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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 놀랍고 극도로 환상적 기회를 얻은 한반도 한민족

2020년 2월호(12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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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의 황혼에서 새 문화의 여명으로 30]

21세기 초, 놀랍고 극도로 환상적 기회를 얻은 한반도 한민족

 

2020년 새해 벽두,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남한은 정치적으로 전 정권 뿐만 아니라 현 정권에도 속았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보다 훨씬 더할 뿐 아니라, 너무나 한심하게도 서양의 공산주의와 동양의 왕조주의를 합쳐 만든 희대의 괴물체제로, 남한과 일본, 미국까지 위협하는 핵놀음으로 정권유지를 위해 발악하고 있으니, 북한의 경제나 민생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요동치는 세계의 경제상황과 관계없이, 한국 안에서는 극소수의 대기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업들(특히 제조업)은 AI, 뇌과학, 빅데이터, 블록체인 같은 최신기술의 흐름에 대처할 여력이 없이 회사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앞으로 15년 후(2035)면 인간의 모든 지식이 갑자기 확장되어 인간이 인공지능의 노예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특이점’Singularity 시대의 도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비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과연 어떤 미래가 전개될지 아무도 답을 내놓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전체적으로 점점 더 심해가는 극단적 대립과 상호 의심과 불신때문에 이에 대처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소셜미디어가 급격하게 발전할수록 인간 개인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으며, 그 결과 현대사회가 극단적으로 전환될 시점에 선 것을 바라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디지털치매라는 용어가 가장 처음 사용되고 적용된 곳도 한국이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좁고 부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비관적 전망들이 우세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말할 더 넓고 깊고 다양한 관점에서 보면 2020년이야말로 한반도 한민족에게 새롭고 놀라운 것을 만드는 원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눈을 크게 떠서 바라보고 메이지유신 이전의 일본인들이 국가의 역량을 서구화에 쏟아붓는데 집중했다는 조건을 채운다면 말입니다. 18세기 스기타 겐파쿠(1733-1817)와 동료들은, 나가사끼를 통해서 들어온 당시 최신의 네델란드 해부학 전문서(Ontleedkundige Tafelen)를, 네델란드어를 하나도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문법을 하나하나 깨우쳐가며, 4년 만에 일본어로 번역해내었습니다(해체신서解体新書 1771-1774). 또 19세기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죠슈번의 젊은 하급무사들(이토 히로부미를 포함)은, 개혁의 기수로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1830-1859)이 세운 사학인 쇼카손주쿠松下學宿에서 배웠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한권 밖에 없는 서양어 사전에서 자신이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학생들은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을 꼴딱 세울 정도였습니다. 만약 21세기 하나밖에 없는 좁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상황을 우리도 한반도 한민족에게 매우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 과거 일본인들이 보였던 그런 열정을 발휘하여 맞이한다면, 전무후무한 역사를 세계 속에서 기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전무후무한 기회라는 주제를 세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A. 한반도 한민족에게 매우 유리한 네 가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 유럽문화(명)의 위기의 시대 (문명(화)사적 관점) 
     2) 동아시아의 패권시대 (정치, 국제관계의 관점) (2월호)
     3) 포스트-세속주의 시대post-secularism era(종교, 철학, 사상의 관점)
     4) 80억의 지구인에게 드디어 도래한 우주시대
  B. 한반도 한민족의 약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C. 우리만 가진 유일한 장점들을 살릴 때다 (3월호)
 
