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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약자)의 얼굴’의 철학자, 레비나스를 아세요?

2020년 2월호(12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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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약자)의 얼굴’의 철학자, 레비나스를 아세요?

01 | 전쟁과 서양 철학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한 형제 
1500년 동안이나 예수사랑이라는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은 유럽이 어떻게 해서 국가사회주의와 인종주의라는 괴물을 생산하여 2차세계대전동안 마귀적 살인과 파괴를 자행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고민했던 한 프랑스 철학자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상하게 보일 것이지만 명백하게 사고하도록 만드는 한 명제로 시작합시다. ‘자기중심적인 서양철학과 갈수록 잔인해지는 서양의 전쟁은 닮은꼴 한 형제’. 먼저 서양철학은 대부분 종교를 거부하는 대신 그 자신이 종교가 되어서 하나의 총체적 체계를 세우는 전통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에 맞지 않는 모든 행동, 조직, 체계, 인간들을 과감하게 제거합니다. 특히 관념론이나 생각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체계를 세우는 존재론이 그렇습니다. 또 전쟁은 국가나 정권이 설정한 목적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 영토, 물질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거하거나 탈취합니다. 폭력성에 있어서 서양철학이나 전쟁은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서양철학이 근본적으로 인간을 전체 사회나 조직의 일부분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철학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해서 개별 인간의 존엄성과 타자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입니다.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출신인 그가 서양철학의 기본흐름을 거스르는 이런 대담하고 혁신적 사유를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 위험에 처한 경험적 이유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무솔리니(이태리)와 히틀러(독일)의 등장으로 국가사회주의가 정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벌어진 세계대전, 그것과 직결된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유는 책상머리에서 난 철학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정치적 폭력과 인종주의라는 악을 드러내고, 서구철학과 전혀 ‘다르게 사유함’으로 자신의 민족과 보편인류를 지키려는 치열한 철학적 전투중에 창조된 겁니다. ‘다르게 사유함’이란 
1) 나를 중심으로 다른 존재를 타자화시키는 ‘주체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 
2) 나의 고유함과 동시에 나의 존재 저편에 있는 ‘타자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타자성의 철학을 하자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에서 타자를 나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최고로 여기는 이기성 때문입니다. 이런 서양철학으로부터 전쟁을 숭배하는 전체주의 철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02 | 레비나스 철학의 위대성 두 가지
그의 철학은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고통을 겪는 구체적인 인간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향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전통적 서양철학처럼 ‘나’를 절대화하지도, 다른 인간들을 과학의 대상으로 대상화시키지도 않고, 대신 인간의 의미를 이웃과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깨달아지는, 인간의 진짜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지요. 즉 그의 철학의 위대성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
1) 타자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을 호소하는 정치적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풀어내어 인간이 스스로 고민하도록 설득합니다.
2) 이를 통해 존재론 우위의 서양철학의 전통을 거꾸로 뒤집어서 윤리학 우위로 만들었습니다.

