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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패러다임의 전환

2019년 8월호(11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8. 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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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 역사칼럼 14]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패러다임의 전환

 

공주 석장리 첫 발굴지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나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책 3권을 들라하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최현배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 될 것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80년대 널리 읽혔던 책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학문적으로 정립한 책이 바로 이 책이지요. 저는 이 책을 대학 1학년 때 읽었는데 제목에서 느끼듯 사학과 1학년이 읽기에는 부담이 되는 과학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아마 당시 좋아하고 있던 여학생이 자기 대신 숙제를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독해서 읽지 않았을 책이었을 겁니다.

 책의 내용은 어려웠는데 제 나름대로 생각하기엔 이런 내용이었죠.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존 학문의 틀(패러다임)에 갇히다 보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존 학문은 퍼즐 맞추기에 불과하다. 누구보다 빨리 결과가 뻔한 퍼즐을 맞추었다고 자랑할 뿐이다.’
 책의 핵심 명제를 저는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지식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전공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가 배운 것에 갇히게 되고 특히 자기 전공 외의 문제 제기에 대해 귀를 막는다고 합니다. 항상 배운 것에 갇히지 않고 전공이 다르더라도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외우고 익혀서 지식을 축적했고 ‘대학교 들어와서도 그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식이 축적된다고 해서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죠. 그래서 저는 쿤의 말대로 항상 배우는 지식마다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되도록이면 상대방의 논리에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패러다임의 전환’이 책 속에서만 일어난 일인 줄 알았더니 우리 역사의 출발도 이와 무관하지 않더군요. 일제강점기 이래 우리나라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것이 기존 학계의 통설이었습니다. 1964년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부부 대학원생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주 석장리 금강변에서 구석기 유물로 추정되는 돌을 찾아 학계의 권위자를 찾아갔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고고학을 전공한 박사가 한 명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고고학 박사는 그들이 한국의 구석기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면서 돌려보냈지요.
 그들은 다시 그 돌을 가지고 연세대학교의 ‘손보기’교수를 찾아갔습니다. 손 교수의 전공은 조선시대였지요. 손 교수는 그들과 함께 석장리 현장을 확인하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였답니다. 
 손 교수와 대학원생 부부는 당국에 발굴허가를 신청했으나 우리나라에는 구석기 유적이 없다는 논리와 발굴 신청자들이 고고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다시 신청했으나 또 거절당했지요.
 다행히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발굴허가를 얻어내었습니다. 10년에 걸친 발굴 결과 공주 석장리가 구석기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물론 일제강점기 이래 구석기 유적이 보고된 적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학계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요. 우리 역사의 새장을 연 손보기 교수는 이후 전공을 고고학으로 바꾸어 우리나라 고고학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답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구석기실 입구에는 연천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구석기실 한복판에도 각지에서 발견된 여러 주먹도끼들이 전시되어 있지요. 하지만 구석기 전시 패널에는 공주 석장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답니다. 유물도 석장리에서 발견된 딱 한 점이 전시되었는데 너무 작아서 아마 이 유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학문적 성과에 대해 우리의 학계는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외래교수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소장
naraname2014@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8>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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