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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끓이기보다 어려운 글쓰기

2018년 7월호(제10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7. 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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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혜 에세이]


라면 끓이기보다 어려운 글쓰기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그녀의 글 솜씨 때문이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는 과히 한국의 셰익스피어다. 드라마 한 회당 원고료가 억대라니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작품을 보다 보면 무릎을 친다. 주연만 주인공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아니 조연이 더 주인공 같다. 작두날 타듯 그녀의 문장은 수려하고 사람의 심장을 꿰뚫어 시원하다. 거기다 오뉴월 소낙비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대사를 따라 하다 보면 입술이 꼬이고 숨이 턱에 차 온다. 그러나 어쩌랴 오감이 열리듯 쓰지 않은 장기까지 모두 일어서는데 안 볼 재간이 없다.


드라마의 묘미는 다른 데 있다. 시대상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 놓은 솜씨에 탄복한다. 70대 노작가임에도 젊은이의 말투며 생각마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젊은이의 생각을, 감성을 표현하는 리얼함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새끼 작가가 수십 명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가히 OO군단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떠랴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훨씬 시원한데 어찌 안 보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드라마를 보느라 남편이 오는데 일어서지도 않고 밥은 드라마 끝나고 차려준다고 한마디 하고 다시 TV 앞에 앉았다. 

남편은 드라마 보면 그런 드라마를 한 편 쓸 수 있느냐고 한마디 한다. 기다려보라는 한마디에 꼬리를 내린다. 드라마가 끝나고 예고 방송을 보는데 남편이 배고프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면서 라면 먹고 싶다는 것이다. 군말 없이 라면을 끓여 주었으면 되는데 

“밤중에 라면은 무슨 라면이야 그냥 밥 먹어요.” 

내 딴에 평상시 말투 뉘앙스였는데 갑자기 남편의 반응이 쌩하다. 잔소리 후에 겸연쩍어 라면을 끓여가니 남편은 안 먹겠다고 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봤지만 그런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면 그냥 굶고 자라고 라면 그릇째 식탁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도 안 먹고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 말 속에 정말 뼈가 있었나. 그건 아니었다. 문자를 보냈다.

“어제 난 별 뜻 없었어 그냥 한 소린데 속상하다면 미안해”

그러자 남편에게 답장이 왔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생리 중이었거든.”

“당신은 좋겠다. 나는 폐경인데 

아직도 생리하고……” 


남편은 큰소리로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피 같은 돈이 나가는 카드 결제일이 ‘생리일’이라고 한다. 남편은 내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던 게 아니라 자신을 좀 봐 달라고 했던 건 아닐까? 여자가 오십이 넘으면 밥 냄새도 맡기 싫고 남자는 오십이 넘으면 밥 생각만 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밥 생각 좀 안 하고 싶다. 

며칠 전 요즘 글쓰기를 시작한 J 여사와 점심을 먹었다. 글 좀 쓰니까 다른 일을 하면 시간이 아깝다고 한다. 걸레질하면서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밥을 하다가도 ‘내가 밥할 때가 아니야’라며 친정아버지께서 여자가 글을 쓰면 살림 못한다고 했던 그 말이 맞는다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글도 안 써지면서 라면도 끓이기 싫은 거.




시를 사랑하고 영화를 즐겨보며 책과 바람난 여자 

수필가 김단혜 

blog.naver.com/vipapple (삶의 향기를 찾아서)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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