A. 한반도 한민족에게 매우 유리한 네 가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 유럽문화(명)의 위기(문명(화)사적 관점)
  21세기에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유럽문화(명)의 위기는 한반도, 한민족에게는 오히려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인(미국인 포함)은 자신들이 전세계를 지배해가면서 강요하거나 전파하였던 자신의 문화(명)에 대한 자신감을 모든 차원에서 상실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1) 먼저,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환경문제를 80억 모두가 일으킨 문제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 심각한 문제의 출발점은 17~18세기에 자랑스럽게 일으켜 전세계에 퍼트리며 현대문화(명)를 주도해 갔던 산업혁명과 기술문명에 있다고 뼈아프게 지적해야 합니다. 마구 만들어 돈벌고, 함부로 쓰고 또 버리는 무책임한 산업문화는 가져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구잡이 때문에 오히려 산업적으로 찍어낸다고 표현해야 할 폐기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만들기 전부터 고려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겸손하게 물질문명을 만들어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환경문제는 더 넓은 관점에서 철저히 대항해시대 이후에 세계를 주도했던 다방면의 유럽문화(명) 위기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위기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이 바로 전지구적으로 고통하는 정치적 혼란의 위기입니다. 프랑스 혁명(1789),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1845), 파리 코뮨Paris Commune(1871)이후,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수출되어 더욱 더 끓어 오르는 자본주의(헤겔 우파)와 사회주의, 공산주의(헤겔 좌파)의 치열하고 폭발적 대립은, 철저히 인간의 3대욕망(물질욕, 성욕, 지배욕)을 극단적으로 충족하고야 말겠다는 유럽적 정신의 무책임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우파와 좌파로 우왕좌왕하는 한국의 정치현실은 사실상 유럽의 정신공장이 생산한 마지막 쓰레기를 먹고 마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대로 계속한다면 우리조차도 유럽문화(명)가 붕괴될 때 거기에 동참한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볼장 다 본 유럽문화(명)의 전지구적 위기는 매우 역설적으로 한반도, 한민족에서 전혀 다른 문화(명)를 창조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다고 역사와 현실에 대해 무능하거나 도피하여 실패작으로 판명된 상대종교적 기원에서 출발한 동양의 정신문화에 되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더 어리석습니다. 대신 세상의 배꼽에서 인류가 원래 가졌던 ‘전역사적, 총체적’(holistic-wholistic) 관점에 돌아간다면, 겸손하고, 하나되어, 멀리보고, 오래가며, 타인을 섬기는 문화(명)를 만드는 기초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동아시아의 패권시대 (정치, 국제관계의 관점)
베네치아공화국 이후에 물질문명이 전개된 역사를 치밀하고도 거시적 분석으로 매우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는 브로델-윌러스턴-아리기의 아날학파는, 지난 500년의 패권 이동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베네치아(14-15c) --> 네덜란드(16c) --> 영국(17-19c) --> 미국(20c) --> 동아시아(21c)2)
                                                              
