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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있다!(2)

2019년 2월호(제11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3. 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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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연구여행 5]



중국은 있다!(2)


 


 엊그저께 신문들의 한 기사(2019.01.25)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기업 알리바바의 수장인 마윈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 현재 무역전쟁의 불똥이 튀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오기 시작한 또 다른 기사는 만약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기술과 사람의 능력에 있어서 미국이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세계를 제패한 영국은 그 민족적,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은 아주 선명했으며 이해하기 무척 쉬웠고, 그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정말 깔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아주 특이하게도 21세기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그 정체성에 있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정말 요상한 나라들입니다. 지리적으로 이런 두 나라의 정중앙에 놓여, 이들이 벌이는 무역전쟁 사이에 끼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형편에 처한 조그만, 그것도 두동강이 난, 한반도에 사는 우리 개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공부나 사업을 잘 해서 어디든 문제없는 나라(미국, 호주, 뉴질랜드, 남미, 아프리카, 심지어 유럽 등)로 튀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를 등지고 떠났던 1960~80년대 선배들의 삶을 이어갈까요? 죽을 각오로 38선을 넘어와서 이 땅에서 일군 삶을 발판으로 과감하게 미국으로 이민가신 저의 삼촌들과 형님 같은 분들은 그런 길을 자신과 특히 후손을 위해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선택을 잘한 일이며 과연 본인들은 후회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정반대로 자포자기한 가운데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이 모든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 모르척할 뿐이지만 실제로는 늘 빠끔히 들여다 보곤 하는 - 내가 하고 있는 일(게임, 사업, 가족, 취미, 여행 등)에나 몰두하는, 남한에서 오랫동안 이불 뒤집어쓰고 밖을 외면하며 그 안에서 숨죽이면서 살았던 조상들의 삶을 택할까요? 조선시대 500년 내내 정치를 이데올로기(유교)로 헛발질하면서, 어떤 외적(청나라가 일으킨 정묘호란, 병자호란, 일본의 임진왜란)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백성을 외적, 내적 수탈의 늪에 한없이 빠지게 만들었던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던 정권과, 그것을 빼닮은 정권(사회주의)이 지속된다면 이런 분들은 어떻게 행동하실 건가요? 


 저는 이런 두 가지 부정적 태도를 버리고 ‘셋째 태도’를 과감하게 취하려는 입장에 서신 분들을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이 글뿐 아니라, 이 신문과 이 신문의 취지에 동참하는, 지역적 문화적 동네에 살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문화를 일으키려는 운동에 동참하려는 많은 분들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이런 위기감을 항상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의 나라에 태어나서 자라고 사는 것을 오히려 신의 섭리 정도로, 또 21세기 세계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기회로 여기며 이 땅에 뿌리박고 사시는 분들 말입니다. 즉 모든 개인, 가족, 모임, 단체들이 분발하여서 한국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안일한 자만심과 허망한 소비의식을 버리고, 이 참에 차라리 인간이 형성한 세계의 모든 문화/문명을 그 기초부터 재조사 연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쌓으려는 정말 용감한 분들 말입니다. 세계 11위라는 숫자는, 올 초 어떤 경제학자의 보고로는, 그야말로 ‘쥐어짠’(squeeze)가운데 만들어진 허수에 불과한 결과라는 겁니다.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요! 총각 한 사람이 헌 차를 몰면서 등록금이 싼 미국의 주립대학에 유학할 비용으로, 5명의 가족을 이끌고 그야말로 ‘쥐어 짠 듯한’10년의 유럽유학을 한 경험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 뿐이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종의 소명감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이 땅에 정착하여 자신의 삶을 일구며 자식들을 키워내고 가족을 부양하며 ‘쥐어짜며’사시는 수많은 소중한 분들을 대신해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이런 분들이라면 우리 주위에 있는 초강대국들, 칼을 항상 갈고 있는 일본, 너무나 이질적인 불곰의 날카로운 갈퀴를 가진 러시아, 어중이떠중이 민족들의 집합체이지만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초강대국 미국을 제대로 아는 것이 2019년을 출발하면서 해야 할 첫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를 내려치려는 듯이 높이 솟아있는 엄청나게 무거운 쇠방망이 같기도 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매우 다양한 기름들로 범벅이 된 것 같은 존재인 중국을 뼛속까지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엄청나게 많은 중국의 박물들을 소장한 대만의 고궁박물관에서 출판한 책들을 모조리 사들여오는 것에서 시작해 본 겁니다. 그 책들에 나열되지 않는 엄청난 양의 유물들의 사진을 되도록 많이 여러 각도로 세밀히 찍은 후에 차분히 그것들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서 이들의 감정, 생각, 사상, 심리, 정신, 문화 등을 서양, 그리고 중국, 일본, 심지어 한국적인 것도 아닌 제3의 독자적 관점으로 읽어내고 해석해 보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중국은 없다!’(1,2,3)에 이어 중국은 있다!(2)의 셋째 주제로 사람이 많다, 너무나 많다를 다루려고 합니다.    



