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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 나라 ‘칠레’(2)

2020년 2월호(12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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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인]

 

긴 긴 나라 ‘칠레’(2)

장사에 도튼 사람들
만나는 칠레 교민들마다 나름 귀띔해주는 말이 그냥 가게를 하나 얻어 옷을 팔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빨리 가게를 차리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전설 같은 옛 얘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얼마나 장사가 잘되든지. 다 팔고 없다 하니까 내가 입고 있던 윗도리를 벗어달라고 하는 거야 글쎄. 그 땀내 나는… 재고가 어딨어? 다 팔았지.”

한국 교민들의 대부분이 산티아고의‘빠뜨로나또’라는 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습니다. 20년 전 칠레에 도착할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소위 ‘보따리 장사’가 대부분이었고 규모가 더 큰 형태는 천을 사다가 직접 제품을 만들어가며 판매를 했습니다. ‘보따리 장사’는 가령, 동대문시장에서 덤핑으로 사서(한국이 여름이면 칠레는 겨울이고, 칠레가 여름이면 한국은 겨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싸게 살 수 있었다 함) 비행기에 보따리 보따리로 싣고 와서 파는 형태였습니다. 당시에는 칠레 국민 대부분이 색감에 그리 민감하지 않아 옷들이 검정, 아니면 회색이나 국방색 같은 무채색 계통의 색깔뿐이었습니다. 밝고 화사한 옷들은 윗동네의 잘사는 동네에서나 팔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옷을 잘 만드는 교민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습니다.(그러나 그런 교민은 사실상 많지 않았음)

가게를 차릴려니
발 빠른 교민들 몇몇은 중국에 들어가 값싼 중국제품 옷을 수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가격경쟁이 안 되어 너도나도 잘 살 수 있던 그나마의 길이 더욱 막히기 시작하더군요. 칠레는 특이하게도 성실하게 장사를 한다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장사가 잘되는 목이 가장 중요하기에 아무래도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목이 좋은 곳은 당연히 월세가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본이 없는 저는 계를 들어 자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돈만 까먹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뻔히 보이기에 주변 사람들이 그냥 가게를 열면 된다고 조언을 해 주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계를 타 그 돈으로 일어선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이 안 가고 그동안 살아 온 관성에 비추어 보니 영 내키는 제도가 아니어서 계를 들게 해주고 돈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다 뿌리쳤습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이것저것 재 보다가 도무지 안되겠다 싶어서 장사는 포기하고 남의 가게에 취직했습니다. 

칠레사람들의 성격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이민 초기에 만난 교민들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분들이었는데 이분들이 친절하게 칠레사람들의 성향을 열심히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얻게 된 칠레사람들의 성향에 관한 정보가 무려 15년간이나 나를 지배하더라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잘못된 정보였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칠레 애덜은 게으르고 배은망덕하고 주인 알기를 개뿔로 알고…(웃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칠레사람들을 보니 딱 들어맞는 거 있죠? 저도 아내도 그때부터 이 막 되먹은 칠레사람, 아니 가게 점원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되먹지 못한 칠레사람들의 국민성을 고쳐보겠다고 말이지요. 물론, 잘못된 정보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직은?
아내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페인어학원(독일문화원)에서 열심히 말을 배웠습니다. “장사만 잘하면 되는데 뭐 하려고 돈을 써가며 말을 배우러 다니냐”는 교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터라 눈치 보며 말을 배우러 다니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생기더군요.(절대 탓하려는 뜻이 아니고 무지라는 편견에 대해 얘기한 것임) 아무튼 아내가 학원에 다니며 말을 어느 정도 구사하기 시작하니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물가가 워낙 싸 장사를 하는 교민 대부분이 한국인 관리자를 한사람 쓰는 정도의 경제 규모가 되었고 또 스페인어를 대충 구사해도 일자리는 많이 있었습니다만 칠레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아무래도 말을 잘해야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잘나가는 옷가게에 취직이 되었고 저도 원단 가게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아주 적응을 잘했지만, 음악 공부에 미련이 있던 저는 독일로 내뺄 생각 때문이었는지 도무지 적응을 못해 3주 만에 자의로 나왔습니다. 아내는 열심히 옷가게를 대신 경영해주며 월급을 받아왔는데 당시 미화 천 달러 정도였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곧이어 저도 다시 취직이 되었는데 한인회의 교민신문을 만드는 편집일이었습니다. 예전에 학습지에서 편집일을 많이 해보았기에 미지근한 죽 먹듯, 딱 안성맞춤의 직장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칠레에 첫발을 들여놓은 초기 삼 년간, 한 달에 2000달러를 가지고 생활하는 빠듯한 산티아고의서민이 되었습니다.

- 3월호에 세 번째 스토리가 연재 됩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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