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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휴먼드라마를 지휘하는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장윤성 지휘자를 만나다

2020년 2월호(12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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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감동의 휴먼드라마를 지휘하는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장윤성 지휘자를 만나다

지휘자  장윤성
서울예고, 서울대 음악대학 졸업, 빈 국립음악대 디플롬 졸업
러시아 프로코피예프 국제지휘자콩쿠르 2위, 
일본 동경 국제지휘자콩쿠르 1위 없는 2위 입상
러시아 상트페테르스부르그 필, 독일 뉘른베르그 심포니,
오스트리아 빈콘서트페라인, 이탈리아 로마심포니, 
체코 프라하 심포니, 일본 오사카필 등 지휘
서울시향 수석 객원 지휘자, 울산시향, 창원시향, 대전시향, 
일본 오사카칼리지 오페라하우스상임지휘자 역임
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지휘전공 교수
현)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임지휘자

 

 1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 학생기자와 함께 장윤성 지휘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군포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팜플렛 속 사진에서 풍기는 근엄한 모습을 바로 허물어 버리고, 음악과 함께 한 재미있고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로 바로 들어갈 수 있어서 대화하는 시간 내내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장윤성 선생님이 직접 지휘하는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2020 신년음악회’에 바로 참석했지요. 하루 전 나누었던 대화와 중첩되어 전해오는, 삶이 녹아있는 생생한 음악을 감상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된 것이죠.

군포중 1학년 학생기자, 장은비 학생의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제 꿈은 생물공학자가 되는 것인데요. 지휘자님은 언제부터 음악을 하려고 생각하셨나요?”
어릴 적 우리 집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군요. 아버지는 군인이셨는데, 미군 부대 PX에서 전축과 함께 클래식 레코드판을 사 오실 정도로 클래식 음악을 아주 좋아하셨죠. 아침에 형과 제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크게 틀어놓으셨는데, “따-다-다-다~”소리에 우리는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지요(웃음). 게다가 어머니는 아주 소박한 꿈을 가지고 계셨는데, “우리 집에 찬송가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죠. 그리고 어머니는 그 소원을 이룰 장본인으로 저를 찍으셨어요. 형님은 아버지를 닮아 수재(秀才)인지라 공부 외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셨는데, 만만하게 저였던 거죠. 마침 아버지 밑에 계신 부사관의 사모님이 피아노 학원을 하셨는데, 그분께 저를 맡기셨어요. 당시에는 남학생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였죠. 하지만 이것이 음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작은 시작이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다니던 학원을, 드디어 중1이 되어 그만두면서 피아노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2 어느 날, 음악 선생님이 “장윤성이, 누구야? 너 피아노 친다며! 네가 칠 수 있는 곡을 한 번 쳐봐” 하시더군요. 저는 1년 전, 마지막으로 쳤던 곡을 기억해 내어 연주를 시작했는데, 연주를 들으신 선생님이 “내일 어머님 모셔 와라”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음악 선생님을 만난 어머님은 저를 부르셔서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말씀을 하셨죠. “너 이번 주부터 음악 선생님에게 작곡 레슨을 받아라. 너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 가야 할 것 같다.” 물론 저는 동네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노래를 잘하기는 했지만, 음악 작곡이라니! 제가 가장하고 싶었던 공부는 학생 기자처럼 생물학 분야였거든요. 하여튼 어머니의 명을 따라 작곡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서울예고를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인생이 운명처럼 펼쳐지게 되었던 거죠.