셋째, 사람이 많다, 너무나 많다.


 중국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 광, 고’<많고(多), 넓고(廣), 오래된(古)>의 나라일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땅덩어리가 ‘넓다’(廣)는 사실은 중국을 조금만 여행해보아도 담박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인간이 형성하는 문화에서 ‘주어진’, ‘정태적’, 즉 ‘수동적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가(多), 그것도 얼마나 엄청나게 많은가 하는 것은 실제로 경험해도 사실 그 깊이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구는 ‘유동적’, ‘동태적’, 즉 ‘능동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면을 직접 들여다 보기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전의 글에서도 시도했던 것처럼, 현재 세계를 주도하는 서구문화, 그 중에서도 세계를 제패한 두 제국의 국민인 영국인과 미국인을 중국인과 비교하는 일입니다. 즉 어떤 것을 직시하기보다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관찰하는 방법 말입니다.     

  

 먼저 영국(U.K.)은 비교적 작은 땅덩어리에 지금은 남북한을 합친 인구보다 적은 나라(6천6백만)이지만 3세기 이상(17~20세기) 오랫동안 세계를 제패하였던 매우 특이한 나라입니다. 미국이 엄청나게 넓은 땅을 가졌으며 3억을 넘어가는 현재의 인구를 가진 가운데 세계제패의 역사를 2차대전을 기점으로 시작했다고 간주해 봅시다. 그러면 아직 백 여 년도 채 안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 제패의 역사가 구소련이나 현재의 러시아와 중국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3세기에 걸친 기간의 영국의 제패력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영국을 형성한 ‘능동적 요소’인 영국인으로 속한 분류된 사람들은 현재 거의 150여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어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다민족, 다인종적 국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인종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많은 인종들이 모여살기에 ‘맬팅폿’(melting-pot)이나 ‘셀러드볼’(salad-bowl)과 같은 나라인 미국을 오히려 능가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과거에 이웃한 아일랜드의 북부를 점령하여 스코트랜드와 영국인을 정착시켜 자신의 영토(북아이랜드)로 삼은 잘못된 과거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며, 현재로는 유럽연합에서의 탈퇴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영국인들이 이룬 긴 역사를 총체적 문화/문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중국이나 한반도의 오가작통법이나 현대의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것이 없이도 사회적 안정성과 정치적 통일성을 매우 잘 유지하는 특이한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억압적 지배아래 사는 것에 매우 익숙해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민증(주민등록증)부터 내놓고’확인하는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정치적 통일의 필요성은 매우 잘 알지만, 정부가 개인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그 주민이나 단체의 등록정보를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매우 긴 역사적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21세기 정보사회에서 영국정부가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대놓고 말하면서 개인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확인하는 것은 영국인의 상식에서는 매우 어긋납니다. 즉 이제는 세계의 초강대국은 아니지만 강대국의 하나로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인은 서구적 정체성을 가진 개인,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식화된 민족인 앵글로삭슨과 기타 계열의 민족들이 전체적으로 영국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구성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놀랍도록 유지하는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유럽연합을 향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쪼가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대단히 영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동양의 우리에게 매우 이상하고 신기한 나라가 영국인 겁니다.  