즉 지난 7백여년 동안 패권은 매우 특이하게도 한 번도 방향을 바꾼 적이 없이 서진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이런 현상을 직시하는 동아시아인들은 흥분할 수 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두 가지 현상에 명확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패권을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볼 것만이 아니라면, 어떻게 패권을 정의하여야 하며, 또 어떻게하면 오래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1세기 80억 인구의 전지구에 질서가 없다면 우리는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서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가서 살 것입니다. 또 지구의 외딴 섬에 살지만 최고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전세계인이 그를 세계대통령으로 모실 꿈과 같은 날이 오기를 적어도 고대는 해 봅시다. 하지만 그 전까지 어떤 한 민족, 국가가 긍정적 의미에서의 전지구적 통치global governance를 수행하는 패권을 장악하고 지구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현실적 대안입니다. 그런데 단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차원에서만 패권을 이룬다면 결코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에, 패권에는 종교, 정신, 문화, 물질 등의 총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화(명)를 유럽인이 좋아하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으로 간략하게 표현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 일본, 소련은 ‘물질적 합리성’을 최고로 추구하였지만 정신적,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합리성이라는 문화(명)의 ‘비물질적 합리성’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이 세 나라가 설령 전쟁(열전 혹은 냉전)에서 이겼다고 할지라도, 그 통치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일본이 비록 동양의 정신적 요소를 강조한다면서 ‘동도서기’東道西器(동양의 정신 서양의 기술)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이는 협소한 일본적 천황에 충성하는 정신이라는 헛된 구호에 불과했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제국 자체가 100년도 채 안되어 저절로 맥없이 무너진 것이 이런 사실을 방증합니다.  
‘총체적 차원’에서 매우 건강했던 20세기 전반의 미국이 1, 2차대전을 전후로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미국은 완전히 딴판이 되어서 ‘비물질적 합리성’이 퇴보하고 있음을 전세계인이 염려할 정도입니다. 물론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미국이 갑자기 한순간에 패권을 내놓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종교, 정신, 문화 등의 비물질적 영역에서 점점 후퇴, 타락, 퇴보를 거듭하는 현재의 미국을 보면서 우리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점은 샐러드-볼에서 야채들이 서로 완전히 섞이지 않고 따로 놀 듯이 백인계, 흑인계, 아시아계, 스페인계, 유대계가 확실하게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미국과 같이 민족적 정체성이 부족했던 패권국가는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거 200~300년 동안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최장수 패권국가가 된 것은 확실한 민족적인 그리고 거기서 출발한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이 견고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무력에 의존하여 갈수록 미국의 패권유지기간이 짧아질 것에 대한 아날학파의 예상시기를 더 많이 당겨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민족과 국가가 누구일까를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에서는 일본의 역사, 종교(신도), 문화, 정치를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패권을 정신과 물질을 포괄하는 총체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일본 민족은 패권을 장악할 능력도 자격도 없으며, 결코 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민족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중심주의를 메이지유신(1898)부터 2차대전(1945)까지 오랫동안 밀어붙이며 동아시아의 민족과 국가에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입히고도 지금까지 그것을 정상적으로 되갚고 회개하지 않는 나라가, 도덕적으로 세계를 지도할 자격이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라도 압니다. 이들이 메이지유신 이후로 최고조로 발휘한 역량을 모두 부정적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이들에게 지휘권이 주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패권국가가 될까요? 먼저 중국은 14억이라는 엄청난 인적자원과 거대한 땅덩어리와 그 속에 내재한 무한한 자원을 가졌으며, 장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것이 놀라운 장점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치명적인 약점은 먼저 민족적 정체성이 가장 애매한 나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한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거의 3천년동안 북쪽에서 꾸준히 침입하여 중국을 장악하고 오랫동안 점령했던 유목민족들이 중국대륙에 지배자로 눌러 살면서 남방에 살던 한족과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호탕한 북경인은 말타고 이동하는 유목민족의 기질을 가졌지만, 섬세한 상하이인은 남방에서 한 자리에 앉아 벼 키우는 정주민족의 기질을 가졌습니다. 중국 역사에 이민족이 남방한족을 지배한 시기가 70%라면, 중국 자체에서 발원한 한족이 대륙을 지배한 역사는 한, 송, 명 정도의 30% 정도일 뿐입니다. 또 중국 자체에서 발원한 종교(유교)는 철저히 정치의 장식품 내지 시녀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정치, 역사를 초월하든지 하여서(도교),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비판할 능력 자체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상대종교인 불교는 도교보다 더 현실을 초월하려는 종교이기 때문에, 문화(명) 자체에 충격과 변화를 제대로 줄 수 없었습니다.
또 현대중국은 공산주의 정책을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대약진운동(1959)에서 발생한 기근으로만 4천만명을 죽인 마오쩌뚱의 잔악무도한 공산주의를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합니다. 3)
거기에 더하여 공산당 자체가 하나의 지배계급이 되어서(최정점에 시진핑), 서양적 공산주의와 동양적 전제군주제를 병합한 모습을 보입니다. 북한은 거기에 한 술을 더 떠서 왕조적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었지요. 무엇보다도 유럽문화(명)를 근본적으로 천착하여 그 깊이를 알며 비판할 능력이 과연 14억의 중국인에게 있을까를 생각하면 부정적입니다. 14억이라는 거대한 인구 전체의 사고가 서구의 부정적 관점(공산주의)에서나 동양의 전제군주적 관점에서도 너무나 획일적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북쪽에 있으면서 지난 백여년 이상 호시탐탐 남진할 기회를 노린 러시아는 21세기에 패권을 쥘 수 있을까요? 