대답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자신이 순교당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형벌로 천천히 죽어간다는 사실에 결국 신학교에서 스승이었던 페라이라를 찾아 일본까지 간 선교사인 로드리고도 스승을 따라서 배교하고 맙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엔도 슈샤쿠의 소설 속에 나타낸 기독교, 즉 자신이 일본에서 경험한 20세기의 로마교는 16~17세기에 일본에 전달된 로마교와 별 다를 바가 없이 세속화된 기독교일 뿐입니다. 엔도 슈샤쿠가 그 언저리를 맴 돌았던 20세기 초,중엽의 로마교의 실상을 한 번 볼까요? 일본은 2차대전에 돌입하면서 국가신도예배를 모든 종교단체에 요구하여 일본의 아마테라스에게 먼저 요배하고 기독교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일본의 로마교는 교황청의 지령을 따라 재빨리 거기에 복종한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로마교는 자체로 많이 정화되었고 개혁되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로마교는 언제든지 ‘로마에 의한 세상의 지배’(Pax Romana)라는, 중세에 이루었지만 유럽 국가들의 저항으로 포기해야 했던, 목표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세속화된 기독교일 뿐입니다. 종교단체인 로마교황청이 각국에 대사를 파송하고 있는 것과 정치적 야욕을 가진 하나의 정치단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진 것을 나타낸 점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흐릿한 기독교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페라이라 신부는 자신과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잘못된 기초에 선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에 선교의 대상인 일본민족이 절대적 존재인 신을 생각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설명할 뿐입니다. 이런 무능한 하나님을 원시기독교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손에 표현한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사람들에게 있다’는 사도 바울의 말(로마서 1:19~23)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구약성경(전도서 3:11)도 물론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철저하게 세속중심적이 된 이유는 이들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섬나라 속에 너무나 오래 살았기 때문일 뿐인데, 이 섬사람 기질 하나 바꾸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참 하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정말 정직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겁니다.

  둘째,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 배교하면 자신도 살고 그들도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엔도 슈샤쿠가 말하는 기독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원시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는 (가상의) 종교일 뿐입니다. ‘각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을 당할 뿐 아니라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고린도전서 10:13)이 실제로 엔도 슈샤쿠의 손에서 표현된 신부들의 마음에는 없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하게 피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몸을)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은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헤매고 다니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도다’(히브리서 11:36~38)라는 역사적 고난과 순교에 대한 최초의 보고도 읽지 않았거나 보아도 못 본 척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성경이니까 이렇게 원리적으로 기록했을 거야’라고 슬쩍 지나갈 수 있지만, 이것은 원시기독교의 고난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의 300년의 핍박을 사랑으로 이겨낸 원시기독교가 가진 역사적 증거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겁니다.

  셋째, 흔히 ‘일본이 전해진 기독교를 일본이 굴절시켰다’는 진실을 뒤집은 거짓말을 하곤 합니다. 사실상은 위에서 보았듯이 이미 굴절된 기독교, 세상 욕망을 그렇게 사랑하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일본에 전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어왔지만 자기들과 유사하게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런 종교쯤이야 굴절시키는 일은 일본인으로서는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신들의 미소」와 「오긴」

  먼저 「신들의 미소」「침묵」과 동일하게 시마바라 사건을 단편소설화한 것입니다. 이 소설에는 일본에 건립된 로마교 사원인 남방지(南蠻寺)의 제주이트 신부인 ‘오르간티노’가 등장합니다. 신부인 그를 염려해주는 듯한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와 대척점에 서서 일본적인 것을 대표하는 듯한 일본 노인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어볼까요?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어쩌면 천주님 자신도 이 나라 사람으로 변하겠지요. 중국이나 인도도 (일본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서양도 (일본적인 것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나무들 속에도 있습니다. 얕은 물결 속에도 있습니다. 장미꽃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있습니다. 사원 벽에 남아 있는 저녁놀에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조심하세요...


  노인의 말 속에 표현된 것들은 모두 일본의 신도에서 섬기는 수많은 신들을 의미할 겁니다. 지금 내 곁을 지나는 바람결도 신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인 거지요. 즉 일본은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태도입니다(가라타니 고진).

  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다른 단편소설 「오긴」에서 다시 17세기의 시마바라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여주인공 「오긴」을 정성껏 기른 기리스탄인 양부모는 순교를 각오합니다. 하지만 오긴은 배교하는데 그것은 고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일본적인 혈육에 대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 때문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돌아가신 (육신의) 부모는 ‘천주님의 가르침’도 모른 채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만약 내가 천국에 간다면 (친)부모님께 죄송합니다. 부디 (양)부모님은 천주님과 마리아님 곁으로 가십시요. 저는 부모의 뒤를 따라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기독교를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본에서 경험했던 기독교는 원형의 기독교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피상적 기독교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도 일본식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한 가운데 과거의 종교적 사건을 잡아서 소설을 써내려간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만 이해해 버리는 자폐아적 일본성향을 따라서 말입니다. 