 음악을 하면서 힘든 것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제가 예고에 들어갈 때는 압구정동이 막 개발되어 아파트가 세워지던 시기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저와의 경제적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예중, 예고부터 가정의 완전한 뒷받침 속에 음악을 하는 아이들과 저는 비교가 되지 않았죠. 그래서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악기를 그렇게 잘 다루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 온 것도 아니었던 저는, ‘내가 뭐 하러 여길 왔지? 내가 이것을 왜 해야 하나?’라는 고민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레슨비가 없어 선생님에게 밀려나고, 다른 선생님에게 갔다가 거기서도 밀려나고… 저는 부유한 친구들과는 너무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이 방황은 당연한 거였죠. 우여곡절 끝에 예고를 마치고,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하고, 제가 나온 예고에 다시 강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 담임선생님이었던 분이 우스갯소리로 “나는 장 선생이 정말 고마워” 하시는 겁니다. “예고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에 가장 환경이 어려운 사람을 꼽으라면, 장 선생이지!”라면서 말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었음을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거였죠.
 작곡하는, 음악적으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이런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돌파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저에게는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예고에 다닐 때는 한 주에 한 번씩 ‘향상음악회’라는 연주발표회가 있었습니다. 학생들 몇 명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데, 저는 전공이 작곡이라 안 해도 되지만, 피아노곡을 연주하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틀어박혀 작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답답한 무엇인가를 발산하는 거죠.

 올슨이라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노 연주자는 어릴 적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곡을 듣고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혹시 음악에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요?
 제가 예고 1학년 올라가자마자, 한 해 선배인 김대진(지금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학과 교수 재직)이 중앙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 대상은 매우 특별해 부문별 1등끼리 모여 경쟁해서, 최고에게 주는 상이었죠. 고2가 대학생, 대학원생 심지어 유학까지 마친 사람들을 다 제치고 통틀어 1등을 했으니 대단했던 거죠. 그 연주를 본 것이 예고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이었었는데, 그야말로 정말 쇼크였습니다.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는 사람을 처음 보았거든요. 그런 그를 나와 비교할 때에 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작곡에서 지휘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서울대 음악대학에서는 제법 오래전에 학부부터 ‘작곡과’와 ‘지휘과’를 분리했습니다. 제가 다닐 때는 작곡과 하나만 있었고, 지휘는 지휘 교수님이 합주 수업을 따로 했습니다. 저는 예고에 다닐 때 작곡을 전공하다 보니 교내 성가대 등에서 자연스럽게 지휘할 기회가 있었는데, 조금씩 지휘의 매력을 느꼈지 뭡니까! 그래서 대학교 1학년에 들어가자마자, 오케스트라 합주반 수업을 청강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지휘하러 오신 박은성 교수님이 “너는 누군데 맨날 와 청강을 하냐? 지휘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그러면 다음 시간에 베토벤 교향곡 1번 1악장을 준비해 와서 지휘해 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지휘로 전공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지휘과 공부를 마치신 분은 박은성 선생님 혼자였어요. 후에 이분 때문에 저는 지휘를 공부하러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을 떠가게 되었죠. 

