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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희 ‘진달래’와  사무엘 울만 ‘인생의 선물’에 대한 시평

2020년 2월호(12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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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이야기 해볼까요? 1]

전연희 ‘진달래’와 사무엘 울만 ‘인생의 선물’에 대한 시평

 

올해부터 새로운 칼럼 [우리, 문학이야기 해볼까요?]를 시작합니다. 글 쓰는 이들은 전문문학가가 아닌 문학 아마추어들로 문학작품에서 얻은 창조성과 자양분을 일반인들의 삶에 녹아들게 하려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나름 자세한 이해와 분석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학이 실제적 삶과 관련을 가지는 차원을 발견하는 일일 것이며, 아마 저자들도 이런 목표로 하는 대화를 기뻐할 줄 압니다. 

가장 먼저 2020년 새해를 맞이하여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매우 탁월한 두 편의 시를 골랐습니다. 한편은 너무나 한국적이고 친숙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교훈적이지만 새해와 새봄에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작품을 동시에 고른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서정적인 민족(한국인),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오랫동안 경험한 민족(유대인)이 각각 무엇을, 어떻게 그렇게도 다르게 표현하려 했는지를 비교해서 보는 겁니다. 정서에 민감한 한국인들에게 유대인의 교훈시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시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살아남기에 너무 빠삭하고 미국과 온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그들(구글, 아마존, 카길, 테슬라)의 모습을 이 유대인의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생존을 위해 극도의 노력으로 발버둥쳤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늘 소개하는 한국인의 시는 매우 닭살이 돋을, 혹은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주 만나고 대화하며 진정으로 한국적 정서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낙천성, 서정성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이 너무나 많아 시끄럽고(우리와는 달리 토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을 칼처럼 지키는 유대인을 다음에 만난다면 후자의 시를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감칠맛 나는 한국시를 소개해 보면 어떨까요?

진달래 | 전 연 희 (1947~  )

순이나 옥이 같은 이름으로 너는 온다
그 흔한 레이스나 귀걸이 하나 없이
겨우내 빈 그 자리를
눈시울만 붉어 있다

어린 날 아지랑이 아른아른 돌아오면
사립문 열고 드는 흰옷 입은 이웃들이
이 봄사 편지를 들고
울 너머로 웃는다


갈색의 주검이 널린 산속, 사방으로 춥고 황량한 겨울내내(‘겨우내’) 만들어져 영원히 갈 것 같았던, 그래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 ‘빈자리’. 그 빈자리를 메꾸며 갑자기 다가온 유일한, 드문드문 분홍색 하늘거림은 차라리 ‘눈시울만 붉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리라. 하지만 그‘눈시울’은 단지 기나긴 추위를 인내하여, 드디어 피어내어 생긴 슬픔이 배여서만은 아니니라. 
그 연분홍 붉음은 레이스나 귀걸이 하나 없는, ‘순이’나 ‘옥이’같은 이름이 가진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기며 가슴 뛰는 소식도 전해주는 꽃이 되기도 하지. 어린 시절 울(타리) 너머로 보였던 진달래꽃은, 흰옷 입고 사립문 드나들며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이웃들과 겹치는 연상을 만들기 때문에. 

가무와 신나는 것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서정성은 황금 같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똑바로 눈뜨고 바라보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이전에 흔하디흔한 이름 ‘순이’와 ‘옥이’, 그리고 유념해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없는 진달래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외국인이 알도록 영어로 번역할 수 있으랴! 마찬가지로, 그런 진달래의 갑작스러운 도래와 함께 전해온, 말 타고 서울 갔던 오빠의 귀환 소식과 같은 그토록 기다렸던 편지라는 연상의 겹침을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지. 그렇지만 그 소식과 그 소망이 너무나 사소하고 더 나아가 이기적인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지? 

생존 자체가 목적인 경우라면, 생존 자체가 본능인 동물과 어떻게 다르지? 우리는 2020년 새 달력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벽에 거는 반면, 2019년 달력은 사정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만약 내게 소중했던 나의 미래가 이제는 나의 과거가 되어 사정없이 사라진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무할까? 새봄의 전령으로 갑자기 등장하는 진달래가 보이는 소망, 혹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질 소망만을 말할까?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식물인 진달래는, 무한한 자유와 책임을 지니고 본능을 초월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 인간에게 다른 삶을 살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인생의 선물 | 사무엘 울만 (1840~1924) 

나는 가시나무가 없는 길을 찾지 않는다
슬픔이 사라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해가 비치는 날만 찾지도 않는다
여름 바다에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햇빛 비치는 영원한 낮만으로는 
대지의 고통은 시들고 만다 
눈물이 없으면 세월 속에 
마음은 희망의 봉우리를 닫는다
인생의 어떠한 곳이라도
정신 차려 갈고 일군다면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이
손에 미치는 곳에 많다