우선 러시아에서는 종교, 러시아정교회가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이어받았으므로, 동방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중심을 둔 서방교회는 서로마가 망한 후에(476), 그 지리적 위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교황은 정치와는 독립적인 종교적 수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이후로 유럽 황제(정치)와 교황(종교)은 상호 협력 또는 비판하면서도 주도권을 놓고 매우 오랫동안 서로 투쟁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에 서방교회는 수많은 개혁이 일어났으며 가장 크게 종교개혁(1517)을 후반에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우선 자체적으로 종교개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신학적 원리에서 근본적 반성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동방교회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정치를 보좌하는 시녀와 같은 역할을 오랫동안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와 일체화된 교회가 정치를 정상적으로 비판할 신학적 구조 자체를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 정교회는 역사와 현실을 초월하거나 현실을 바꿀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신과의 신비적 관계를 추구하는 초월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을 피우며 3시간 정도 드리는 그 예배에 선 채로 참석하여 신과의 신비적 연합에 대한 체험을 강조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러시아가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낙후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농노제도를 19세기 후반까지도 가지고 있었고, 이 농노해방마저도 러시아 정교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러시아정교회는 신학적, 역사적으로 소련 시절에나, 그 이후 지금의 러시아공화국 시절에나, 사회, 역사, 특히 정치에 있어 건설적 비판자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독재자로 서서히 위치를 굳히고 있는 푸틴은 헤겔 우파의 러시아 이론가인 이반 일린의 정치철학을 근본으로 삼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확장하며 주변국가를 패권적 지배아래 두려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유사한 기도를 점점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의 대선개입시도,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조작 시도는 이를 반증합니다. 4) 지금도 북한 뿐 아니라 한국도 여론조작으로 정치를 건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 지리적으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지만, 아시아는 러시아의 자의식이 발휘된 근세 이후에야 개척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러시아가 아시아로 막 진출하면서 동방의 강대국인 청나라(강희제)와 처음으로 맺은 네르친스크조약(1689)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자의식은 명백하게 유럽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유럽의 주변부 혹은 끝자락이라는 심리적 열등감이 러시아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았습니다. 이들은 이런 열등감을 유럽문화(명)의 아시아재패기에 아시아를 향해서 우월감으로 변질시켜 아시아인들에게 투사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동아시아 민족과 국가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아시아 국가와 민족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소련이 공산혁명을 하면서 자국민을 엄청나게 많이 죽인 사실과, 1945년 이후 소련해체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를 전세계에 수출하면서 나타낸 잔악무도함과 천문학적 피해를 입힌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작은 예가 6.25전쟁을 경험한 한반도나 킬링필드가 되었던 동남아시아 정도일 것입니다. 소련의 역사적 정체성을 이어받은 지금의 러시아나, 한번도 개혁되지 않은 러시아 정교회는 이런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결코 지려하지 않으며, 역사를 단지 지나가는 과거로만 여길 뿐입니다. 윤리적, 정신적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나라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지도할 패권을 장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한반도 한민족은 동아시아시대에 세계를 지도할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무려 70년이나 반토막이 나서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지금의 인구수로는 지구 끝까지 나가 80억의 인구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듯이 보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우리의 눈을 확 뜨게 만듭니다. 
첫째, 만주족이 1644년 입관(산해관을 넘어서 북경에 진출)할 때에 중국인과의 비율이 무려 1:300이었습니다. 즉 만주족 1명이 중국인 300명을 통치한 겁니다. 그것도 한해 두해가 아닌 무려 268년 동안을 그런 비율대로 통치했습니다(1644~1911). 즉 인구수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의 의지와 기상과 실력과 노력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둘째, 세계에서 최장수 패권국가인 영국은 사이즈도 인구수도 우리나라만 하거나 조금 더 클 뿐입니다. 또 오랫동안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트랜드, 아일랜드의 네 정체성을 합하여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이루어 세계 구석구석으로 진출해서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했습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세계, 특히 미국으로 진출한 사람들은 지배국이었던 잉글랜드 출신보다, 도리어 정복당하고 사회적으로 위로 상승할 기회가 영국 내에서는 부족했던 스코트랜드나 아일랜드 출신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국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역사를 중심으로 총체교육Total Education을 하며 배울 때, 한 학기는 점령했던 이집트에서 시작했다가, 다음 학기는 통치했던 인도에서 출발하는 등으로 하여 세계적 전망을 아주 어릴 적부터 배양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두 사례에서 우리는 지금의 형편을 부정적이나 왜소하게 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건은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 개개인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자녀들은 게임방으로 환상여행을 가는 대신 세계와 드넓은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여 진짜 실력을 키우려고 할 것이냐는 데 있습니다.


각주 : 

1) 2020년 1월부터 환경에 대한 상반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첫째, 남아공에서는 1970년대에 600마리로 줄었던 혹등고래가 올해 3만 마리로 증가되었다고 보고한다. 둘째, 하지만 그 바로 동쪽에 있는 거대한 독립된 섬인 마다가스카르에서는 100년 안에 모든 곤충이 멸절되며 이런 생태계 파괴로 그 곳 사람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반된 보고는 현상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전형적 서구문화(명)의 오류와 어리석음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보고들을 아무리 많이 긁어모아도 역사를 한꺼번에 관통하면서 전체 사태를 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상반된 보고들을 읽으면서 현대문화(명)에 대해 소망과 절망의 시선을 교차해서 가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지혜로운 행동은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오래전부터 르네상스 이후로 지속되어 발전한 그들의 문화(명) 자체와 전제까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고 고치는 일일 것이다.
2) 지오바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009.
3) St.Pinker,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2011, 195
4) 티모시 스나이더, 가짜민주주의가 온다, 2019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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