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글이 안 써져 미치겠어

2018년 8월호(제10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8. 12. 23:08

본문

[김단혜 에세이]




   

 글이 안 써질 때 밖으로 나간다. 나는 정처 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집이 아닌 곳을 쏘다닌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외딴방」에서 글을 쓰려면 밖에 있다가도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내 속을 뚫고 올라오는 문장을 만나기 위해 습관처럼 밖으로 나온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좌판에 오늘 팔 물건을 꺼내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 하루 얼마나 꺼내 놓을 수 있을까? 오른쪽 어깨에 멘 등판만한 가방에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와 스프링노트가 들어있다. 빈 노트를 다 채우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아야지. 밥하기도, 글쓰기도 만만하지 않아 주방에서 거실로 다시 서재로 들고 다니는 책이다. 글을 쓰려면 유연해지자.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감을 찾자. 

 반드시 쓰고 넘어가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는 글감의 씨앗을 싹 틔우자. 밑줄을 긋는다. 

책방지기가 읽은 책만 파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으로 향한다. 책방 주인의 뒤통수라도 보고 오면 글이 써질까. 책방지기 윤성근의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는 유명한 작가가 책을 구입하고 써 놓은 청춘의 문장들이 묻어 있다. 책에다 해 놓은 영역표시를 읽는다. 점심을 굶으며 읽고 싶은 책이라 던지, 혹은 누가 권해서 지난 여름 책을 읽으며 견딘 내가 기특해서, 햇살이 좋아서, 바람이 몹시 불어서……. 책에다 나만의 영역표시를 하는 것이 재미있다.


 응암역에서 내려 꼬불꼬불 찾아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으로 들어가는 지하 계단에 앉아본다. 써 지든 안 써지든 이런 짓이 나만의 글 쓰는 방법이다. 어떤 장소를 다녀오는 일, 안 하던 짓을 하는 일, 무엇인가에 깊이 침잠되는 일이 그렇다. 내 속에 나를 자꾸 건드리는 작업을 끊임없이 한다. 세상에는 어제의 나와 다른 내가 무수히 많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따라 어떤 장소에 가는가에 따라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나는 수시로 변한다. 사소한 변화에 슬쩍 닿아 무엇인가가 감지되는 부분에서 글이 써진다. 그래서 글쓰기보다 그 서성거림을 피할 수 없다. 가슴이 울렁이고 신열이 난다. 아주 좋은 징조다.


 북 카페를 순례하던 중, 합정역에 위치한‘자음과 모음’출판사에서 아동문학가인 후배를 만났다. 글밥을 먹은 지 몇 해 동안 수권의 베스트셀러를 터트렸다. 그녀는 집안에서 꼼짝도 안하고 동화책 한 권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다. 간 곳이라고는 동네 도서관에 두어 번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단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하는 북 카페도 이 근처다. 요즘에는 출판사 직영의 북 카페가 대세다. 문학 동네가 운영하는 북 카페‘콤마’로 향한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이 연상되는 높은 천장 가득 출판사에서 만든 책들로 장식한 실내가 마음에 든다. 세계문학 전집이 쭉 꽂힌 서가에 서자 배가 부르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정신의 배부름이다. 마치 허기진 사람처럼 마음속 허기를 채운다. 카페 콤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분위기가 여유롭다. 세상이 타들어 가 버릴 만큼 지독한 사랑이 하고 싶은 여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어떨까? 오십 대가 다 가기 전에 한 번 더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다시 읽는다면 끈적끈적한 여름에 읽으리라. 1, 2, 3권에 부록까지 포장된 양장본을 사며 마치 사랑의 기쁨에 빠진 듯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아무것이나 하고 싶지 않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되는 날 맛있게 읽으리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다시 맘에 드는 책을 고른다. 신간코너 첫 번째를 장식한 카뮈, 장그르니에, 생텍쥐페리의 번역가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의 「여름의 잔해」를 챙긴다. 

 북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는 바로 읽고 싶은 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워밍업을 한다. 워밍업에는 자기계발서가 좋다.「나는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났다」김병완의 신간을 먼저 읽는다.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을 보고 ‘아, 저 나뭇잎이 나 같아.’라며 사표를 내고 3년간 도서관에서 만권의 책을 읽은 남자의 이야기다. 처자식에 직장까지 있는 남자의 선택에 작은 응원을 보낸다. 만 권의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은 책을 읽는 자세라고 고백한다. 세상이 한 권이 책이듯 사는 건 어쩌면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른다.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날이 그날 같은 것. 책을 읽는 자세를 익히는 동안 저자가 맛본 기다림과 지루함은 살수록 대책 없이 흔들릴 때 꼭 필요한 근육이 되리라.


 책을 읽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왔는데 읽기만 하고 가는 거 아닐까? 조급증이 난다. 김화영 교수는 행복은 습관이 아니라 충격이라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는 충격인가? 써야 해. 돌아다니지 말고 시작해야 해. 생각한 후에 쓰지 말고 쓰면서 생각해야 해. 첫 문장을 쓰고 시작하는 거야. 구체적으로 써야 해. 나무라고 쓰지 말고 회화나무라고 써야 해. 책이 엄청나게 많다고 쓰지 말고 책이 27만 5천 권이라고 써야 해. 글을 쓰려면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해. 써야 하는데 읽기부터 하는 거.

시를 사랑하고 영화를 즐겨보며 책과 바람난 여자 
수필가 김단혜 
blog.naver.com/vipapple (삶의 향기를 찾아서)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6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