잘 알려진 그의 시 ‘청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교훈시다. 흐름이 부드럽고 이해하기 쉽지만 서정성을 매우 좋아하는 한국 시인이라면, ‘이게 시란 말인가?’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가 시로만 존재하고, 미적 아름다움만 전달하고 현실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가를 되 물을 수 있다. 하얀 손을 가지고 감탄할만한 글은 쓰지만, 현실에 무능한 혹은 위선적인 문학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치열한 전장 터에서 짧은 휴식시간에 삶과 역사를 끄적거린 평범한 시를 쓰는 완벽한 저격수가 될 것인가? 치명적인 삶과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이 놀라운 유대인은 본인이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표현한 교훈시의 내용을 21세기의 현실에서 구현해 내기에는 정말 만만찮다. 
한민족은 사방의 거대한 세력들이 용트림을 할 때마다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한(恨)의 민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보다 천 배 이상으로 더 독한 고통의 세월을 무려 2천 년이나 견디어온 유대인에게는 엄청나게 복잡한 정신과적 문제는 가지고 있을지언정, 한(恨)이라는 개념도 없다. 물론 오래된 성경인 구약이 말하는 ‘이는 이로’의 원칙을 따르는 복수 개념이 있어, 이로 인해 용서를 베푸는 것이 불가능한 민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대인은 정반대의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을 처절하게 직시하고 대처하는 삶을 사는 문화적 태도로, 이 시는 바로 이런 장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여름이면 우리는 낭만에 넘쳐 큰소리로 외친다. 하지만 이 시는 햇빛 가득한 여름 바다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명하게 밝힌다. 감정에 노출되고, 자기절제를 하지 못하며, 현실을 놓쳐서 결국 죽음에 이를까 두려워하는 유대인의 근성을 드러낸다. 심지어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사랑하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교차구조chiastic structure를 사용했다 :

 

이렇게 성공한 유대인들이 미국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알게 모르게 장악하고 있다. 정신 차려 일구어 풍성한 수확을 확실히 거두기 때문이다. 음악을 공 부하러 미국으로 유학 간 어떤 분은 거기서 음악은 모두 유대인이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머리에 둥근 모자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쓰며(신 앞에서의 겸손의 표시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미국에서 남자들이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그 어떤 민족도 따라가지 못하는 유대인의, 세상에 대한 처절함과 악착같음은 그들 특유한 장점이자 바로 그들의 약점이 된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대부분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종교적 열정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인생에서 죽음 이후는 없고 현재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 열정을 세속적으로 가지라고 말하며 열렬히 추구한다. 우리는 유대교의 핵심을 세속의 종교성과 종교의 세속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유대교(같은 뿌리를 가지지만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가 말하는 대로 ‘현재’뿐인가? 그렇다면 내가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법망에 걸리지 않고 교묘하게 살 수 있는 악한 지혜만 있다면, 얼마든지 악하게 살아도 되는 게 아닌가? 물론 이들은 역사와 현재에서의 신의 심판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악하게 살고 편안하게 죽은 이들(대표적으로 스탈린)이 너무나 많은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는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선물’에서 동일하게 고난을 통과하는 삶의 열정이 갖는 허망한 기초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동일한 문제가 전연희의 시, ‘진달래’에도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시는 시로만, 표현으로만 그쳐야 한다면 시적 감흥은 일시적이고, 허무하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현대시가 고대시처럼 철학과 종교는 말할 수는 없을까? 이제 우리는 20세기 내내 온갖 욕망(물질욕, 성욕, 지배욕)의 횡포를 있는 대로 다 부려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지나, 21세기의 포스트세속주의post-secularism 시대에 이르렀다. 
그 포악한 횡포의 결과(갈등, 폭력, 전쟁, 죽음, 이기주의 등)를 알고 있다면, 허무맹랑한 시들과 또 정반대로 위선적 소망을 주었던 시들은 이제 길바닥에 팽개쳐져야 할 것이 아닌가? 또 표현의 창만 날카롭게 갈아서 사람과 역사와 문화를 비관, 낙담 그리고 조소, 풍자로 몰고 가며, 시대정신을 따라서 문학 전문가가 공장에서 마치 찍듯이 제작된 헛된 시들은 버려져야 한다. 정반대로, 이제 인간과 공동체의 삶, 역사, 문화에 생명과 영속성을 주는 시들이 창조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기 위해 보통사람들이 자신과 공동체의 총체적 삶 자체에서 쏟아내는 평범한 시부터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표현이 아니라 영속적 감동을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 역사 자체가 시라면 더 위대하지 않으랴?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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