 지휘를 위한 비엔나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유학은 어떠했는지요?
 가정형편 때문에 바로 유학을 갈 수 없었던 저는, 여러 해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1990년 9월 하반기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빈에서 공부하던 중, 93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프로코피에프 국제지휘자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했고, 부상으로 지금은 세계적 지휘자가 된 ‘발레리 게르기에프’(Valery Gergiev) 선생님께 1년 동안 연수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요. 이것이 제가 러시아로 유학 생활을 이어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수를 마친 후, 비엔나로 돌아온 저는 빈 국립음악대학에 휴학하고, 러시아로 가서 1년 정도 지휘를 더 배웠습니다. 이때가 저에게 제일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비엔나에서는 공부할 때 “악보에는 이렇게 명확하게 쓰였는데, 너는 왜 다르게 이 부분을 빠르게 지휘하니?”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지도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쉬웠고 좋았어요. 왜냐하면, 악보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죠. 이것은 “너는 어떤 근거로 그렇게 지휘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 가면서부터 이전에 배웠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제가 악보를 가리키며 이 부분은 이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 물으면, 선생님은 “지휘자인 너 자신은 크게 하고 싶니, 아니면 작게 하고 싶니? 네가 빨리하고 싶다고? 그러면 얼마큼 빨리하고 싶니?”이런 식으로 물으시는 겁니다. 바로 저 자신의 주관적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죠. 문화적 차이뿐 아니라, 음악의 전통에 있어서 게르만(독일, 오스트리아)과 러시아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작곡가의 의도보다 해석자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네요?
 그렇죠! 게르만 음악에 있어 지휘는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면, 러시아에서는 지휘자의 해석이 결정적인 거지요. 이렇게 비엔나와 러시아 사람들의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달랐고, 동양인인 내가 정반대의 두 곳에서 동시에 받는 문화충격은 엄청났지요. 제가 러시아 음악에서 만난 것은, 뭐 하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만의 음악 인생을 다양한 생각, 역사, 철학 등으로 가미할 수 있는 풍성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영향을 준 스승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딱, 이분이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꼽으라면 저를 가르쳐주셨던 ‘발레리 게르기에프’(Valery Gergiev)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지휘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Yuri Temirkanov)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두 분 모두가 ‘일리야 무신’(Ilya Musin) 선생님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저도 저의 선생님의 선생님이신, 무신의 클래스에 들어가서 수학하는 행운을 얻었지요. 러시아의 지휘자들 계보는 모두 이 무신 선생님으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지휘자로서 존경하는 지휘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올해 베를린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가 된 ‘키릴 페트렌코’(Kirill Petrenko)인데, 정말 글자 그대로 친구예요. 러시아 출신 지휘자이며, 저와 같이 비엔나에서 공부도 했고, 같은 스승의 제자인데 사실 저보다 한참 아래 후배였어요. 그 친구가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제 주변에서 베를린필하모닉 지휘자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저는 그런 곳의 지휘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요.(웃음) 키릴 페트렌코가 제가 다닌 빈 국립 음악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저는 러시아 지휘 콩쿠르에 입상했을 때라, 그 콩쿠르를 잘 아는 러시아 사람인 그는 저를 잘 나가는 동양의 선배로 여겼을 겁니다. 한국인이 입상해서 저를 매우 좋아했었고, 서로 좋은 선후배로 지냈지요. 키릴 페트렌코는 자신만의 특이한 열정을 지휘에 쏟아부어 곡을 해석하는 멋진 지휘자입니다.

 몇 명의 친구들과도 마음 맞추기가 힘든데,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하모니로 만들어 연주한다는 것이 힘들 것 같아요. 어떻게 조율하시나요? (학생기자의 질문)
 사실 하나로 연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지휘자가 아니고 작곡가입니다. 음정을 어떻게 맞추고, 어떤 소리여야 하고, 어디를 크고 혹은 작게 하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작곡가가 악보에 다 써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한마디로 음악마다 헌법이 주어진 거죠. 그래서 작곡가가 100% 중요합니다. 여기에다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협치(協治)를 위해 모인 집단입니다. 파트를 따로따로 맡기는 하지만,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악기와 음색을 가진, 각자 개성을 가진 연주자들이지만, 같은 곡을 연주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서로 융합하는 것이죠. 그런 융합을 위해선 각자의 파트만 보고 연주하는 연주자보다 전체 악보를 보고 지휘하는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곡을 해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저는 항상 음악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악보에 적어 놓은 작곡가의 모든 것을 공부하고 외우고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저에게 있어 지휘는 청중이 감동할 수 있는 휴먼드라마를 쓰는 것이고, 그러기에 음악에 담겨있는 인간적 고뇌와 희노애락을 표현하고자 애씁니다. 이것이 제 머릿속에 명확해야 자신 있게 지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달할 때 ‘도레미’, ‘레파라’를 전달하는 게 아니고, 뭔가 스토리텔링을 들려주듯이 감동적인 음악으로 만들어 가는 거지요. 그래야 청중들도 감동하고 저도 보람 있지 않겠어요? 