03 | ‘책임의 윤리학’: 독일철학 비판
레비나스 사유의 핵심 주제는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나의 자유에 대하여 져야 할 책임’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단지 내 삶을 내가 책임을 진다는 의미일 뿐이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차원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의 윤리적 의미는 ‘타인을 위한 책임’을 질 때 성립합니다. 주로 근대 독일철학에서 발견하는 1인칭 절대성의 관점으로 보아서 타자는 나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을 삼는 것이 극단적으로 발전된 형태가 바로 나치즘, 일본중심주의와 같은 종족주의입니다. 같은 가족, 민족, 나라, 종교 안의 사람만 받아들이고, 그 외에는 모조리 타자란 도구로 배제하거나 이용하는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이것은 결국 개인중심주의라는 욕망이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된 형태로, 민족과 국가간의 폭력, 갈등,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 역사의 본질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전쟁’이 되고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책임이 불가능하며 윤리가 들어설 자리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의 존재를 유지, 확대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차원을 넘어서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삶으로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어디에 있을까요?
 1) 그는 이 가능성을 나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과 나의 내면에서 찾지 않습니다. 대신 나의 존재 바깥인 타인과 만나는 ‘윤리적 사건’에서 찾습니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사건’이란 ‘타자가 얼굴로 (내 앞에) 출현하는 사건’입니다. 이 얼굴은 흔히 생각하는 육체적 얼굴과는 다릅니다. 세계 안에는 어떠한 지시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한 인간 실존을 그대로 보여주는 얼굴입니다. 종교적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계시 같은 것으로 갑자기 번쩍하면서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은 겁니다. 
 2) 이어서 타인은 이렇게 얼굴로 나타나서 ‘말을 건네옵니다.’ 단순차원의 대화가 아니라 ‘너는 나를 (제발) 죽이지 말아다오’라는 일종의 정언명령과 같은 구체적인 말입니다. 이렇게 ‘타인’은 자기방어가 도무지 불가능한 비참한 상황에서 신체적,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얼굴로 ‘나’에게 호소합니다. 이 만남과 말에 정당하게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이 바로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고 그를 ‘환대하고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04 | 무한자를 향한 주체성 : 프랑스철학 비판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렇게 (근대 독일의) 주체중심주의적인 관념론 철학 전통에 대해서 뿐 아니라, 정반대로 주체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2차대전 이후의 프랑스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개인의 인격성, 타자성, 인간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으로 그는 ‘나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를 강조하여, 나의 세계라는 전체 속에 귀속되지 않는, ‘무한자’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데카르트로부터 직접 빌려와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용어입니다. ‘무한자’란 인간의 의식과 관계하면서도 항상 이 의식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무한자’는 초월적 영원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현실의 부당함과 그것에 대한 나의 책임에 주목합니다. ‘타인의 얼굴’을 가진 ‘무한자’를 깨닫는 사건은 폭력과 지배를 깨뜨리는 역사적 사건이며, 의식에 충격을 가져오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변혁할 가능성까지 열어줍니다. 
그러면 타인을 위해 나는 완전히 포기되고 타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 즉각 듭니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나의 나됨, 즉 자기성’이 우선해야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자기성은 먹고 마시고 삶을 즐기는, ‘향유’하는 가운데 발생합니다. 향유, 행복이 자기성의 원리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성이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면 ‘이기적’이 됩니다. 그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이기적 자기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초월적 주체성’을 이야기합니다. ‘얼굴로 나타나서 나에게 호소하는 타자’를 내가 환대할 때 진정한 의미의 ‘환대하는 주체성’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한자를 통한 주체성’입니다. 즉 인간은 향유를 통해서 이기적 자기성을 가지지만, 이기성을 초월하는 계기가 바로 타자의 출현이고, 이런 타자를 환대할 때 비로소 나는 새로운 초월적 주체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05 | 유대인 레비나스는 팔레스타인인을 그가 말하는 ‘타자’로 볼 수는 없는가?  
그러면 초월적 주체성을 위해 이타적 행위를 할 마음이 자신 속에 있지 않다면 이게 가능할까요?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약자인 타자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말을 걸 때, 내 속에 일종의 이타심이 창조되고 실행하려는 욕망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욕망은 ‘형이상학적 욕망’이며, 윤리적 욕망입니다. 
여기서 레비나스에게 하나의 질문만 던져봅시다. “당신의 철학은 과연 한계있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입니까?” 레비나스가 유대인 말살과 개인 멸절이라는 절박함 앞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에 대해 사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유의 완성을 위해서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넘어서야하며 그럴 때 이 사유가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대한 책임을 강조하게 된 동기가 약자인 유대민족과 철학자 자신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독일 주도하에 유럽에 살았던 독일인으로서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유를 하자고 주장하고 실천했다면 말이 됩니다. 하지만 죽을 지경에 처한 한 철학자가 타자를 위한 책임의 철학을 말하니 유대인과 모든 약자와, 무엇보다도 자신을 변호하는 철학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폭력과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내쫓고, 예루살렘에 새시온을 건설하자는, 종교적, 세속적 시오니즘이라는 환상을 향해 철학적으로 어떤 호소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의 유대인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미국, 그리고 현대국가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최강자에 속하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전쟁, 폭력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고 또 행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 철학의 강점을 강자가 된 자기들에게 가장 먼저 적용하여, 팔레스타인을 강제로 탈취한 사건을 회개하고, 땅을 내어주어 같이 살아가며, 또 그들과 이웃인 이슬람민족들과의 평화의 손길을 내미는 과제가 이제 레비나스의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주식회사 첼렘 대표 추광재
calebchoo@tselem.kr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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