 미국은 중국보다는 작지만 매우 넓은 땅덩어리 위에 매우 다양한 다민족들이 모여들어서 3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매우 인위적으로 탄생한 유일무이한 나라입니다. 이런 유일무이성 때문에 다른 나라와 비교 불가능하고, 그만큼 오해하기 매우 쉬운 나라인 겁니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학업, 사업, 혹은 공적기관을 통해서 미국과 관련을 맺고 살거나 아예 미국시민권을 취득하고 정착하기 때문에 흔히들 미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심지어 신대륙 발견 이후에 미국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이해하는 미국이 미국의 전부일까를 생각하면 의문스러울 정도로 미국의 정체성은 아직 형성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인종과 민족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들로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최상위 계층에 있으면서 전체적 지배력을 엄청나게 강화한 집단이 미국인의 약 1/50 정도를 차지하는(7백만)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업적인 차원 하나만 보면 21세기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한 신사업으로 누구나 잘 아는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테슬라가 모조리 유대인이 만들고 운용하고 있으며, 미국 내에서의 이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미국 밖에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같은 숫자의 유대인과 이들이 함께 사업, 기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앞으로 중국과 미국의 대결이라는 외적 구도는 사실상 중국인과 유대인의 대결이 되고, 유대인들은 미국인으로 등록된 수많은 인종들을 이 대결구도로 집결시킬 시나리오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미국이라고 하는 특이한 나라의 장래를 다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인구의 1/50을 차지하는 유대인이 미국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1/300의 비율로 중국인을 268년(1644~1911)을 지배한 청나라의 만주족이 있었던 만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 둘의 단순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우선 유대인들이 미국에 오기 전에 매우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던 유럽인들이 여전히 미국의 주류사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을 호의적으로 친근하게 대하기도 한 영국이나 네덜란드 계통도 있지만, 정반대로 대적적으로 관계한 스페인, 독일, 러시아, 혹은 냉소적으로 관계한 동유럽계인들도 미국에 공존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유럽에서 가져왔던 다양하고 복잡한 기독교 전통(로마교, 개신교, 러시아/그리스정교) 또한 유대인이 미국 전체를 장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인종이라고 할지라도 이 나라가 전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도록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즉 미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든 다른 전통적인 인구구성을 하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국만의 전형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미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의 패권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기 때문에 혼돈을 거치지 않고 영국의 역사적 기초 위에 서면 되는 이점을 가졌습니다. 또 영국과는 다르게 엄청난 자원을 가진 매우 큰 땅덩어리에다가, 인구에 있어서도 영국의 5배 정도 되어 세계를 경영할 인적 자원이 매우 풍부한 나라가 된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철학적으로 경험주의적 영국인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문화와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또 그것이 세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 앞에서 말한 영국인들이 가진 자유와 책임을 핵심으로 하는 개인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이어받아서,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그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그 확신을 바탕으로 하는 무너지지 않는 사회구조를 형성하여서 전 세계의 공산화를 막는 자유주의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영국인의 개인정체성에서 비롯된 양당제(보수당, 노동당)와 유사한 정치구조(공화당, 민주당)를 만들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영국이 이미 형성해놓은 국제적 법질서 위에 서서, 어느 때에는 세계를 제패하는 팽창주의를, 다른 때에는 고립주의를 펼치기도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중국은 있다!를 외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중국인으로 우리의 눈길을 다시 돌려봅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는 있다!’라고 외칠 수 있으며, 그 말이 과연 진실일까요? 