  둘째, 「신들의 미소」에서 일본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나 무엇이든 변형시켜 버린다는 일본인들의 ‘거짓된 자기 정체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외세가 거의 건드리지 않은 일본열도에 이런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말기에 원자탄 두 방으로 일본은 미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만약 미군이 원했다면 천황제도 없앨 뿐 아니라 자신들이 과거에 지배하던 나라에 했듯이 미군의 노예처럼 살 각오도 했을 정도로 말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일본의 모든 상대적 가치를 뒤집어 놓을 절대적 가치를 가진 원시적 기독교가 일본에 들어가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진 일본과 이런 기독교간의 수많은 종교적 대화와 문학은 사실 무가치하며 거짓된 것일 뿐입니다. 로마를 바꾸어 놓은 그 원시기독교가 일본에 들어갔더라면, 개인적 행동과 그 속에 숨은 가치관뿐 아니라 문화의 모든 측면을 철저히 총체적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므로, ‘조심’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 

  셋째, 「오긴」에서도 여주인공이 강력한 변혁을 일으키는 원시기독교를 만났더라면, 친부모를 생각하는 혈통지향적인 일본적 가족관/세계관을 핍박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것입니다. 17세기 당시의 일본에 전달된 세례, 미사, 고딕식 예배, 향연 등의 외적으로 엄숙하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가 나는 예식들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교는, 외적으로 만져지고 보여지며 체험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심성에 딱 맞아떨어져서 쉽게 기리시탄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적 외적 행위를 그 내적 의미와 아주 느슨하게 연관시킨 당시 로마교속에서는, 일본에서의 총체적 변혁이 처음부터 불가능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둘째 만남 : 기독교가 일본인(우찌무라 간조)과의 만남에서 패배하다

  기독교가 일본과의 만남에서 패배한 또 하나의 역사를 일본기독교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Uchimura Kanzo, 1861~1930)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 우찌무라 간조


  도쿄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Boys, Be Ambitious!’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농학자 William S. Clark가 재직했던 삿포로 농업학교(영어로 강의진행)에 재학 중 선교사가 조직한 선교단체를 통해서 기독교를 접하였습니다. 이 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일본식 집단의식을 버리지 못한 기독교 선배들의 강압으로 기독교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강제를 싫어하였지만, 태도를 바꾸어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1878). 그후 그는 클라크 교장의 모교이며 청교도 전통을 지닌 뉴잉글랜드에 있는 Ahmerst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1884), 그가 존경했던 총장인 J.H. Seelye의 조언으로 졸업 후에 Hartford Seminary로 신학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렇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여(1888), 교사와 잡지 편집자, 강연자, 문필가로서의 일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메이지-다이쇼-쇼와 초기는 일본사회에 온갖 격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그는 온몸으로 특히 그의 글로 이것을 마주하였습니다. 그는 첫 교사로 부임한 학교에서 천황영정에서 절하는 것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거부하였고, 그와 관련한 정신적 압박을 받아 병원에 입원까지 하다 결국 교사직을 그만두고 맙니다. 그런데 청일전쟁(1894)에서의 일본의 승리에 기독교인의 본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일본의 의’라는 제목의 영어 에세이를 써서 그것이 정당한 전쟁임을 세계에 호소하였지요. 물론 그는 곧 이것을 회개하며 ‘극도로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는 합니다. 다시 러일전쟁(1905)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나는 비전론자일 뿐 아니라 전쟁폐지론자다’라고 외치며 원래 품고 있던 평화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합니다. 일본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가운데 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나중에는 도쿄에서 성경강해를 하며 살다가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쓴 기독교적 저작들 중에 우리의 주제에 관련이 되는 삼부작은 「그리스도인의 위로」(1893), 「구안록」(1893)과 그가 영어로 쓴 「How I became a Christian」(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1894)입니다. 


  영문학자이며 비기독교인인 사에케 쇼이치「일본인의 자서전」(1975)에서 일본인의 자서전들을 비교하며 우찌무라 간조를 비판하였는데, 이것과 함께 저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첫째, 우찌무라는 이 저서들에서 자신이 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얻은 사람의 모습과 함께 20대 중반에 외국에서 엄청난 문화충격에 휩싸인 일본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는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갑자기 마구 돌진하는 것 같은 느닷없는 성급함’을 보였습니다. 도쿄, 오사카, 구마모토에서의 교사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퇴로를 자기 손으로 끊어버린 다음 적진으로 돌격하는 담대한 자기극화에 기울어진 지휘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결벽하면서 성급한 실천주의자였고 지행합일론자’에 가까웠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를 만났고 믿음을 가진 자라고 주장해도 칼을 휘두르는 듯한 일본적 사무라이의 기질이 펄펄 살아있다면, 이 만남과 이 믿음이 얼마나 상대적 가치를 가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로」에서는 제1장(‘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부터 마지막 장(‘빈곤이 다가올 때’)까지 모조리 기독교인의 불행을 겪는 중에 받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내용은 존 번연이 보여주었던 고난 속에서의 진정한 믿음의 투쟁보다는 연극적 웅변과 낭만주의적 자기 확대 등이 보입니다. 30년이 지난 63세가 되는 그는 그 책의 신판에 부치는 서문에서 어거스틴이나 존 번연의 책을 크게 의식한듯이 ‘일본의 기독교문학’이라고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미의 선생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인 자신의 신앙적 실험 또는 사상을 말하려고 한 것은 참으로 대담한 기획이었다.’ 그 실험이란 바로 그가 말하는 ‘일본적 기독교’, ‘무교회주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이름이라고는 천상천하에 단 두 개뿐입니다. 그 하나가 예수입니다. 그 다음이 일본입니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그 첫째는 Jesus요, 둘째는 Japan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랑스러운 이름을 위해 우리 목숨을 바치고자 다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 일본 민족과 국가라는 상대적 가치를 무릎 꿇게 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기본을 거부한 겁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철저히 일본적이었고, 적어도 세계관에 있어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더 근본문제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미국의 개신교가 진정한 원시기독교가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교회는 경험주의적인 앵글로삭슨 민족의 교회로서 영혼과 양심의 복음, 의료와 교육의 선교라는 매우 좁은 의미의 기독교는 전했지만, 영원한 진리가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문화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충만한 기독교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로마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세속을 정복해 나가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와 세속을 분리하는 위선적인 이원론적 전통 아래 있다면 제대로 된 기독교가 아닐 뿐입니다.