 클래식은 서양의 음악인데, 한국인으로서 클래식을 지휘하는 것은 어떤가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카테고리(헌법)를 정해놓는 사람들이 작곡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작곡가들이 너무나 없습니다. 제가 러시아에서 너무 부러웠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 지휘자는 러시아 작곡가의 곡만으로도 모든 연주를 다 채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클래식 음악제를 해도 한국 작곡가가 한 명도 없어요. 이게 얼마만큼 손해인 줄 아세요? 제가 외국에 나갈 때 “무슨 곡을 하겠느냐?”며 연락이 옵니다. 예를 들어 독일 오케스트라라면, “브람스요”라고 했을 때, 독일 연주자들처럼 브람스를 아주 잘 아는 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식상한 것이죠. 내로라하는 수많은 지휘자들이 수십 수백 년 이상 브람스를 다루어왔기 때문이죠.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어서 우리는 기가 팍 죽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브람스와 이 곡을 같이 연주했어요!” 음악의 DNA가 완전히 우리와 다른 거죠. 러시아 지휘자들도 외국에 갈 때 러시아 곡을 위주로 합니다. 저는 세계적인, 세계의 연주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한국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 10개만 있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예를 들어 푸치니의 오페라‘나비부인’을 공연할 때, 일본인들은 기모노를 입고 공연을 보러옵니다. 또 투란도트를 공연할 때는 중국의 자금성이 배경으로 펼쳐지죠. 우리는 우리나라 작곡가도 없지만, 외국인들이 작곡한 것 중에서라도 대한민국을 내 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한국과 관련된 클래식 음악은 하나도 없나요?
 한국(문화)과 관련되어 클래식 음악으로 작곡된 곡이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 폴란드 작곡가인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에게 광복을 기념하는 곡을 부탁해 만든, 펜데레츠키 교향곡 5번 ‘Korea’입니다. 이 곡을 작곡가 자신이 한국에서 KBS 교향악단과 초연하고, 제가 헝가리,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초연했습니다. 아마 이 곡을 제일 많이 지휘한 사람이 저일 겁니다. 저는 이 곡을 지휘할 때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이 곡이 광복절을 기념한 곡이라, 모티브를 제 나름대로 해석해서 할 수 있는 동기들이 아주 많거든요. 특히 이 곡에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멜로디가 나옵니다. 한국인 누구나 아는 이 멜로디의 배경, 역사 그리고 그것에 담긴 한국인의 애환을 유럽인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제가 폴란드에 가서도 그곳의 단원들에게 “여긴 이렇게 연주해 주세요.”라고 과감하게 요구할 수 있는 거죠.
 둘째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쉔베르크 등의 마지막 계보를 잇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헤르베르트 빌리(Herbert Willi)에게 위촉한 ‘정’(情)이라는 40분짜리 곡입니다. 10년 전에 이 작곡가를 한국으로 초빙해 우리의 자연을 보게 하고, 템플스테이까지 시키면서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DNA에 뿌리박혀 있는 너무 자연스러운 개념인‘정’(情)이라는 주제로 작곡을 한 것입니다. 이 곡이 올해 4월, 빈 필에서 초연됩니다. 초연되면 저는 이 두 곡으로 음반을 내는 게 제 인생 후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후배 지휘자들에게 마지막 히든카드를 지니도록 하고 싶은 거죠. 
우리에게도 윤이상, 진은숙 등의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계속 나와야 합니다. 실패하더라고 새로운 곡을 자꾸 만들도록 해야 하는데, 이런 시도를 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작곡가들이 활발하게 작곡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저는 음악회에서 우리나라 작곡가가 만든 곡과 새로운 현대음악을 공연마다 연주하려고 합니다.

 지휘자 장윤성 선생님의 음악 여정 속에서, 남달리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한 길을 걸어오신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유롭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이야기하실 때는 마치 순수한 소년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그가 지휘하는 음악에 녹아들어, 감동적 휴머니즘으로 배어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한 선생님의 바람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청중을 만날 수 있도록 적어도 년 4회 정도의 정기연주회를 하는 것, 두 번째는 오케스트라가 더 발전하기 위하여 군포 주위의 시민들이 자발적 후원을 하며, 공공기관들이 문화예술을 위한 순수한 예산지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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