 첫째, 중국의 땅(9억6천만ha)은 세계4위로 세계 3위인 미국(9억8천만ha)보다는 약간 작지만, 우리의 관심인 중국의 인구에 있어서는 역전 현상이 너무나 큽니다(중국인 14억2천만, 미국인 3억3천만). 즉 중국 땅이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그 위에 사는 중국인은 미국의 4배에 해당합니다. 이 보편적 자료는 21세기의 역사에서 앞으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인적 자원에 있어 중국이 이미 승리하고 미국에 이어 세계를 제패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은 있다!’라는 주제 중에서 ‘사람이 많다, 너무나 많다’고 말할 수 있는 핵심 근거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구인의 개인정체성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며 교육/훈련을 받아 모든 세계인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된다는 전제(1)에서 말입니다. 한 때 영국인들이, 또 미국인들이 세계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을 부러워하며 그 시민권을 얻기를 원했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중국에 사는 거의 5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민족들이 지금부터라도 엄청나게 창조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인종적 다양성이 인정받고 자유롭고 활발하게 합종연횡하며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역동성이 놀랍게 분출된다는 전제(2)를 이룬다면 정말 놀라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제패한 두 나라가 모두 인종적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현재의 미국보다도 그 땅에서 아주 오래 살았던 중국의 다양한 인종들이 만약에 그런 역동성을 이룬다면 그 창조적 파괴력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인종들이 동서남북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중국 땅위를 걸어다니며 관계를 형성해간 긴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중앙에 있는 땅인 중국 밖의 동서남북에서도 러시아인, 한반도인, 일본인과 동남아시아인들과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치를 가진 겁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놀라운 두 가능성을 가진 중국인들은 21세기 세계역사에 있어서 세계문화와 역사를 통합하고 우주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절호의 기회를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역사학에서 아날학파 시초인 F.브로델(Braudel)의「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역사해석의 기조를 이어가는 G.아리기(Arrighi)의「장기 20세기」, 「체계론으로 본 세계사」,「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는 베네치아→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지던 패권이 21세기에는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라고 봅니다. 영국과 미국은 패권국으로서 1) 기술의 발전, 2) 경제정치의 발전, 이어서 3) 금융의 발전과 동시에 패권의 종식이라는 과정을 거쳐왔는데, 이제는 그 패권의 자리를 중국이 차지할 지리, 정치, 경제학적으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아날학파는 너무 많은 것을 브로델의 주저서의 표현대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려는 한계를 가지기는 합니다. 더 넓은 의미의 문화/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매우 중요한 위치를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현재 세계문화/문명을 주도하는 서구인들은 자신들 자체의 한계를 잘 보지 못할 수 있으며, 그것을 돌파하는 방법도 스스로 알지 못할 수 있는, 소위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의 세계는 기계적 인위적 네트워크화한 문화를 가진 사회로 변화됨에 따라 서구화된 개인들이 가진 허무감/피로감/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커져가며,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의 생존가능성마저 위협받으며, 통합은 뒤로하고 분리일변도로 발전하는 학문체계 등으로 서구문화/문명이 어딘가 근본적으로 고장이 난 것 같은 상황이 된 겁니다. 이럴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있는 때에 그동안 인류가 이룬 문화/문명을 아예 철저하게 되돌아보면서 민족과 역사를 초월한 가운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각오를 가진 전제(3)를 중국인들이 이룬다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음 시대의 패권을 태평양을 넘어서 자연스럽게 미국으로부터 이어받으며 동아시아의 나라들과 함께 우주로 나갈 시대를 열 것입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단민족 국가인 한국이나 일본으로서는 그럴 위상까지 나갈 수 없는 사실로 오히려 부러워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것이 이루어질 전제들이 채워질 수 없는 현실적 조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지적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첫째, 중국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개인화된 중국인이 있었던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개인이란, 지난번 호에서 말씀드렸듯이, 신 앞에 선 절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합니다. 즉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확신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에 따른 행동에 절대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의 인간 말입니다. 현재의 모든 서양인들이 이런 개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그런 인간정체성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문화 전체가 그런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과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의 한계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인데,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인다는 겁니다. 이전에 ‘중국은 없다!’시리즈에서 말씀드렸던 종교, 지도/지리, 민족, 사상/철학, 정치, 공동체, 역사, 문화가 없다는 과감한 주장이 조그만 한반도에서 지르는 외로운 소리인지, 아니면 실제 사실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쌓이면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옥죌 수 있는 양날의 검인, 오래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쓸데없는 자부심이 그들을 그런 겸손한 단계로 내려가게 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셋째, 현재 중국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공산당의 한계입니다. 이들이 가진 서구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사실상 동양에는 맞는 것이 아니지만 정말 묘하게도 공산당 일당독재가 중국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길들여진 천자독재통치의 전통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 중국인들이 가진, 너무나 놀라운 가능성들을 여는 것을 방해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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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8호 중국은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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