  둘째, 그의 책 「How」는 처음부터 영어로 쓰였고 원래 미국에서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하던 것이었지만 영문판도 일본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러일전쟁 뒤에 일본이 서양의 이목을 끌게 되면서 저작되었던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1899)와 오카쿠라 텐신의 「차의 책」은 모두 유사한 일본적 발상에서 일본인의 자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목적이었다고 사에케 쇼이치는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무사도」가 윤리적으로 (이상화한) 일본인론이라면, 「차의 책」은 심미적 일본론, 「How」는 (서구)종교적 일본인론을 말하는데, 서구를 상대로 분발하여 (일본인으로서의) 자기주장을 하는 모습은 세 책의 공통된 모습이다.” 그러면서 「How」를 쓴 우찌무라에게서 ‘자기인식의 깊이와 투철함이 과연 있었을까’라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립니다. 왜냐하면 우찌무라가 기독교인으로 변화한 과정은 너무나 개괄적인 일반화, 간이화로 서술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How」를 자세히 읽어보면 비기독교인인 사에케 쇼이치조차도 지적하는 대로 그가 왜곡된 기독교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즉각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내적인 이교도성이 어떻게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고, 회심에 임해서 어떤 미묘한 반응을 보였는지, 어떤 뿌리 깊은 변질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일본적)이교도성은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온존되어 자랑스럽게 게시되고 있다.”

  그는 영국의 청교도인 존 번연(John Bunyan,1628~1688)의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을 탐독했으며, 기독교의 영원한 고전인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기독교 고전에서 볼 수 있는, 인간에 내재하는 개인적, 가족적, 지방적, 일본적 죄악과 죄성을 철저히 반성하는 내적 투쟁의 과정은 우찌무라의 책들에서는 전무합니다. 오히려 그의 책은 이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의 두 책들을 경쟁적으로 의식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태도를 취합니다. 즉 그의 책 「How」에서 그는 서구인에게 ‘일본기독교인이 여기 있으니 보라’라는 취지로 보여주려는 듯하는, 마치 일본주의적 행동의 산물인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에케 쇼이치의 신랄한 지적을 다시 봅시다. “필자의 시선도 말도 분명하게 바깥세상의 일반 독자 쪽을 향하고 있다. 신을 향한 호소도 아니고(어거스틴의 고백은 시종일관 2인칭으로 하나님을 향한 고백으로 진행합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향한 속삭임도 아니고, 거의 논쟁을 거는 연설가나 평론가의 말투에 가깝다고, 거의 추상적 신앙조목의 열거에 가깝다. 사변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할 정도다.”

  결국 우찌무라가 했던 기독교적 경험은 나에게 무언가(감정, 물질, 확신 등)의 이익을 주는 하나님을 만나는 매우 일차원적인 것이었고, 예수가 말한 예수의 진정한 제자되는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는 자는 자기 가족을 미워하며, 자기(기질, 민족성, 역사성 등)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가 했던 대로 행동(죽음)할 것이며,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자니라”(누가복음 14:25~33).

  일본인인 우찌무라에게 다가간 기독교도 근본적 원시기독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일본적인 것을 버리지 않은 채로 기독교의 껍질을 쓰려고 작정한 점에서 일본과 만난 기독교는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모조리 일본제국이 2차대전의 광란을 벌일 때에 원시기독교나 우리 조선의 선조들처럼 순교로 투쟁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도운 배신자들이 되고만 겁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1호 >에 실려 있습니다.

 

황혼과 여명 - 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을 위한 연구 바로가기


<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시리즈 >

제 99호 시리즈 (1)

제 100호 시리즈 (2)


제 100호 시리즈 (3)

제 101호 시리즈 (4)


<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시리즈 >

제 96호 시리즈 (1)

 제 97호 시리즈 (2)


제 98호 시리즈 (3)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