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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읽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고

2019년 2월호(제11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2. 1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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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혜 에세이]


영상으로 읽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고


겨울이 허공을 향해 막무가내로 치닫고 있다. 허공이 받아주지 않는 눈이 한숨처럼 내리는 도시. 겹겹이 쌓인 눈을 털 듯 또 한 살의 나이를 털면서 새해 첫날 영화관에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보온병에 넣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영화관을 들어서면 으레 코 끝을 매혹시키는 팝콘의 향기. 그러나 그 고소함은 팝콘이 아니라 영화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들어서지 않은 영화관에 홀로 레드 카펫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자폐적 절대 고독 속으로의 여행, 난 분명 여행을 하고 있었다. 잠시,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죽은 시인을 생각해 본다. 그가 마지막 본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시인이 남긴 푸른 노트를 만지듯 어둠 속에서 노트와 펜을 챙겼다.


첫 신(scene)이 열리는 동안 영화관에 손님은 혼자였다. 어쩌면 혼자서 영화를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영화가 시작되고 앞으로 한 명, 그리고 뒤로 한 명이 앉았다. 그렇게 정성일의 첫 번째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는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영화감독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백야」가 그것이다.


영화는 편지글로 되어 있는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작품 전체에 깔고 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흰색 스크린에 나레이션으로 편지를 읽기도 하고 혹은 잉크로 번진 손글씨 편지가 전체 화면에 나오기도 한다.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괴테나 도스토옙스키의 대화 기법을 이용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책을 읽지 않고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했다. 「백야」를 테마로 한 영화 후반부 영상은 흑백으로 처리되는 효과를 주었다. 주인공의 대사가 14분 동안 독백으로 이어지는데 한 마디도 놓치기 아까운 시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처럼 롱-테이크 기법*에 손이 올라갔다. 정성일 감독은 영화를 보는 일은 배우를 보는 것도, 이미지를 보는 것도, 스토리를 보는 것도 아니라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영화 모임을 하면서 많은 영화를 보았다. 물에 잉크를 섞어 비를 잘 보이게 마치 시처럼 내리게 표현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일깨워 주었다.‘인간의 마음을 스크린에 옮기는 감독’인, 89세의 나이로 지난 2009년에 작고한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르의 <O 후작부인>을 보며 영화를 고급예술로, 문화적 사치와 지적 허영심의 표출로 생각하게 만든, 나라 전체가 예술인 프랑스가 부러워 잠을 설치기도 했던 날이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예술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 토마스 만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루치아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며 예술가를 꿈꾸기도 했다. 


내 마음의 시인이었던 최승자 시인의 번역으로 읽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스크린에서 만난 것 같은, 햇살도 찻잔도 과일마저도 침묵을 이야기하는 카르투지오 수도사 수사들의 묵언 수행을 다큐 형식으로 만든 <위대한 침묵>, 나를 영화 속의 불꽃놀이처럼 현란한 사랑에 빠져들게 만들던 레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때로는 감독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원작 때문에, 또는 스토리와 배우 때문에, 주위에서 권해서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보았던 영화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읽고 본 <카페 느와르>는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의 정의를, 고전이 주는 의미를, 그리고 영상의 아름다움과 유년시절을 살았던 도시 곳곳이 주는 풍경을, 또한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내게 가르쳐 준 잊지 못할 영화였다. 다른 사람이 안 본 영화를 보았다고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본 영화에서 남들이 못 본 부분을 본 것을 자랑하라고 정성일 감독은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고 나자 5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책의 두께, 3시간 18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괴테나 도스토옙스키가 주는 넘겨지지 않는 고전의 무거움만큼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책들을 읽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이었다. 문짝이 문고리를 따라 돌 듯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감출 수 없는 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신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은 날이다. 오늘 또 한 차례 추억 같은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롱 테이크기법-영화의 쇼트 구성 방법 중 편집 없이 길게 진행되는 것
*누벨바그-1957년경부터 시작하여 1962년에 절정을 이룬 프랑스 영화계에 일어난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물결(New Wave)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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